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95)
외전 12. 이상한 나라의 양아치
이보배가 던전에서 최루액을 눈가에 바르고 바닥을 구르고 있을 무렵. 성신의 총애를 받는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는 최루액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헉, 헉헉.”
“한생아, 다시!”
“더는 못 한다.”
체키빙 공작가의 가전 검술을 검술 스킬로 속이기 위한 훈련은 처음부터 혹독했다.
망나니는 검을 집어 던지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일명 ‘배 째라’ 자세였다.
“나 배 잘 째.”
이해기가 진짜 배를 째기 위해 다가왔다.
“히익, 오지 마라!”
“걱정 마. 살살 째면 안 아플 거야.”
“총 살살 쏘면 안 아프단 소리하고 똑같잖아!”
“이 새끼 아무리 봐도 기억 있는데 없는 척하는 거라니까.”
티격태격 싸우는 동생들을 보고 이귀한이 히죽 웃었다.
역시 싸움은 약한 놈들끼리 싸워야 구경할 맛이 난다. 유치하고 가소로워서 귀여웠다.
한참 시달린 끝에 풀려난 망나니가 이번엔 정말 지쳐 바닥에 드러누웠다.
던전이 있는 숲은 독안개가 없었기에 밤하늘이 보였다.
달이 하나뿐이라 텅 비어 보이는 밤하늘도, 익숙하고 그리운 고향의 밤하늘도 아니었다.
균열의 밤하늘은 그가 아는 두 개의 밤하늘과도 달랐다. 균열의 밤하늘은 매번, 항상 이전과 달랐다.
화르세인지는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균열은 무엇이냐?”
“머리는 안 때렸는데?”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이해기가 다가와 눈동자를 살폈다.
화르세인지는 사기꾼 새끼와 눈 마주치는 취미가 없기 때문에 옆으로 굴러 피했다.
“사람이 만든 성이 있지 않느냐.”
“사람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 비슷한 체형의 지적 생명체일 가능성도 있다.”
“아는 게 없느냐?”
10년도 아니고 무려 20년 후의 미래에서 돌아온 회귀자지만 이해기도 아는 게 없었다.
이해기는 이한생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기에 천문도로 균열 간 연관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포기했다.
균열 속 밤하늘의 별은 자리가 랜덤 배치였기 때문이다.
천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균열도 존재했고 심지어 천문학자들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하루하루 별의 위치가 바뀌는 균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게 궁금하던 시절도 있었지. 어느 순간부터 아무 의미 없어졌지만.”
동생들이 죽기 전까지 이해기는 분명 그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동생이 죽고 복수행을 결정하면서 어딘가 어긋났다.
혹 모른다. 이해기가 속죄행을 마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 세상의 주인공은 못되더라도 주인공의 친구나 동료, 스승쯤 되는 자리를 꿰찰 예정이었을지도.
하지만 그런 미래는 대마왕이 강림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형의 귀환은 시스템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던 게 분명해.’
시스템은 이해기가 회귀하면서 미래의 정보를 일부 입수했다. 그 때문인지 이해기가 동료로 점찍었던 일부 각성자의 각성이 앞당겨졌다.
‘일찍 각성한다고 해서 더 강하게 성장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해기가 울트라 초특급 회귀자 독식 코스를 짰던 것처럼 시스템도 시스템 나름의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시스템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해기가 아는 한 시스템은 현생 인류와 문명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생각해 보면 인류는 균열의 비밀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흥미를 잃었을 뿐이지. 이젠 강력한 변수도 없어졌으니 균열의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말이 길고 중간에 회상하느라 텀도 길었다. 애수에 찬 눈으로 밤하늘을 응시하며 분위기도 잡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모른다.
망나니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르면 짧게 모른다고 말하면 덧나느냐? 혀가 썩어?”
“보배가 모른다고 대답하려면 성의를 보이라고 해서 말이다. 형은 혹시 아는 것 없어?”
시간을 거슬렀으나 결국 우물 안 개구리인 회귀자보단 여러 차원을 여행한 파괴신이 아는 게 더 많을 터.
이해기가 묻자 이귀한은 동생의 궁금증에 답해주기 위해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뿌수면 알 것 같아.”
“좋아, 계속 모르는 대로 살자.”
“동감이니라.”
