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8
카니스는 포기 각서의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사키리가 다시 서류를 가져와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서류철에 넣었다.
“자유의 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끝난 마당이니 하는 얘기지만 잘 선택한 겁니다. 변호사를 고용했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테니까요.”
변호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했을까?
아니, 사키리의 말이 옳다.
마법협회가 호락호락한 곳이었다면 처음부터 각서를 들이밀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제 우리는 뭘 하면 되지?”
“글쎄요. 일단 나가면 되겠죠. 자유의 몸이니까요.”
땡전 한 푼 없는 자유는 결국 거지라는 뜻이지만 사키리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서류만 챙겼다.
아린이 주저하며 물었다.
“저기, 출소 절차 같은 건 어디서…….”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태도에 카니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처음부터 마법협회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48억을 환수하기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2시간 정도를 할애한 것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 더 비참한 건,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협회의 강력함이었다.
대륙의 국가들과 당당히 일전을 벌인 아케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
이제는 자명해졌다.
자신은 전투 마법사. 그리고 싸우는 방법을 알았으니 주저할 것이 없었다.
“이봐, 당신.”
사키리가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습니까?”
“당신도 마법사지?”
“흐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마법협회의 직원들은 모두 마법사니까요.”
“몇 급이지?”
“공인 5급입니다만?”
카니스는 기준을 잡았다.
마법협회의 조사관은 공인 5급이고, 저런 남자였다.
“나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거라고.”
“그렇군요. 그래야죠. 그럼 이만.”
“반드시 당신보다 높게 올라갈 거야. 언젠가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게 될 거야.”
문고리를 돌리던 사키리가 동작을 멈추더니 카니스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 참 열심히 해야겠군요. 이 자리도 경쟁률이 보통 치열한 게 아니라서.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온다면…….”
사키리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말했다.
“그때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사관의 이례적인 태도에도 카니스는 감흥이 없었다.
사키리가 얼마나 감정이 메말라 있고 철두철미한 실리주의자인지 깨달았을 뿐이다.
사키리가 나가자 비로소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깨 위에 놓였던 철근 하나가 내려간 기분이었다.
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카니스, 잘 선택한 거야.”
48억 골드를 안고 감옥에서 평생을 썩느니 자유가 더 좋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강한 사람이 많아.”
카니스의 입꼬리도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지금, 그의 심장은 아케인을 만났을 때처럼 강렬하게 뛰고 있었다.
“아린, 강해지자.”
“……응.”
아린은 사키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카니스는 언젠가 협회에 굴하지 않는 마법사가 될 것이다.
이곳이 자신들의 끝은 아니기에, 그녀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조사실을 나선 사키리는 곧장 감찰관실로 향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일처리는 쉽게 끝난 셈이었다. 아케인이 사망한 게 컸다.
법적인 충돌도 피했고, 알페아스가 여죄를 인정한 것도 주효했다.
감찰관실은 대리석으로 바닥을 깐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감찰3부의 전설인, 철의 감찰관이라 불리는 남자가 뒷짐을 지고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감찰관님, 아케인 사건에 대한 결재 서류입니다.”
“책상에 두게.”
사키리는 서류철을 올려 두었다.
여느 때라면 이대로 돌아가겠지만 이번만큼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돌아섰다.
“알페아스 건은 이대로 괜찮습니까?”
“왜? 상부에서 말이 나올 것 같은가?”
“자격정지 6개월이면 약한 편이기는 하죠. 하지만 아케인이 사망했고 정상참작이 가능한 부분도 있으니, 48억 골드를 보석으로 환산한다면 납득할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물어보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낸 것 같아 사키리는 입맛을 다셨으나 기왕 말이 나왔으니 번복하는 것도 악수였다.
“속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서요.”
감찰관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키리를 돌아보았다.
“빚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는 내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결이나 할 위인으로 보이는가?”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그만 나가 보게.”
사키리는 쩔쩔매며 방을 나섰다.
범죄자에게는 악명 높은 조사관이지만 협회 안에서는 그도 상관의 눈치를 보는 마법사일 뿐이었다.
문이 닫히자 감찰관은 서류의 문장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펜을 들었다.
“…….”
오래전의 기억이 스쳤다.
백발의 노인이 된 지금도 알페아스의 집에서 얻어맞은 턱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쳇, 선물을 가져갔어야 했다니까.”
알페아스의 삶이 꼬인 데에는 그의 책임도 있을 테지만, 그것과 별개로 졌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어떠한가?
알페아스의 광양자설은 진화와 혁신을 통해 세계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크크.”
당시의 알페아스가 얼마나 천재였는지 이제는 그도 인정을 해야 할 때였다.
“늦게나마 주는 축하 선물일세. 골드서클은 자네의 것이 맞았어.”
감찰관은 날카로운 필체로 서명했다.
아르디아노 사로프.
학기 말의 성적표(1)
마법학교 학생들이 가장 긴장하는 학기 말이 돌아왔다.
반년 동안의 성과가 한 장의 종이에 함축된다. 진급과 낙제를 정하는 건 단두대처럼 예리한 커트라인이었다.
알페아스는 마법협회로부터 6개월 동안 교사 자격정지 판결을 받았다.
법적 효력이 발동하는 건 다음 학기부터였고, 현재는 교사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콜리가 임시로 교장 대행을 하고 있었다.
화단의 잡초를 정리하던 알페아스는 제자들이 걸어오자 허리를 펴고 미소 지었다.
시로네, 이루키, 네이드.
