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8
트라우마. 기억보다 감정이 먼저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5년 전 뒷골목에서 만났던 여자아이였다.
마법을 배우다(2)
‘어, 어떻게 이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얼어붙은 시로네는 에이미가 친구와 함께 걸어오자 고개를 틀었다.
‘제발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
마주쳐서 기분 좋을 일은 절대로 없었기에 시로네는 간절히 기도했다.
다행히 두 여학생은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듯했으나, 그것은 시로네가 여자의 시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에이미, 에이미! 방금 지나친 남자애 봤어? 새로 들어온 앤가? 입학생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 혹시 전학생?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수다쟁이 친구의 말을 귀담아들으면서도 에이미는 선뜻 대꾸를 하지 못했다. 시로네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분명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지?”
“뭐야, 너 혹시 쟤한테 관심 있는 거야? 여태까지 남자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더니.”
“아니야. 정말로 어디서 봤단 말이야.”
“거짓말 치지 마. 요것이 솔직하지 못하게. 너 반했지? 반한 거지?”
“아이, 진짜 아니라니까.”
집요한 추궁에 에이미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속도를 맞추자 아예 뛰기 시작했다.
“빨리 말해! 솔직히 말하기 전까지는 안 놔줄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친구를 피해 도망치는 에이미를 주위의 남학생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다.
최고의 인기인이지만 선후배는 물론 동급생의 고백마저 칼같이 차단하는 모범생.
그런 그녀가 한때 뒷골목을 주름잡던 악동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로네뿐이었다.
***
마법학교 제3시험장.
넓은 강당에는 거울처럼 매끈한 바닥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의미를 알기 어려웠고, 유일하게 기재가 있는 강당의 북쪽에는 5명의 교사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로네가 도착했을 때는 6명의 입학생이 테스트를 치르고 있었고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구나. 마침 잘됐다. 저 애들이 어떻게 하는지 잘 보거라.”
입학생치고는 나이가 많았기에 아이들이 쳐다보았으나 시로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알페아스가 바닥의 문자를 설명했다.
“스피릿 존에 들어가면 이 문자들이 지금과 다른 의미로 느껴질 것이다.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스피릿 존의 크기나 강도, 유연성, 성향 등이 분석되는 것이지. 교사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대충 감을 잡은 시로네는 아이들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테스트를 지켜보았다.
“그래, 케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니?”
“물건을 공중에 띄울 수 있어요.”
심사관들은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배우려고 들어온 학교에서 허풍을 떨어 봤자 결국에는 자신만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바로 스피릿 존에 들어가 볼까?”
“네.”
케미라는 아이가 스피릿 존에 들어가자 맨 우측에 앉은 젊은 교사가 물었다. 금발을 올백으로 넘긴, 말끔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가장 멀리 보이는 숫자가 몇이니?”
“6요.”
“호오? 6이라.”
남자는 감탄하며 서류에 숫자를 적었다.
스피릿 존이 직경 6미터의 구체에 다다른다는 뜻이었다.
입학생 실력에서 이 정도 크기라면 최소 클래스 나인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다음 질문자는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교사였다.
까까머리에 이마에 잔주름이 가득한 그는 습관적으로 눈을 치켜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올빼미 같았다.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색감이 무엇이니?”
“음…… 붉은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아요.”
“붉은색이라. 발산형이군. 나이에 비해 스피릿 존이 넓은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교사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교사도 전담 분야의 질문을 던졌다.
거대한 탑이 오른쪽에 서 있는가, 왼쪽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주로 사용하는 뇌가 우반구인지 좌반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었고, 주변에 흔들리는 공이 몇 개냐는 질문은 존의 밀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온도가 어떤가요? 더운 편인가요, 아니면 추운 편인가요?”
마지막으로 질문한 교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눈썹이 사납게 가늘고 눈초리가 길어서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분명 아름다운 외모였다.
“음…… 조금 더운 것 같아요. 땀도 나고요.”
더위를 느낀다면 스피릿 존이 가변적이란 뜻이었다. 응용력이 좋은 대신 내구력은 떨어지기에 딱히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네. 수고했어요, 케미.”