“솔직히 한생이 너는 균열보단 네 자신에 대해 궁금해해야 할 텐데.”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났다. 심지어 기억까지 일부 잃은 상태. 주위 세계보단 본인 정체성에 의문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이에 성신의 사랑을 받는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가 대답했다.
“내 존재는 두 신께서 증명해 주신다.”
신성력이 없었다면 매 맞는 말이라고 때려줬을 텐데 신성력이 있어서 맞는 말이 되었다.
“열여덟 살 이후로 기억 없다는 건 어떻게 되었어? 그 뒤로 기억나는 건 없어?”
망나니는 침통해했다.
“없다……. 아버지께 혼나고 창고에 갇힌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지만 그 뒤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하지만 가끔 내가 모르는 지식이 떠오른다.”
화르세인지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애타하며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타인의 몸에서 눈을 뜬 후 그는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배운 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좋았다. 신성력을 쓸 수 없어 더욱 엇나가고 주위 평판이 추락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신이 주신 힘을 쓰면 쓸수록 화르세인지는 깨달았다.
‘나는 이전에도 신성력을 쓴 적 있다.’
창고에 갇힌 후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리고 어째서 이한생의 몸에서 깨어났는가.
이해기의 말대로다. 균열보단 이한생과 화르세인지의 비밀을 푸는 게 먼저였다.
“휴식은 여기까지. 일어나라, 한생아.”
체키빙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이씨 가문의 셋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이귀한은 동생이 동생 패는 거 구경하는 맛에 얌전했다. 직접 동생 패는 이해기야 말할 것도 없다.
망나니 홀로 죽을 맛이었다. 훈련의 성과가 있어 검술을 펼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지만 이해기는 만족할 줄 몰랐다.
“검술을 스킬이라고 속이려면 어디서 시작하든 기계처럼 딱딱 움직여야 한다니까! 다시!”
“이젠 정말 못 참겠다! 너 죽고 나 죽자!”
한평생 성질머리 죽이고 산 적 없는 망나니는 검을 들고 회귀자에게 달려들었다.
회귀자는 즉각 건방진 동생을 응징했다.
딱!
목검에 맞은 이한생의 머리에서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처럼 청량했다.
“개길 거면 나만 죽일 각오로 덤벼야지 같이 죽어? 소름 끼치는 소릴.”
“끄으으윽, 머리야.”
바닥에 고꾸라진 이한생이 머리를 쥐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해기는 목검을 휘두르며 재촉했다.
“얼른 일어나.”
“시발, 이게 웬…….”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열까지 센다. 하나, 아홉, 열.”
이한생은 형의 협박에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놀란 눈으로 이귀한을 불렀다.
“큰형, 여기 어디야? 엄마 아빠는? 보배는?”
큰형.
악마 새끼가 아니라 큰형이란 호칭과 부모님 찾는 소리에 이해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지간한 일엔 감흥 없는 이귀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째야?”
“시발 대가리 깨지겠…….”
입 한 번 열어 귀환자와 회귀자의 숨통을 틀어막더니, 이한생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 *
이보배는 급히 균열을 빠져나와 이해기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
“한생인 일단 병원으로 옮겼다. 형이 같이 있어. 나는 널 위해 남았고.”
이해기가 이한생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면서 상황을 전달했다.
이보배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싸맸다. 이한생이든 체키빙 공자님이든 큰오빠와 단둘만 남겨놓는 건 위험했다. 셋 다 상식이 부족했다.
“반대가 낫지 않았을까. 작은오빠가 병원에 가고 큰오빠 남겨두지.”
“만약에 정말 한생이라면 어차피 혼란스러운 거 익숙한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외관상으론 형이 제일 차이가 없고 한생이가 아닌 척해도 형을 잘 따랐으니 형이 있는 게 낫다.”
똑같이 9년이 지났더라도 연령대에 따라 외양 변화에 차이가 크다. 중학생 이보배만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의 가장 이보배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가장 연장자며 실종 당시의 외모 그대로인 이귀한이 이한생의 기억과 가장 비슷한 건 맞다. 하지만 이귀한에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내가 막내 오빠라면 큰오빠 미쳤나 싶을 텐데. 아니면 몰래 카메라라고 생각하거나.”
