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63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정관의 목이 잘려 나갔다.
고개를 들자 물구나무서듯 하늘에 떠 있는 에크서가 두 자루의 검을 엑스 자처럼 휘두른 상태였다.
가볍게 착지한 그가 원래부터 땅을 걷고 있었던 듯 천장의 끝으로 걸어가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것으로 군락의 집정관은 결정되었다. 이견이 있을 시는 필히 나를 찾도록 해라.”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함성을 내질렀다.
태양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에, 그들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시로네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태양처럼 떠받들던 자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린 사실로 집정관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일단은 받아들이자. 이곳에서 생존하려면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돼.’
신전으로 돌아온 시로네는 권좌에 앉았다.
수호자 네 사람이 짝을 지어 권좌의 좌우를 호위하고, 신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집정관의 역할을 일러 주었다.
어차피 어려운 공무도 아니었다.
잡다한 일은 노예들이 하고, 시로네는 그저 빛의 마법으로 군락을 밝히기만 하면 되었다.
반면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권력.
번식의 능력밖에 없는 여왕개미를 위해 모든 개미들이 목숨을 바치듯, 군락에 빛이 들어오는 한 시로네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일단 무언가를 도모할 힘은 얻었다. 하지만 평생을 형광등으로 살아갈 수는 없어. 내가 살아남으려면.’
인류의 문명을 재건해야 한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멸망한 세계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생각이었다.
시로네가 신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베베토라고 하옵니다. 신의 언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요.”
베베토는 수호자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설명했다.
‘흐음, 돌연변이라. 생명나무에서…….’
신관을 시작으로 수호자들이 1명씩 자신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거구의 남자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타르강이라고 합니다. 기폭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수호자입니다.”
“기폭 능력?”
소매를 걷은 타르강은 직접 보여 주었다.
주먹을 불끈 쥐자 근육이 암석처럼 변하면서 작은 분화구처럼 생긴 구멍들이 열렸다.
“흐읍!”
펑 하고 가스가 폭발하면서 팔 주위로 불꽃이 토해졌다.
“집정관님 앞이라 약하게 시범을 보였지만, 지하인에게는 이 정도가 아니죠. 전투라면 맡겨 주십시오.”
수호자들의 역량을 어느 정도 확인한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에크서라고 했나?”
시로네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네. 하명하실 일이라도?”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내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집정관을 암살하듯 베어 버린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오나 군락에 2개의 태양은…….”
“그건 알고 있어.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앞에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대 세력과의 충돌에서 협상의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
군락의 시스템에 협상 따위는 없다.
하지만 집정관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에크서는 반론의 여지 없이 수긍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기에 시로네도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단 밤이 깊었으니 돌아가서 쉬어라. 내일 아침부터 정식으로 공무를 집행하겠다.”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4명의 수호자들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베베토도 코드를 연결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홀로 권좌에 앉은 시로네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질 거야. 목적을 이루려면 통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어. 마음을 단단히 먹자.’
태양의 아이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집정관의 자리지만, 시로네에게는 오직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뿐이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시설, 수십 개의 모니터에 동시에 불이 켜졌다.
뮤커스의 원류인 이곳에는 동물은커녕 날벌레조차 얼씬할 수 없으나 모니터 사이를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는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에너지매스 게이지 확인. 보유량 428퍼센트.”
중저음의 목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함 속에서 잘 어울렸다.
음성을 인식한 컴퓨터는 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프로그램 라인을 끌어 올렸다.
“정화 시스템 가동. 코드 넘버 387.”
탁 하고 엔터를 치자 수천 줄의 프로그램 언어가 끝없이 올라갔다.
팬이 돌아가는 소음이 방을 가득 채우고,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모니터가 번쩍번쩍 빛났다.
“완료. 프로그램 종료.”
수십 대의 모니터가 동시에 꺼지면서 실루엣 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10분 후. 도시의 사방 곳곳에서 수백 발에 이르는 발사체가 제트를 뿜어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 * *
쏴아아아아아!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아침 일찍부터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깔린 짙은 먹구름이 태양을 가렸으나 군락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비, 비다! 드디어 비가 내린다!”