남은 학생들도 차례대로 테스트를 받았다.
올해 수준이 꽤나 높은 모양인지 교사들은 만족했고, 어떤 아이가 12라는 숫자를 불렀을 때는 알페아스조차 감탄했다.
그렇게 모든 학생이 테스트를 끝마친 가운데 비로소 시로네의 차례가 되었다.
알페아스는 시로네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며 교사에게 데리고 갔다.
“자, 부담 갖지 말고 솜씨를 발휘해 보렴.”
“네, 해 볼게요.”
시로네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0에서 시작한 그였기에 기초부터 공부하고 싶은 마음가짐이었다.
키가 훌쩍 큰 소년이 서자 심사관들 또한 시로네를 유심히 관찰했다.
교장이 미리 기별한 특별 전형이었다.
이력서에는 오젠트 가문의 손님이라는 독특한 신분이 기재되어 있고, 특이 사항에는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쓰여 있었다.
가끔 이런 아이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 우연치 않게 능력을 개방하는 아이가.
하지만 이곳은 천재들의 요람이라 불리는 마법학교.
바깥에서 아무리 천재라고 떠받들어도 여기만 오면 열등생이 되고 마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교사들도 딱히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측에 앉은 금발 올백의 남자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화염 마법사 사드, 그의 목소리가 다정할 때는 오직 여자 앞에서뿐이었다.
“아리안 시로네. 열일곱 살이군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뇨. 마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뭐, 딱히 배우지 않아도 몇 가지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사드의 말투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피릿 존은 머릿속의 지식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통로와 같은 역할.
따라서 어릴 때부터 다양한 지식을 공부하는 귀족은 혼자서도 마법을 터득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전문적인 지식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시로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단점을 알고 있기에 다른 걸 제쳐 두고 지식의 척추에 목을 맨 것이지만, 어찌 됐든 현재까지는 마법으로 응용할 지식이 얕은 게 사실이었다.
“좋아요, 일단 한번 봅시다. 저기 원에 서서 스피릿 존을 해 보세요. 아, 스피릿 존은 할 수 있겠죠?”
그것조차 안 되는데 특별 전형으로 입학했다면 교장의 도덕성을 의심해야 한다.
다행히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원으로 향했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 해 보겠습니다.”
시로네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자아가 옅어지면서 공감각이 펼쳐졌다.
‘우와.’
스피릿 존에 들어간 시로네는 수많은 정보에 압도당했다.
현실에 있는 대부분의 정보가 차단되고, 마치 다른 차원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거였구나.’
공감각을 통해 세계를 느끼자 바닥에 새겨진 문자가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사드가 물었다.
“가장 멀리 보이는 숫자가 몇이죠?”
주위에 공전하는 수많은 숫자들 중 시로네는 가장 멀리 있는 것에 주목했다.
시각이 아닌 공감각을 통하는 것이므로 시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시로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로네, 가장 멀리 보이는 숫자가 몇인가요?”
사드가 재촉해도 입이 열리지 않자 교사들은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의 실력을 봤으니 위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페아스가 인자하게 타일렀다.
“시로네,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순위를 정하는 게 아니라 너에게 적합한 교육 방식을 찾으려는 거니까.”
시로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숫자가 보이긴 하는데, 숫자가 너무 길어서 전부 읽을 수가 없어요.”
사드가 되물었다.
“읽을 수가 없다고? 안 보인다는 말인가요?”
“아뇨. 보이긴 하는데 너무 길어요. 지금도 계속 길어지고 있는데요.”
사드는 짜증이 났다.
스피릿 존의 크기를 계산하는 마법 문자는 오직 정수만을 출력한다.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운 나머지 중언부언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러면 대충 앞에 있는 숫자만 말해 보세요.”
“음, 3.14요.”
“응?”
교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로네가 보고 있는 숫자는 원주율이었다. 정수로 나누어지지 않는 무리수이므로 무한히 길어지는 것이다.
맨 왼편에 앉아 있는 여자가 안경을 올리며 쏘아붙였다.