“형에겐 일단 과거의 형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보배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그게 되겠어?”
“일단 노력해 보겠다 했으니 믿어야지.”
‘그냥 작은오빠가 병원에 따라가지.’
이보배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입을 악물고 참았다.
이해기가 그러지 못한 이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해기에게 이한생은 두 번 죽은 동생이었다.
마음속에서 한 번, 현실에서 한 번.
간신히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에 익숙해졌는데 거기서 다시 이한생이 튀어나왔으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보배는 병원 현관에서 내리고 이해기는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녀는 급히 이한생이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사계절에서 신경 써줬는지 이한생은 VIP용 독실에 입원해 있었다.
“막내 오빠!”
이보배는 병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막내 오빠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깨어났다가 잠든 것인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보배는 다급히 자신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을 찾았다. 간호사, 의사, 이귀한 모두 없고 병실엔 이한생 혼자였다.
이보배가 이귀한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막내 왔어?”
이보배가 찾던 큰오빠 이귀한의 목소리였다. 이보배는 반색하고 몸을 돌렸다가 뒷걸음질 쳤다.
“큰오빠 왜 뒤통수에서 빛이 나?”
이귀한의 얼굴이 극히 평온하고 인자했다. 표정이 평온하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건 차치하고 그의 얼굴 뒤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종교화 속 성인이나 두를 법한 후광이었다.
“둘째가 난 붓다 같았다고 했어. 그래서 참고했지.”
마흔아홉 이해기가 기억하는 큰형은 부처님급으로 위상이 높았나 보다. 그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불상 표정과 후광만 베끼면 무슨 소용인가.
이보배는 급히 고개 저었다.
“막내 오빠 보면 놀랄라. 이미 봤어?”
“아니, 계속 의식이 없었어.”
“어쨌든 막내 오빠 보기 전에 빛 꺼. 계속 그러고 다닌 건 아니지?”
“보는 눈 없을 때만.”
“잘했어.”
이보배는 이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차하자마자 계단으로 빠르게 올라온 이해기가 병실에 당도했다.
동생들이 모이자 이귀한은 그간 있던 일을 전했다.
“셋째 계속 자. 의사가 전부 정상이고 그냥 자는 거래.”
“서, 설마 또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지?”
“보배야, 진정하렴. 한생인 깨어날 거야, 반드시.”
이보배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이해기의 손도 덜덜 떨렸다.
간신히 깨어난 동생이 본인 때문에 다시 쓰러진 건가 싶어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포션은 먹여봤어?”
“먹였다.”
“그런데 왜 안 깨어나는 거야.”
이보배가 초조하게 의사가 오길 기다리는데 이한생의 손가락 끝이 꿈틀거렸다.
이보배라면 놓쳤을 작은 움직임에 이귀한과 이해기는 즉각 반응했다.
“셋째 방금 움직였다!”
“보았니, 보배야? 한생이가 깨어나려다 보다!”
“정말?”
이보배는 종종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막내 오빠가 오만상을 찡그리고 깨어나려 했다.
‘다행이다.’
이보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의자에 앉았다. 정말 이한생의 기억이 돌아온 건지는 완벽히 깨어나야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그때만 잠깐 기억이 돌아온 거고 계속 체키빙 공자님이어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이보배는 얼굴을 지압해 표정 관리에 힘썼다.
그때 이한생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열리고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한생의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여기 봤다, 저리 봤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본인에게 닿을 때마다 삼남매는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삼남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셋째야?”
병실을 훑은 후 더 떨림이 격해진 이한생의 시선이 이귀한에게 고정되었다.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이한생이 입을 열었다.
“큰형?”
“응, 나야.”
“시발, 여기 어디야?”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께서도 깨어나고 뱉은 첫마디가 저거였다.
이한생은 가까이 다가온 이귀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긴 어디고 저 사람들은 누구야? 내가 분명, 분명히……. 돼지는? 돼지 새끼 어디 갔어? 엄마랑 아빠는? 괴물은?”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이한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이보배와 이해기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유는 같았다.
‘막내 오빠다.’
이한생이 깨어났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처럼 이름과 설정 모두 구린 공자님이 아니라 진짜 이한생이.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 뒤 몬스터의 습격에서 이보배를 감싸고 쓰러진 이한생이 깨어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시발! 말을 해!”