“오오! 위대한 라여! 우리에게 축복을!”
태양의 아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생명의 물을 입안에 한가득 담았고, 노예들은 거대한 물통을 속속들이 바깥으로 옮기고 있었다.
“흠흠. 흠흠흠.”
요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60일 만에 내리는 비도 그렇지만, 오늘부터 새로운 집정관을 받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의미 불명의 허밍을 하며 몸을 단장한 그녀가 은경으로 변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데 문이 쿵쿵 울렸다.
“어이, 뭐 해? 집정관님 명령 못 들었어?”
“알았어. 지금 나가.”
문밖에는 수호자 3명이 모두 모여 있었다.
눈가에 색을 칠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요의 모습에 타르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광합성을 오래 했냐? 꼴이 왜 그래?”
“신경 꺼. 빨리 가자. 이러다 아침 집회에 늦겠어.”
“네가 제일 늦었잖아.”
방을 나서는 요의 등에 대고 타르강이 투덜거렸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신관 베베토를 발견하고 카로프가 말을 걸었다.
“비가 오는군요.”
“허허, 라께서도 새로운 집정관님을 환영하시는 것이지. 그나저나, 이제 올라오는 길인가?”
“네. 급하게 명을 받고.”
베베토가 입맛을 다셨다.
“나도 그런 참일세. 군락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아침마다 집회를 열겠다고 하시더군. 어제 에크서에게 하신 말씀도 그렇고, 이번 집정관님은 확실히 특이한 구석이 있어.”
어느 누구도 시로네의 출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카로프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늦었군요. 평균적으로 30일에 한 번은 비가 내렸는데 근래 들어 점차 늦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포칼립스의 세계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하늘 물고기만 봐도 유추할 수 있었기에 비가 내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생명나무에서 인간이 열리듯 이 또한 라의 기적으로 치부해 버릴 따름이었다.
“태양의 수호자가 집정관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신전으로 들어간 수호자들이 권좌 앞에 부복했다.
여태까지 집정관의 시중을 들던 노예들은 보이지 않았고, 시로네 홀로 근엄한 눈빛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루 만에 사람이 변한 것 같구나. 고대의 시대에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을 터.”
신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로네가 말했다.
“오늘부터 나는 군락을 지휘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통치에 임하겠다. 그러니 수호자들은 매일 아침 집회에 참석하여 결과를 보고하도록.”
카로프가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오나 군락은 평화롭습니다. 또한 위대한 라의 화신께서 굳이 수고를 감수하실 필요는…….”
시로네가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 도시에 군락이 몇 개나 되지?”
수호자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신관이 나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3개 정도로 추정됩니다.”
“추정? 같은 도시에 살면서 군락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는 건가?”
“태양의 아이들은 오직 라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쪽에도 라의 화신이 있는 한, 우리가 간섭할 이유는 없지요.”
‘개미 사회와 비슷하구나.’
같은 종의 개미라도 결국 구심점이 되는 건 종이 아닌 여왕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접선한다. 수호자들은 가장 가까운 군락을 찾아 이쪽의 집정관이 협상을 원한다고 전해라.”
타르강이 고개를 들었다.
“명에 거역할 생각은 결단코 없습니다만…… 왜 그래야 하죠?”
통제가 전부인 아포칼립스에서 태양과 태양이 만나는 건 분명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시로네는 이 세계를 변화시킬 생각이었다.
“동맹을 제안할 것이다. 언제까지 군락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어. 바깥에는 빛을 낼 수 있는 장치들이 있다. 하지만 당장 시도하기에는 위험 요소들이 너무 많아. 나는 도시의 군락들과 손을 잡고 그 일을 해낼 생각이다.”
에크서가 말했다.
“오직 집정관님만이 저희의 빛입니다. 다른 빛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태양의 아이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고대인은?
세뇌를 당한 자들을 포함해, 지금도 인공동면 장치에서 잠들어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결코 행복하지 못할 터였다.