“시로네, 미안하지만 우리가 지정한 숫자에 3.14는 없어요. 정말 확실한가요?”
빙결 마법의 시이나. 마법적 성향답게 냉정한 성격이라 사드와 앙숙을 이루는 교사였다.
시로네는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음, 그런가요? 하지만 전 그렇게 보이는데요.”
‘진짜구나…….’
시이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바닥에 새겨진 마법 문자에 원주율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딱 하나 이 숫자가 뜨게 되는 상황이 있다.
스피릿 존의 영역이 계측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 버렸을 경우였다.
그렇다는 것은 시로네가 펼친 스피릿 존의 직경이 최소 30미터 이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신입생을 평가하는 제3시험장의 계측 정밀도는 상당히 낮게 설정되어 있는 편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강도 높은 풍경을 보여 준다거나 뜨거운 고열, 북극의 한기를 경험시킬 경우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환으로 스피릿 존의 직경을 측정하는 범위도 30미터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늦게 입학을 했어도 이 한계치를 넘어선 사람은 손에 꼽았다.
직경 30미터 이상이라면 최소 클래스 파이브 이상이었고, 단지 스피릿 존의 수준에만 국한한다면 비공인 10급 마법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사드의 옆에 앉은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색감은 무엇입니까?”
“음, 푸른색요. 온통 파랗게 물들어 있어요.”
노인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고, 교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란색 계통이라면 수렴형이다. 존의 크기보다는 내구력에 장점이 있는 계열.’
그런데도 스피릿 존의 직경이 30미터가 넘어간다면 결코 성장이 더딘 게 아니었다.
알페아스 또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클럼프가 호언장담을 한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현직 교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학생을 접한 그는 오히려 비판적이 되었다.
적당한 재능이라면 칭찬을 해 줄 생각이었으나 시로네는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마법이라는 영역에는 발조차 대지 못한 반쪽짜리 능력이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너무 치켜세우다가는 오히려 재능을 망치리라.
알페아스가 복잡한 생각에 여념이 없을 무렵 시로네는 계속 질문에 답했다.
뇌의 발달은 좌우를 동시에 사용하는 양반구형.
이 또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정말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다음 질문에서 나왔다.
“주변에 떠 있는 공의 개수가 몇 개죠?”
공감각을 통하기에 일일이 셀 필요는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피부에 닿으면 즉각 느껴지듯 공의 개수를 한꺼번에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시로네가 입을 열었다.
“867개요.”
“867…….”
질문을 던진 교사의 표정이 멍해지고, 여태까지 냉랭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던 시이나 또한 처음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자세를 고쳤다.
스피릿 존의 밀도란 정신력이 얼마나 균등하게 퍼져 있는가를 측정하는 범주였다.
867개의 공을 감각했다는 건 시로네의 정신력이 86.7퍼센트의 밀도로 스피릿 존을 채우고 있음을 뜻했다.
‘이제 열일곱 살인데?’
밀도가 균등하다는 건 정신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기에 마법의 성공 확률도 높을 터였다.
마법을 배우다(3)
“시로네, 지금 얼마나 추운가요?”
시이나는 이미 시로네가 차가운 쪽일 것이라 상정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상당히 추운데요. 차가울 정도예요.”
어차피 3시험장에서는 차가운 느낌 이상으로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이나가 서류에 총평을 적기 시작했다.
요지는 이랬다.
수렴형이고 방어적이며 내구도가 뛰어나다. 다만 그럼에도, 스피릿 존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크다.
시이나는 이런 경우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4년이 넘게 교사직을 수행했지만 정신적 성향을 넘어서는 스피릿 존을 가진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는 시로네의 선택과 집중이 작용한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지식이 얕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책을 들이팠듯이, 마법을 배울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오로지 스피릿 존만을 갈고닦았던 것이 이런 탁월한 베이스를 갖추게 만든 것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스피릿 존에서 나오셔도 됩니다. 클래스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해야 하니 잠시 밖에서 대기해 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시로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시험장의 문이 닫히자 여태까지 조용하던 교사들이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상당히 특이한 학생이로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