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80
“굳이 고통을 줄 필요는 없잖아요.”
“고통이라…….”
무심하게 손끝을 내려다보던 가올드가 강난을 돌아보았다.
“통각이 더 올라갔어.”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이유는,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살아…….”
강난이 다시 울먹거렸으나 가올드는 그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고통은 삶의 유일한 증거지. 이 세상에 나만큼 강렬하게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강난이 말을 꺼내려는 그때, 망자의 비명 소리가 피라미드의 최하층까지 도달했다.
“……줄루가 끝낸 모양이군.”
가올드는 소리만 듣고도 깨달았고, 잠시 후에 줄루가 방으로 들어왔다.
“마족은 전멸했다요.”
강난이 가올드가 깨어난 것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이미 줄루는 피라미드의 진동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덕분에. 이번에도 신세를 졌군.”
“지옥을 헤매는 것. 너에게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을 테지.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행을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은, 과연 나네일까, 시로네일까?
“딱히 별건 없어.”
가올드는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더 강해졌을 뿐이야.”
고개를 끄덕인 줄루가 의자를 끌어와 가올드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렇다면 그 강함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정해야 할 것이다요.”
줄루는 가올드가 깊은 잠에 빠지고 난 뒤부터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읊조렸다.
딱히 반응이 없는 가올드였으나 시온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을 때는 눈썹이 꿈틀했다.
“카오스다요.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서로의 신념만이 충돌할 뿐이다요.”
“나네가 옳아.”
가올드의 말에 강난의 눈이 흔들렸다.
“1명도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이 세계의 진정한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지.”
억울할 사람도, 억울함을 느낄 감정도 없다.
“그럼 나네에게 가면 된다요.”
우주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단연 가올드이기에 나네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미로 씨는 나네에게 맞서고 있어요.”
가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집착.’
그저 눈을 감아 버리면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옥의 불길 속을 끝없이 걸어왔다.
‘나네는 구원이다.’
결국 모두가 소멸하는 공空이야말로 가올드가 집착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아…….”
천방지축에다가 오만하고, 남자의 진심을 똥같이 아는 망아지 같은 여자.
“흐흐. 흐흐흐흐.”
생각할수록 한심해서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진짜 미쳐 버리겠네.”
결정을 내린 가올드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나네라는 놈을 밟아 버리면 되는 거냐?”
줄루와 강난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번복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올드의 마음 또한 우주보다 컸다.
성전 (2)
***
성전.
세계를 지배하는 12명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사뭇 기괴했다.
이들의 말 한마디에 세계가 요동치고, 이 자리에서 합의된 안건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터였다.
성전 개최지인 코트리아 공화국의 바사리 통령이 의장석에 앉아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이군왕이 청자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칠왕성이 삼황계의 눈치를 보는 쪽이었다.
발키리의 수장인 우오린이 서류철을 덮었다.
“그럼 마정탄 보급 비율은 이렇게 정하도록 하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였으나 숨을 고르는 척하면서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일단 10분 정도 쉴까요?”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으나 벌써 7시간째 회담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지.’
우오린이 말을 멈춘 이유는 단 하나, 거대한 원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구스타프 하비츠 17세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거야?’
성전이 열린 이후로 하비츠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고,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우오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휴식을 선언한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삐딱하게 앉아 의자를 끄덕거리는 동작 또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도발.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분석하고 있다.
털끝 하나까지 눈에 담아 두려는 시선을 접하게 되면 그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하기 싫어졌다.
“허허,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군요.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중부 대륙을 대표하는 자이브의 국왕 메이어가 하비츠에게 악수를 청했다.
“…….”
하지만 하비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의자를 까닥거리는 행동만을 이어 갈 뿐이었다.
“흠, 흠.”
메이어의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뒤편에 도열한 자이브 근위대 ‘신장’의 병사들이 일제히 왼편에 장착한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허허, 거 그만두게. 이런 자리에서…….”
감히 누가 자이브의 왕을 모멸할까마는, 이 자리는 그런 자들로 넘치는 성전이었다.
‘건방진 자식. 얼마 전만 해도 같은 직위였거늘.’
하비츠 16세가 서거하기 전에는 하비츠 17세도 제국의 일부분을 다스리던 왕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나네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문 왕국의 지배자인 문룡이 묻자 진천의 황제 진강도 관심을 드러냈다.
“자이브 왕국에서 졸업했죠.”
메이어가 난감한 표정을 연기했다.
“어떤 인물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유학생이었고, 이제는 인류의 적이 되어 버렸지요.”
사전에 정보를 차단하는 듯한 태도에 칠왕성 수장들의 눈매가 곱지 않게 변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자 우오린이 처음으로 하비츠와 눈을 마주쳤다.
“한 가지 묻고 싶군요.”
여전히 반응이 없을 것 같던 태도의 하비츠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지났지?”
하비츠의 등 뒤로 4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7시간 48분입니다?”
오히려 되묻는 듯한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차림새는 광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
거추장스럽게 화려한 드레스에 얼굴은 하얗게 분을 칠했고 눈꺼풀을 잘라 버린 탓에 언제나 눈이 커다랬다.
검은색으로 속눈썹을 크게 그렸는데 아래로 세 줄, 위로 세 줄이 그어져 있었다.
구스타프 4기예四技藝, 전투 인형 나타샤.
성전의 또 다른 볼거리라면 각국의 왕을 지키는 근위대의 개성적인 군기.
하지만 하비츠는 근위대를 대동하지 않고 오직 4명의 장수만을 이끌고 성전에 출입했다.