“내 명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실수를 깨달은 수호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종족의 미래인 태양 앞에서 개인적인 의문은 사치였다.
“죄송합니다. 하오면 누구를 보낼까요? 지시를 내려 주시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해 내겠습니다.”
“군락 밖은 위험하니 최대한 많이 보내는 게 좋겠지. 수호자 3명이 협상을 맡고, 남은 1명은 나를 안내해라.”
첫 번째 지시는 합당하나 두 번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부터 나는 도시를 조사한다. 낮에는 태양이 떠 있으니 군락을 나가도 상관없겠지.”
신관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집정관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군락은…… 윽!”
부릅뜬 시로네의 눈을 본 베베토가 움찔했다.
그가 한 가지 망각한 사실은, 이번 집정관은 빛을 다루면서 전투에 탁월한 능력마저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수호자들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는 분이시니. 이를 어쩐다.’
수호자들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전투력이 아무리 강해도 군락의 최우선 보호 대상인 집정관이 밖으로 나가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제가 집정관님을 안내하겠습니다!”
망설이는 분위기를 깨듯 요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맡겨 주십시오! 지하인이든 뮤커스든, 어떤 상황에서도 집정관님을 지켜 내겠습니다!”
“흐음.”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시로네를 바라보며 요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문제 (3)
* * *
폐허의 도로에 두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포칼립스에 이제 막 도착한 십로회 서열 9위 박녀와, 십로회 서열 7위 슈라였다.
가슴이 반쯤 드러난 넝마에 맨발, 머리마저 터번으로 대충 묶은 박녀와 달리 슈라는 진녹색 드레스에 구두까지 신은 단정한 차림새였다.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쪽은 박녀일 것이나, 실상은 사도 반야인 슈라야말로 거짓의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자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군. 시로네는 어디 있지?”
차분한 박녀의 목소리는 강풍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내 코더를 의심하는 거야?”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박녀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슈라는 바닥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시선을 내렸다.
박녀의 다리 사이로 소변이 흘러내리는 걸 보자 그녀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냄새나게. 도대체 씻기는 하는 거야?”
“비가 오면. 모든 게 정화되지.”
슈라의 시선이 박녀가 가리키는 도시를 향했다.
마치 자로 잰 듯 도심 지역의 하늘에 걸레 같은 먹구름이 깔려 있고 그것을 쥐어짜는 듯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연의 생리에 따르는 것은 멀리서 보기에 아름다우나 옆에서 동행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고역이었다.
“어쨌거나 시로네는 여기에 있어. 언어는 코딩 안 해 줘도 되지?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은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해.”
박녀만의 깨달음일 테지만, 그녀와 성향이 정반대인 슈라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래. 야수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대체 어쩌다가 너랑 한 팀이 되었는지 모르겠어.”
시로네를 십로회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거수투표 결과는 5 대 5로 동률이었다.
찬성표를 던진 자들은 시로네의 강력한 화신술을 이야기했고 반대표를 던진 자들은 반야보다는 영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럼에도 십로회에서 간부를 2명이나 파견시킨 이유는 시로네의 정보를 복구하기 위해 미로가 나섰다는 첩보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고대인의 정신 엘리시온이 아포칼립스에서 재현될 수 있다면 십로회에는 상당한 득이 되고, 그렇기에 파견된 자가 슈라와 박녀였다.
‘아드리아스 미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슈라가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내가 파견된 이유는 미로를 봉쇄하기 위해서야. 만약 그녀와 붙는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른 쪽은 감당이 안 돼. 그러니 발목 잡을 생각은 하지 마.”
“미로는 감당이 되고?”
박녀가 툭 내던진 말에 묘한 침묵이 흐르고, 한참이 지난 후에 슈라가 입을 열었다.
“더러운 원숭이 같은 게 나대고 있어.”
“…….”
똑같은 침묵이었으나 주위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일렁거렸다.
박녀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고, 박도의 시커먼 잔상이 풍경을 가르며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