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96
“화신 구속술.”
최후의 전쟁 이후, 시로네가 가상의 적을 상정하며 갈고닦은 능력일 터였다.
“크, 크아! 크아아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제르비스가 힘겹게 고개를 쳐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 크하하! 고작 이거냐? 겨우 이게 야훼의 힘이라고? 너 따위가 나를……!”
“엘리키아.”
제르비스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화신에 박힌 대못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못을 박은 광천사가 뒤로 물러서더니 빛의 해머를 양손으로 붙잡는 광경을.
그리고 실제 사람처럼 무릎을 튕기더니 거대한 포물선을 따라 해머를 휘둘렀다.
“어, 어어.”
빛의 연기가 만드는 장관은 너무 거대해서 느려 보였고, 그래서 더욱 아찔했다.
세인트 크로스-이중 관철.
해머가 대못에 내리꽂히는 순간 마치 불꽃이 튀듯 빛의 광채가 폭발했다.
제르비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으아아아!”
문어의 화신이 갈기갈기 흩어지고, 남은 파편조차 빛무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
암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좁은 공간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쿨럭!”
한 웅큼의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
전투 시간 : 3시간 17분
제르비스 준동경계중사망 : 33회
여태까지의 사건이 점으로 빨려들면서 모두의 기억으로 전환되었다.
위저드는 주변을 살폈다.
진형이 크게 바뀌지 않은 가운데 제르비스가 보였다.
“끄, 끄으으.”
뜯겨 나간 팔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어딘가 모르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크악! 크악!”
연신 헛기침을 하던 그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땅에 무릎을 꿇었다.
위저드는 확신했다.
‘들어갔다.’
시로네의 세인트 크로스가 본체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강했다는 뜻이다.
“됐어요, 스승님. 이제…….”
위저드는 말을 멈췄다.
제르비스의 상태와 무관하게 시로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세인트 크로스에 엘리키아를 더했으니 제르비스가 타격을 입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극히 찰나에 준동경계가 깨졌다는 것.
그리고 시로네는 거의 본능적으로 양자 전송을 시전하여 이탈하려고 했었다.
비록 무력화되었지만, 당시에 받은 느낌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종류였다.
‘설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 싸우고 있는 자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끝났어!”
금화륜의 펜트하우스에서 작업을 끝낸 카니스가 서류 뭉치를 들고 나왔다.
페르미와 세리엘이 다가갔다.
“전부?”
“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사안이야. 빨리 시로네에게 알려야 해! 지금 가자.”
“침착해. 일단 보여 줘.”
서류를 넘긴 카니스는 페르미가 문서를 읽는 동안 설명을 시작했다.
“착각이었어. 바깥 세계와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도, 5대 시스템 또한 바깥 세계에서 만든 거야.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복구하게 되어 있다고.”
페르미가 서류를 읽으며 물었다.
“자연발생적이라는 거지? 예를 들어 부처가 태어나거나, 새로운 사탄이 등장하거나.”
“그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마지막 페이지를 봐. 바깥 세계가 노리는 건…….”
페르미는 페이지를 넘겼다.
-독립 우주 관리 지침
1. 다중 우주는 공겁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며, 어떤 우주든 인류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보하면 새로운 가상현실을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음.
2. 각 우주는 앙케 라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되고, 최종적으로 다중 우주 연산장치 ‘신’이 총괄함.
3. 앙케 라 프로그램이 파괴될 경우 최적화 시스템에 의해 가장 적합한 변수를 적용, 복구됨.
4. 바깥 세계와 연결이 끊겼을 시 앙케 라는 링크 프로그램을 가동, 연산장치 ‘신’을 통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채널을 활성화시킴.
“이런 씨!”
세리엘이 고개를 틀었다.
“이게 뭐야? 그럼 몇 번을 파괴해도 앙케 라가 다시 구축된다는 거잖아!”
“그렇군.”
페르미는 이해했다.
“가장 적합한 인간에게 앙케 라 프로그램을 적용시켜 그의 기준으로 세계를 정의하게 만든다. 그렇게 관철시킨 다음 공겁으로 파고드는 거야.”
정신적 영생의 메커니즘이었다.
“그, 그렇다는 것은?”
“그래.”
페르미는 서류를 내렸다.
“제르비스는…… 앙케 라 프로그램이야.”
즉, 최초의 준동자였다.
전면전 (4)
제르비스가 바깥 세계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세리엘이 말했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잖아?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토르미아로 가자.”
“잠깐.”
페르미는 턱을 괴었다.
‘앙케 라 프로그램이 재생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공겁 시스템을 만든다면…….’
근본적으로 착각을 한 게 아닐까?