양아치가 설명을 요구했다. 이보배는 막내 오빠가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늘 설명을 준비했었다.
하필 깨어난 이가 화르세인지라 제대로 써먹지 못했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이보배가 어금니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으헝헝, 어, 엄마 아빠 돌아가시구우, 막내 오빠는 흑흑, 파알 년, 구 년? 구 년 만에 깨, 크흥! 깨어나따아!”
화르세인지가 깨어났을 땐 하도 황당해서 흘리지 못한 눈물이 이번엔 주룩주룩 흘렀다. 이보배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작은오빠에게 배턴을 넘겼다.
이해기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도 눈물범벅이었다. 화르세인지 때처럼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통곡하지 않은 게 용했다.
“한생아. 정말 한생이니? 형이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
“누구세요! 오지 마세요! 큰형 이 사람들 누구야? 왜 이래?”
이한생은 낯선 어른이 울면서 다가오자 이귀한을 제 앞으로 잡아당겼다.
“귀여운 셋째를 위해 형이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우리 세계랑 다른 세계랑 최소 삼중 추돌 교통사고 나는 바람에 차원 벽이 무너졌어! 다행히 우리 세계 차원 핵은 멀쩡한데 다른 세계 차원 핵이 부서져서 복구하려고 우리 세계 침공 중이야! 너는 교통사고 난 날에 막내 지키다가 쓰러져서 9년 만에 깨어난 거야!”
한 번만 말하겠다는 설명에 듣고 넘겨선 안 될 세계관 주요 설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보배와 이해기가 그게 무슨 소리냐 외치려는데 이귀한이 선수쳤다.
“그러니까 얘가 막내! 얘가 둘째!”
이보배는 이한생이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크고 똘망똘망하게 떴다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크게 코를 푼 뒤 코맹맹이 소리로 나섰다.
“내가 설명할게.”
잠시 뒤. 오랜 기간 준비했으나 1년 동안 까먹는 바람에 약간 중구난방이었던 설명이 끝났다.
설명을 모두 들은 이한생의 얼굴은 여전히 시퍼렜다.
“그러니까, 시발. 엄마랑 아빠 돌아가신 거. 그게 꿈이 아니고, 내가 돼지 새끼 감쌌던 것도.”
“응, 진짜야.”
“그날이 균열의 날인지 뭔지였고 그때부터 9년이 지났다고? 난 9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고요?”
부모님의 사망, 균열의 날, 자고 있는 동안 흘러간 세월.
이런 기본적인 정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거기에 화르세인지 얘기까지 추가하면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자기 몸을 움직였다니 기분 나쁘겠지.’
이보배는 오빠들과 눈빛을 교환해 화르세인지 대목을 감췄다.
“대충 그렇지. 전부는 아닌데 다 알면 헷갈리니까 나머진 천천히 알려줄게.”
“누나가, 돼지라고요?”
이한생이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이보배를 응시했다.
이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배야, 막내 오빠.”
“저 형씨가 작은형이고, 나는, 나는?”
이보배는 가방에서 꺼내는 척 인벤토리에서 손거울을 꺼내 이한생의 얼굴을 비췄다.
이한생은 어른이 된 본인 얼굴이 낯선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볼과 코를 꼬집었다. 그는 거울을 본 뒤에도 불손한 눈빛으로 이귀한을 제외한 가족들을 응시했다.
“돼지랑 작은형은 삭았는데 큰형은 왜 그대로야? 이거 몰래 카메라죠?”
“나는 지금 형태로 재구축해서!”
“형이 하는 말은 흘려 넘겨라. 형은 잠시 다른 차원에 있었는데 차원끼리 시간 흐름이 달라서 그래. 그렇다 치자.”
“스토리 개구려. 판타지랑 SF만 쳐보더니 미쳤냐고요.”
“책과 담쌓은 너보단 낫지. 그럼 난 퇴원 수속하고 오마.”
이해기가 병실을 나가자 이한생이 멍한 눈으로 문을 가리켰다.
“작은형 연기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말투 너무 심한데.”
“작은오빠도 나름 사정이 있어.”
“누나도 돼지라는 거 거짓말이죠? 그 꼴통이 이렇게 고분고분할 리 없는데. 혹시 저 기절한 동안 제 운동화 건드렸으면 죽여 버린다고 전해주실래요?”