‘저들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내색은 안 해도 신경을 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비로소 하비츠의 뒤편으로 넘어갔다.
‘욕망왕이 거느리는 네 가지 기예.’
비록 하비츠는 정상이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온 자들 중에는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4기예는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재로, 하나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자들이었다.
“7시간 48분이라…….”
나직하게 중얼거린 하비츠가 마침내 의자를 바로 세우고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더니, 의외로 참을성이 없군, 카샨의 여황이라는 계집애는.”
풍장 100명의 몸체가 부르르 진동하는 것만으로 성전에 강풍이 몰아쳤다.
“멈춰라.”
공기의 파동이 순식간에 그쳤다.
“딱히 참을 만한 것도 아닌데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우오린은 정석대로 대응해 보았다.
“남자의 유전자를 받아서 산다지?”
성전의 대표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내 거를 받는 건 어때?”
간도의 눈동자에 벼락이 내리쳤으나 우오린은 이 정도의 일로 흔들리지 않았다.
“선대께서도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있죠.”
누구도 몰랐던 시크리트 파일이었다.
“하지만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거절했습니다. 하물며 선대보다 떨어지는 당신이야…….”
하비츠가 하품을 했다.
“재밌겠어. 어떤 놈이 태어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 딸이 다시 내 딸을 낳으면 어떻게 되지?”
‘듣고 있지 않다. 트라우마도 없는가?’
일부러 아버지를 들먹여 열등감을 자극해 봤지만 그런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광기에 가까운 자신감. 나르시시즘의 극치로군.’
선대인 하비츠 16세는 욕망에 심취하기는 했어도 사리 분별은 하는 인물이었다.
‘시대가 만든 괴물.’
인류의 역사를 함께 살아온 우오린은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잔인한 존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하비츠는 그들 모두를 합쳐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딸을 3명 낳고, 그 3명이 또 3명을 낳고……. 아니, 아들을 이용해서 딸들을…….”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하비츠를 무시한 채 우오린은 회의를 진행시켰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안건에 들어가죠. 발키리 운용 및, 제단 방어에 대한 각국의 예산편성입니다.”
성전이라고 해도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건 철칙.
따라서 지금처럼 민감한 문제는 모두의 피로가 쌓이는 시기에 꺼내는 게 정석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기 위해 대표들이 눈에 힘을 주는 그때, 하비츠가 소리쳤다.
“바로 그거야!”
심각했던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양식을 하는 거지!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하루에 1명씩 낳게 하면 돼!”
“이 자식아!”
간도가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진천의 황제 진강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쿠우우우우우우웅!
대리석으로 깎은 무거운 테이블이 무섭게 흔들리자 진천 제국을 대표하는 5명의 대장군, 오룡장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
성음 또한 나네와 맞서 싸운 공을 인정받아 청룡부대의 대장군으로 성전에 들어온 상태였다.
“딱히 천하의 지배자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네만…….”
하비츠가 우오린 외에 누군가를 돌아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장내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썩은 주둥아리는 좀 닥치고 있는 게 어떻소? 아니면 입에서 풍기는 그 변 냄새를 없애고 오든지.”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말인즉슨…… 똥을 싸 달라는 건가, 당신의 입에?”
오룡장의 대장 여달이 무거운 몸을 앞으로 내밀자 황룡부대의 대원들이 철갑을 들썩이며 전진했다.
말리는 순간 기세에서 밀리기에 진강은 여달에게 멈추라 하지 않았다.
“철부지 왕이여, 아비 잃은 징징거림을 받아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부터 말을 잘 골라야 할 것이야.”
“고르지 않겠다면?”
“삼황계의 한자리는, 우리 백성이 키우는 개 한 마리에게 줘 버리도록 하지.”
하비츠가 시선을 피하며 코를 훌쩍였다.
“개? 개라고?”
그리고 다시 진강을 가리켰다.
“너?”
나타샤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아하하하!”
여달이 육체에 힘을 밀어 넣고, 성음이 그보다 빠르게 에테르 파동을 시전해 움직임을 막았다.
‘아가씨, 어째서?’
여달의 눈에 입술을 깨무는 성음이 보였다.
‘하비츠와 우오린의 싸움이다. 괜히 진천에 화살이 겨누어지면 전부 덮어쓰게 되는 거야.’
삼황계라는 3개의 기둥, 먼저 움직이는 쪽이 협공을 당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진천의 대표시여, 차마 여자의 입으로는 할 수 없는 얘기를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오린은 진강에게 경의를 표하며 동맹 구도를 걸었고 본격적으로 하비츠를 도발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이곳은 세계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 끼어들 수준이 안 되거든 화장실에서 밑이라도 닦고 오시는 게 어떤지.”
“무엄한 것!”
하비츠의 뒤편에 앉아 있던 중머리의 노인이 테이블로 뛰어오르더니 상의를 활짝 찢었다.
“구스타프~!”
시커먼 젖꼭지에 앙상한 갈비뼈가 전부 드러났다.
“하비츠!”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구부린 그가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며 우오린을 노려보았다.
구스타프 4기예, 내정왕 스모도.
“같잖아서 지켜봤더니 감히 구스타프 제국의 황제에게 말을 그따위로 해? 한판 붙어? 어? 당장 쓸어 줄까?”
‘이 무슨 망나니 놀음인가?’
각국의 관료 대신이 혀를 찼으나 원탁에 있는 수장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내정왕 스모도. 유일하게 하비츠를 보좌할 수 있는 인물. 따라서 하비츠가 욕망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