“마르샤 팀을 불러.”
카니스가 물었다.
“갑자기 왜? 아포칼립스 쪽은 끝났어. 아우터 리포트는 전부 해독했잖아.”
“확인할 게 있어. 아니, 내가 직접 간다. 토르미아로 가는 건 그다음이야.”
페르미는 뉴럴링크를 발동했다.
***
코트리아의 시골 마을.
에이미와 성음은 메이델을 만났다.
제르비스의 병원 기록에 대해 묻자 놀랍게도, 그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사칼 원장님이 그러셨다고요?”
“네. 메이델 씨가 구스타프의 수도에 갔을 때 정신병원에 들른 적이 있으시다고.”
메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당시 제르비스가 무서워서 보육 교사들이 전부 떠났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중 1명이고요.”
에이미가 물었다.
“하지만 제르비스를 많이 아끼셨다고 하던데요? 마지막까지 돌보아 주셨다고.”
“어…….”
그랬던가?
“아.”
메이델은 당시를 떠올렸다.
“다른 아이보다 신경 써서 챙기기는 했어요. 제르비스는 환각 증세를 겪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다들 정신 질환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교사들 모두 악몽을 꾸기 시작했어요. 제르비스가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요. 그때부터는 저도 멀리했던 것 같아요.”
에이미와 성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결국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지만 메이델과 원장의 말이 다르다는 건 이상했다.
“저기, 혹시 그러면…….”
“죄송해요.”
메이델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를 떠올리자 끔찍한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아는 건 전부 다 말했잖아요. 제르비스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도 믿기지 않아요. 그만 돌아가 주세요.”
메이델은 겁에 질려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에이미는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때 성음이 손목을 붙잡더니 그만 나가자는 신호를 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메이델은 인사조차 받을 정신이 아닌 듯했다.
손으로 책상을 짚은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집을 나선 에이미가 물었다.
“좀 이상하지?”
“그래.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 속은 느낌이 드는구나.”
“나도 그래. 어째서 원장과 말이 다른 거지?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그런 기억은 쉽게 바뀌지 않잖아. 결국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성음의 걸음이 멈췄다.
“그렇구나.”
“응?”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바깥 세계에서 제르비스를 지키는 거라면, 애초에 우리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몰라야 돼.”
에이미도 깨달았다.
“히든 코드.”
“그래. 히든 코드가 적용됐다면 우리는 어떤 모순도 느낄 수 없을 거다. 애초에 가장 합리적인 설정으로 이 세계에 적용됐기 때문이야. 그런데 원장과 메이델의 말이 맞지 않아. 이유는 아마도…….”
“제르비스에 대해서만큼은 적용을 할 수 없었던 거구나, 히든 코드를.”
“그래. 제르비스가 정신병원에 갇힌 것을 사실로 하고 싶었으면 그런 히든 코드를 적용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제르비스의 정보를 조작하면 그들이 이 세계에 들어온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손톱을 물었다.
“거기서 충돌이 생긴 거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했지? 정말로 제르비스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굳이 우리를 뺑뺑이 돌릴…….”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이사칼 원장이야! 그녀가 바깥 세계에서 접속한 자였어!”
성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뢰가 수집한 정보는 애초에 히든 코드가 적용되어 있었던 거다. 이사칼이라는 여자는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어. 그런데도 거짓말을 한 이유는 그녀가 제르비스의 본체를 확보했기 때문이겠지.”
에이미는 고개를 들었다. 미소를 짓는 성음을 보자 그녀도 심장이 뛰었다.
‘찾았다.’
하이 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두 여자가 동시에 몸을 돌렸다.
‘제르비스는 그곳에 있다.’
처음 버려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
세인트 크로스에 당한 제르비스는 더 이상 화신술을 발동할 수 없었다.
‘화신봉인술.’
최후의 전쟁 이후 야훼가 악의 화신에 대비하여 갈고닦은 능력일 터였다.
“역시 야훼야.”
준동경계가 순간 찢어질 정도의 위력이었으나 제르비스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나는 신이다.’
살의의 충동의 끝에서, 그는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야훼를 부정한다.”
제르비스는 몸을 구부리며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내가 관철시킨다.”
하늘에 구름의 소용돌이가 생겼다. 그것을 연기처럼 퍼트리며 거대한 해골이 등장했다.
“저, 저건…….”
시민들은 경악했다.
형태는 달라도 10년 전 트라우마를 일으키게 하는 특유의 느낌만은 선명했다.
“부처.”
이마에 뿔이 달렸고, 주변 머리에 은사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깨에 세 쌍의 팔이 달렸는데 손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합장을 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