이보배는 쓴웃음을 지었다.
급히 짐을 챙기는 와중 남매는 이한생의 짐을 많이 챙기지 못했다. 끽해야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이한생의 한정판 운동화는 침식된 옛집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이거 몰래 카메라죠? 그렇죠? 제 얼굴은 특수 분장이잖아요.”
얼굴을 매만지는 이한생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과거의 이보배라면 울먹이는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보배는 비웃지 않는다. 그 마음 이해한다.
하루아침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집도 잃었다. 막내 오빠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큰오빠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 몬스터와 싸운다. 급조된 대피소에서 열여섯 살 이보배는 매일 이 모든 일이 꿈이길 빌었다.
스물다섯 살 이보배는 이제 현실에 적응했다.
이보배는 막내 오빠를 안쓰러이 여기면서도 진실을 말했다.
“미안, 막내 오빠. 진짜야.”
* * *
“이거 몰래카메라지?”
이한생은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기억과 다른 스카이라인과 사회 분위기, 대형 전광판에 뜬 날짜와 균열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몰래카메라라고 주장했다.
쉬지 않고 ‘몰래카메라’를 반복하던 이한생의 입이 닫힌 건 동네에 들어서고부터였다. 이한생은 차가 낯선 동네에 들어서자 입술을 꼭 붙이고 좌우로 눈동자만 굴렸다. 불안해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정차하자마자 이보배를 밀치고 차에서 구르듯 내렸다.
그는 처음 보는 이층집에 깜짝 놀랐다.
“여기 어디예요? 우리 집은? 왜 우리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와요?”
현재 이한생이 유일하게 믿는 이귀한에게 물었다.
“설마 집 팔았어?”
“팔았나? 구워 먹었나? 기억 안 나!”
“팔진 않았는데 몬스터한테 뺏겼어.”
이귀한 대신 이보배가 대답했다.
이씨 사남매의 집이 있던 동네는 균열에 침식되어 몬스터 소굴이 되어버렸다.
귀환자와 회귀자 조합이라면 몬스터를 박멸하고 집을 되찾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몇 년 뒤로 미뤘다.
이한생은 낯선 집에 선뜻 발을 들이려 하지 않다가 억지로 들어갔다. 거실을 둘러본 그가 말했다.
“좁아. 구려. 더러워. 싼 티 나.”
이보배가 부잣집 고명딸이었듯 이한생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대피소와 월세방, 반지하 전세살이를 겪어보지 못한 이한생 눈에 사남매의 새 보금자리는 한없이 구려 보였다.
“막내 오빠 보기엔 그러려나? 그래도 반지하 살 때보단 나아진 건데.”
“반지하?”
이한생이 생전 처음 듣는 얘기에 질겁했다.
그는 소파를 보고서도 앉지 않고 거실을 서성였다. 이보배는 일단 2층을 가리켰다.
“막내 오빠 방 볼래?”
이한생은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이보배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슬라임 침대를 보고 놀랐다가 누군가 살았던 흔적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데요?”
“음, 사실 막내 오빠는 9년 만에 깨어난 게 아니야. 1년 전쯤 깨어났어.”
“뭐?”
9년 만에 깨어났다는 것도 기가 막힌데 사실은 1년 전에 깨어났었단 이야기에 이한생의 숨이 막혔다.
“근데 기억 상실이었거든.”
“지금 몰래 카메라가 아니라 드라마 찍어요?”
“1년 동안 같이 살다가 최근 머리에 충격을 받고 기억이 돌아온 거야.”
“시발, 컨셉 왜 이따구냐고.”
머리에 충격받았단 소리에 이한생은 공연히 머리를 어루만졌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었지만 괜히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그는 방을 둘러보는 척 자신을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관찰했다.
건방지고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동생은 어디 가고 출퇴근 시간에나 볼 법한 성인이 있었다.
대학생 누나처럼 보였지만 묘하게 어른스럽고 침착한 분위기 때문에 학생보단 사회인으로 보였다.
외모와 분위기만 낯선 게 아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더 낯설었다.
이한생이 질문하면 꼬박꼬박 대답하고 시비 걸어도 화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보배가! 그 개싸가지가!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밥 먹고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