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25
“뭘 하시겠소? 당신에게 바칠 이 힘으로.”
5대 시스템 (5)
***
그린 오션.
엘프의 본거지 초입에 300명의 천사들이 요정의 도움을 받아 도착했다.
성광체를 잃어버린 그들의 표정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흐음.’
요정족의 왕, 크라운은 턱을 괴었다.
‘쓸모가 없군.’
파괴의 대천사 유리엘이 요정에게 부탁을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천사가 인간의 위상으로 추락하다니.
그들의 도움을 받는 건 물 건너갔지만, 다른 의미로 요정에게 호재였다.
‘인간의 왕이 되는 것. 그 길을 가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졌다.’
게다가 유리엘은 여전히 건재하니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큰 힘이 될 터였다.
‘천사를 인질로 삼으면 유리엘도 어쩔 수 없다. 강하게 나가는 게 중요해.’
천사들이 인간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
‘요정의 정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유구한 세월 동안 쌓아 온 정의 결정이기 때문에. 하지만 천사들은 달라. 신의 관점이 달라지면, 그들도 없다.’
물론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유리엘은 땅에 내려온 천사들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크라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한탄스럽겠지.’
기준을 잃어버린 천사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유리엘이 손수 돌봐야 한다.
“요구하신 일은 끝났습니다. 전시 상황이라 요정들을 빼는 데 애를 먹었지요.”
“……고맙군.”
요정의 왕이라고 해도, 예전 같았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천사님들이 인간의 위상으로 떨어졌으니,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뭔가를 먹고, 수면을 취해야 할 것이다.
“돌봐 줄 수 있나?”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조금 문제가…….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엘프의 본거지를 급습할 예정입니다. 첨예한 승부가 예상되는 바, 전력 이탈은 저희들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내가 싸우겠다.”
크라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전장에 나선다면 얼마나 병력을 빼 줄 수 있지? 천사는 도움이 필요하다. 사티엘이 성광체를 회복시킬 때까지 말이야.”
마지막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크라운은 그것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신의 정의가 흔들린 것이다. 설령 대천사라고 해도 이미 손을 떠난 상황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답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유리엘 님의 무력이야 요정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요. 다만 전시를 고려하여 빼 드릴 수 있는 병력은 300명 정도일 것 같습니다.”
천사 1명당 요정 1명의 수발.
결코 충분하지는 않지만, 지금 천사들에게는 1명의 요정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유리엘 님의 합류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봐라, 천사님들을 막사로 모셔라.”
크라운의 지시에 요정족의 중진이 부하들을 이끌고 천사들을 인도했다.
“저희를 따라오세요.”
요정족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줄을 지어 가는 천사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빛을…… 빛을 조금 더 켜 줄 수 있니? 너무 어두워서 볼 수가 없구나.”
시공간을 초월해서 ‘굽어보기’를 하던 그들에게 인간의 시야는 맹인과 같았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빛을 밝게 켤 수가 없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 그래.”
또 다른 천사가 말했다.
“배가 이상하다.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지는구나. 회복 능력을 가진 요정을 불러 다오.”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건 배가 고프다고 하는 거예요. 열매를 드릴 테니 이거라도 드세요.”
요정들이 먹는 작은 열매를 건네받은 천사는 멀뚱하니 말을 기다렸다.
요정이 답답한 듯 입을 가리켰다.
“입에 넣고 삼키세요.”
“아, 그렇지. 미안. 해 보는 건 처음이라.”
어색한 동작으로 열매를 먹는 천사들의 모습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환장하겠네, 진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상관을 수발하느니 차라리 엘프랑 싸우는 게 나을 듯했다.
갑자기 요정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 자! 여기는 적들이 염탐하기 쉬운 곳이에요. 그러니 엎드려서 가는 게 좋겠어요.”
“아, 그래?”
어쩌면 이것은 꽤나 부끄러운 행동이 아닐까 하고, 천사들은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의 기준이 사라진 지금, 선택할 용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까, 그럼?”
천사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엎드리기 시작하자 오히려 황당한 건 요정이었다.
‘진짜로 하네?’
마치 한평생 교도관의 지시에 따르던 죄수가 갑자기 세상으로 나간 것처럼.
‘스스로 결정하는 공포를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차라리 내 기준을…….’
멀어지는 천사들을 보며 요정이 씩 웃었다.
‘호호! 멋진데? 항상 나를 하찮게 보던 천사들이 전부 내 말에 복종하고 있잖아?’
요정 4계급, 진이 날아왔다.
“뭐 하는 거냐?”
“진 님!”
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미친 거냐? 천사님들이 성광체를 잃었어도 유리엘 님은 아직 건재하다. 감당할 일만 해라.”
“죄송해요. 정말로 할 줄 몰랐어요. 저는 그냥……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나서.”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을 짓궂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의 없는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뜻은 알겠지만 자중해. 천사님들이 저렇게 됐다면, 그다음은 우리 차례다. 크라운 님께서 이 전쟁을 하려는 이유를 망각해서는 안 돼.”
“네. 죄송합니다.”
진의 표정에서 노기가 빠져나가자 요정이 천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무섭네요. 기준이 없다는 것. 언젠가는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걸까요?”
“그렇겠지. 크라운 님이 인간이 되려는 이유란다. 애초부터 인간의 삶에는 기준이라는 게 없거든. 끝없이 사고하고 스스로 선택한다. 틀린 판단을 내린 자는 도태되고, 옳은 판단을 내린 자들만이 생존하는 냉혹한 환경.”
“…….”