이제는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고뭉치들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장래가 기대되었다.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허허, 교장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했잖느냐. 지금은 그냥 소일거리나 하는 할아버지란다.”
“에이, 한번 교장 선생님은 영원한 교장 선생님이죠. 안 그러냐, 얘들아?”
알페아스는 그저 웃고 말았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제자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과분하다는 생각에 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 너희들은 어떠냐? 휴교가 끝나서 죽을 맛이지?”
네이드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미칠 거 같아요. 남은 기간 동안 전 과목 8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껄껄! 이번 기회에 진급이라도 해 보게?”
클래스 파이브에서 클래스 포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은 전 과목 80점 이상을 받는 것.
평균 80점이 아니라는 점에서 난이도는 최상급이었다.
학기 말의 성적표(2)
“당연하죠. 마법학교 학생 중에서 진급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렇구나. 뭐, 열심히 해 보려무나.”
격려의 말을 기대한 것과 달리 알페아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교육관은 확고했다.
학생은 경주마가 아니다. 초원에 풀어 두면 알아서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시로네가 소매를 걷고 잡초 뽑기를 도우려고 했으나 알페아스는 한사코 거절했다.
“허허, 늙은이의 유일한 낙을 뺏길 수야 없지. 잡초는 내가 뽑을 테니 너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렴.”
이것을 핑계로 조금이나마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네이드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숙소로 향하는 시로네 일행의 얼굴에는 근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케인이 습격한 이후 학교는 여전히 어수선했고, 예전처럼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네이드가 울화통을 터트렸다.
“아, 미치겠다.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 공부! 도저히 집중이 안 돼.”
“원래 크게 한번 터지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이지. 발표회 끝나고도 그랬잖아.”
이루키의 말에 시로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낫잖아. 나는 80점 이상으로 올릴 과목이 너희들보다 2배는 많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
“내가 유리한 건 수학뿐이지. 인문 계열은 빵점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네이드가 제일 유리해.”
“무슨 소리야? 나는 딱히 강한 과목이 없잖아. 시로네나 너는 실기에선 무조건 톱을 노릴 건데, 나는 그것도 안 되니까 제일 불리하다고.”
클래스 파이브의 실기 과목은 실전 마법보다 스피릿 존의 운용을 주로 평가한다. 따라서 이모탈 펑션의 시로네와 서번트 신드롬의 이루키라면 어떤 실기든 상위권이 가능할 테지만, 네이드는 다른 학생들과 같은 평범한 스피릿 존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까 점점 골치만 아파지네. 우리 그냥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터 할까?”
네이드의 제안에 두 사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공붓벌레인 시로네마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아하니 의욕이 꺾이긴 한 모양이었다.
“어? 얘들아, 저기…….”
시로네가 가리킨 중앙 공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 네이드와 이루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왜 쟤들이 여기 있어?”
카니스와 아린이 교정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로네 일행과 눈이 마주친 그들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카니스가 손을 들며 알은체를 했다.
“여어, 수업이 끝난 건가? 시설이나 환경은 괜찮은데, 애들을 너무 살살 다루네.”
“너,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네이드가 차가운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물론 두 사람이 무죄로 풀려났다는 사실은 사드에게 들었지만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끝나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학교에 있단 말인가?
시로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학교에 무슨 볼일이라도?”
시로네 앞에서는 카니스도 눈빛이 달랐다.
학교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라면 알페아스도, 교사도 아닌 시로네였다.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인물. 그를 넘지 못한다면 아무리 강해져 봤자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잘 들어. 너랑 다시 맞붙게 된다면 결과는 저번하고 정반대가 될 거야.”
시로네가 말하기도 전에 네이드가 끼어들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넌 시로네를 이기려면 10년은 멀었어.”
“너야말로 나를 상대하려면 10년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 자식이…….”
시로네가 생사를 헤매고 있을 당시의 감정이 살아난 네이드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두 번은 안 된다고 생각한 이루키가 끼어들었다.
“그만해. 다른 건 됐고,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왜 오기는? 앞으로 지낼 곳이라 둘러보고 있는 거지.”
“뭐, 뭐어?”
시로네 일행의 눈이 똥그래졌다.
“말 그대로야. 마법학교를 인정하기는 싫지만, 성공하려면 이 루트가 가장 빠를 것 같아서.”
네이드가 쏘아붙였다.
“마법학교를 우습게 여겨도 유분수지! 누가 너 같은 애를 받아 주기나 한대?”
카니스가 손가락을 들고 지적했다.
“선배님.”
“뭐?”
“선배님이라고 불러. 알아봤더니 너희 클래스 파이브던데. 나는 클래스 포니까.”
“…….”
시로네 일행은 벙 쪘다.
입학과 동시에 클래스 포라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심사 교사들의 깐깐함을 봤을 때 드문 경우인 건 사실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우리는 대마법사 아케인의 제자들이야. 너희들이 배우고 있는 마법의 기초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고.”
10년 이상을 아케인에게 사사했으니 빈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분명 시로네에게 패했기에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쳇! 어차피 다음 학기부터 다닐 거 아냐? 그때쯤이면 우리도 클래스 포로 진급할 거라고!”
“그래? 너희 의외로 성적이 형편없던데? 솔직히 실망했어. 이런 덜떨어진 놈들에게 고전을 했다니.”
카니스가 입학한 뒤에 가장 먼저 조사한 건 시로네 일행의 성적과 교우 관계였다.
교내 선두를 다투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클래스 파이브, 그것도 중위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다만 교우 관계를 조사할 때는 의외였다.
성적은 별로지만 고급반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아래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