요정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전투에 요정의 미래가 걸려 있어. 다른 아이들에게도 심한 장난은 치지 말라고 일러라. 만일의 하나, 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네, 진 님.”
두 요정이 천사들을 따라가자, 유리엘은 그제야 ‘굽어보기’를 멈췄다.
천사에게 장난을 치는 요정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현실인가? 아니, 어쩌면 이 또한 정해진 운명이다.’
신의 시대에서 천사의 시대로, 천사의 시대에서 요정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인간.’
세계는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이미르의 심층 1.5층.
루버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 시로네는 그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어쩌면 그날은 몇 시간 전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시로네를 살피는 루버의 등 뒤로 가올드 일행이 서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거짓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틀린 그림 찾기 같은 것이죠.”
루버가 말했다.
“하나의 그림만 보면 완벽하지만 2개를 비교하니 이상해지는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그림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인이 물었다.
“현실이라는 그림이 진짜가 아닐까요?”
“네, 인간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그것도 현실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이곳이 완벽하기 때문이에요. 이 세계를 이루는 5대 시스템은 어느 하나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루버가 몸을 돌렸다.
“현실의 인간을 기준으로, 논리적인 이성은 드리모로, 비논리적인 감성은 이면 세계로 빠집니다. 이를 이상과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드리모는 그 둘을 결합하여 필요한 정보는 현실로, 불필요한 정보는 디 어비스로 보내죠. 결국 현실이라는 것도 특정 논리가 적용되는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드리모는 그 정보를 매개하는 버퍼링 시스템이라 할 수 있죠.”
세인이 말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군요.”
“그렇죠. 언더 코더라고 해도 현실보다 느릴 뿐, 시간은 흐릅니다. 하지만 드리모는 달라요. 정보가 처리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겁니다.”
강난이 물었다.
“이면 세계의 정보는 어떻게 드리모로 오죠?”
“언더 코더죠. 렘 영역은 반수면, 반각성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접속하는 방법도 두 가지죠. 수면에 더 가까운가, 각성에 더 가까운가.”
사실 둘은 한 끗 차이다.
“전자는 잠에 빠져 각성하는 거고, 후자는 오히려 깬 상태에서 잠에 빠지는 겁니다. 마족들도 잠을 자지만, 드리모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해요. 그들은 이상이 약하기 때문이죠. 반면에 후자의 언더 코더는 상당히 활발합니다. 막대한 양의 히든 코드가 올라오죠.”
“정보의 성질이 다르니 통로도 다른 거군요.”
“네. 사실 언더 코더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에요. 관리자도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죠. 논리적 언더 코더가 인간의 전유물이라면, 비논리적 언더 코더는 대부분 마족이 만듭니다. 히든 코드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루버는 다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현실이 전부가 아니에요. 5대 시스템 전부를 건 싸움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 봤자, 이미르의 화신에게 죽을 뿐입니다. 오대성께서 지금이라도 생의 의지를 되살린다면 모르지만…….”
시로네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실에서…… 정말 힘든 삶을 살았죠. 어떤 생각을 깊게 파고들 의지가 없는 겁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잃어버린 거죠. 이 꿈에서만이라도 편하게 지내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
일행 모두 딱히 불만은 없지만 여전히 현실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미련은 점차 증폭되어 조만간 그들을 미치게 만들 터였다.
아리우스를 끌어안은 미로가 말했다.
“저 오빠, 포기한 게 아니에요.”
“응?”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요. 정말로 포기했다면, 바다를 보고 있지도 않을 거예요.”
세인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너는…… 저 오빠가 뭘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흐음.”
생각에 잠긴 미로가 말했다.
“꿈.”
“하하! 멋진 말이구나. 하지만 이곳이 꿈이란다. 사실 아빠도 못 믿겠지만.”
“꿈을 기다리는 거예요.”
세인의 표정이 비로소 진지해졌다.
“왜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저 오빠는 텅 비어 버린 거예요. 다시 채우려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끌어와야 하죠.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꿈밖에 없어요.”
“…….”
일행은 멍해졌다.
그들 모두 아홉 살의 미로가 아닌 현실에서의 미로를 떠올리고 있었다.
‘꿈과 현실. 어떤 게 진짜 그림이든 통찰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가?’
세인이 미로를 쓰다듬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그래, 지금 당장은 꿈을 꿀 수밖에 없겠지.”
루버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꿈. 꿈이라……. 설마?’
시로네에게는 자신의 꿈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 깃들어 있다.
강난이 물었다.
“무슨 꿈을 기다리는 거죠? 애인을 만나는 꿈? 자신이 원했던 세상에 대한 꿈?”
루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렇게 전승되는 것이라면.
“한 떨기 꽃의 꿈일지도 모르지요.”
마검 아르망.
가장 거대한 꿈을 꾸었던 한 인간과, 그를 사랑한 화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스름 (1)
‘아직도 멀었나?’
은하와 은하 사이에 걸쳐 있는 거대한 크기로, 이미르는 생각에 잠겼다.
너무나 거대해서 빛보다 멀고,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광속을 넘어서지만…….
중력은 없다.
‘그게 문제야.’
목과 사지가 찢기는 것을 막기 위해 거인화의 능력을 끝까지 개방한 결과.
‘물질이라 부를 수 있는 최소 입자조차 끊어졌어. 이 상태로 힘을 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다.
100억 명에 달하는 가이아인의 울티마가 그를 이미르로 정의하는 한.
“크으으으!”
오직 신호로 이루어진 육체의 특정 부위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같잖은 행성 따위가…….’
힘을 정의하는 신호가 전신에 30퍼센트 이상 퍼졌으나 탈출은 요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