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66
00066 [열두 번째 역] 다시 한 걸음 =========================================================================
아무것도 않고 숨만 쉬어도 시간이 가나보다.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수치스러운 밑바닥까지 다 까발린 날 이후, 리건은 거의 매일을 지난 시간을 되짚는 데에 소요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엉망이 되었나. 일이 년은 고사하고 오륙년은 훌쩍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다보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까지 이르렀다.
파르네세 공작저로 따지러 갔을 때였나. 잉그리드는 그 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했었다.
‘모두 그냥 행복하게 살면 안 되나.’ 자신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박애주의적인 의도로 한 말일 리가 없었다. 그는 이런 형편없는 인간이 되기 전부터도 성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더듬고, 더듬고, 더듬어 리건은 어렴풋이 그 시절을 떠올려냈다.
1왕자 레이먼드와 2왕자 엘디스는 나이 차이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차기 왕태자는 당연히 1왕자 레이먼드였지만, 2왕자 엘디스를 거론하는 이도 많았다. 2왕자 엘디스가 될성부른 떡잎이라는 걸 적자 다음 장남을 최고라 치는 귀족 새끼들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정치적으로 1왕자 레이먼드를 지지하는 세력과 척을 졌던 자들이 2왕자 엘디스에게 붙었을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도 하게 되었지만.
어찌되었건, 리건은 1왕자 레이먼드의 입지를 위해 2왕자인 엘디스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어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엘디스는 리건에게 참 좋은 형이었다. 엘디스는 1왕자인 레이먼드와도 사이가 좋았다.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 자꾸만 왈가왈부를 해대니 성가셨다.
‘그 사람들은 대체 왜 이간질을 못 해대서 안달이야?’
‘어쩔 수 없지. 너라도 아니라고 내 편 들고 다녀. 너만 믿는다.’
‘형은 진짜, 속도 편하다. 아니, 정말 그냥 모두 다 행복하게 살면 안 되나.’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때였다. 그 무렵의, 그 순간의, 그 어딘가에.
그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딛고 어딘가에서 잉그리드가 그와 엘디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돌연 그 날이 선명히 기억이 났다.
‘모두 다 행복한 세상이라니, 역시, 리건 너는 망상이 대단해서 멋진 동생이야.’
‘놀리지 마, 형.’
‘진심으로 네가 자랑스러워서 하는 말이야. 심성 곱기도 하지.’
하지만 선명함은 죽은 자를 돌이켜 세우지는 못했다. 엘디스의 목소리는 이내 먼지만도 못하게 흩어진다.
리건은 다른 형제들과 지금도 썩 잘 지내지만, 요헨보다도 다른 왕자 왕녀들보다도 엘디스를 더 좋아했다. 엘디스와 함께 어울리면 그 역시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엘디스의 칭찬이 내심 듣기 좋아서, 어린 마음에 어른스러운 체도 했었다. 다른 왕실의 형제들이 엘디스에게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할까봐 무서워 더 조심히 행동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리건은 꽤 행동거지에 과함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엘디스의 죽음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형을 변명거리 삼는 짓거리를 할 만큼 떨어지지는 않았다. 자신에게는 원래 그런 경박스러운 천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자인 그에게 적자들에 버금가는 기품이 있을 리 없는 게 당연하니까. 다만, 엘디스의 죽음이 준 영향이 있다면 리건이 조언을 담아 들을 만한 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왜 이렇게 살게 되었나. 에스펜서라는 이름이 의미가 없기에, 형제들과 부모와 떨어져 살아 자유로웠기에, 시간을 보낼 것이 필요했기에, 우연히 술이나 약을 접하게 되어서,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이유를 대자면 수백, 수천 가지도 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는 답을 알고 있다.
스스로 무책임하게 살길 택한 것뿐이다.
엘디스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잉그리드는 엘디스의 품에서 사랑받으며 2왕자비로써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세베루스의 왕비자리도 마다한 여자이니 2왕자비라는 자리가 별 매력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엘디스로부터 애지중지 아낌 받았을 것이란 것만큼은 안다.
속을 찢어내는 것 같은 자괴감이 울분처럼 밀려올라왔다. 리건은 뜨거워지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러냈다.
삶의 마지막, 그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엘디스는 그가 아껴주었던 이복동생이 잉그리드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점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껴주었던 이복동생이 온갖 방법으로 잉그리드를 상처 입히는 개새끼 같은 짓을 하리라는 것도.
‘너는 정말 멋진 동생이야, 네가 자랑스럽다.’
왜 자꾸 잉그리드를 맴돌며 상처주지 못해 안달 난 새끼처럼 구는지, 리건 스스로도 힘이 부쳤다. 정말로 모르겠다. 잉그리드가 싫지 않고, 잉그리드와 사이좋게 지내도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불현 듯 자꾸만 잉그리드에게 화가 나고 상처를 주고 싶어진다. 자신의 밑바닥을 들추고 긁어 마주보게 하는 잉그리드를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건 왜냐고.
자식새끼를 보기는 무서운데, 또 혼자 있는 것은 싫어해서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새끼라고 결국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이보다 더 깊다란 바닥이 있을까. 왜 잉그리드와 함께 있으면 그 구덩이만 자꾸 깊어질까.
그런 씹소리를 지껄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워 담고 싶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깨끗하게 돌아나갔어야 했다. 뭣 때문에 구구절절 늘어놓았나. 스스로가 다 망쳤다. 이런 미친 새끼의 애라도 배고 싶다 말한 여자에게 제가 뭐라 했나.
못 괴롭혀서 안달인 것처럼 온갖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면서, 애도 갖지 않을 테지만 이혼도 않겠다 했다. 그리 말하면서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다 떠들어댔다. 정말 이 새끼 대체 왜 이러나 싶을 것이다.
잉그리드를 그냥 안고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충동을 참기가 어려웠다. 벌써 닷새 째 이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잉그리드와 더 멀어지게 될 거란 생각이 들면,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다시 자괴. 반복이다.
리건은 잉그리드가 좋아하는 책들을 꽂아 두었다는 책장 앞에 섰다. 그의 눈에는 그 책이 그 책이고, 이 책이 이 책이었다.
[발렌틴의 노인]도둑놈처럼 손을 뻗어 책을 뽑아냈다. 지난 번 봤던 것이다. 몇 페이지 펼치자마자 지루해져 잠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걸 알았다. 책은 그의 분야가 아니었다. 흥밋거리로 여겨지는 주간지조차도 직접 읽기 싫어한다.
그런데 이 책을 왜 들췄나. 와이더스 와일더라는 새끼가 짜증이 나서다. 잉그리드가 좋아하는 사람의 책이라고 해서였다.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잉그리드는 이미 그의 부인이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다.
이렇게 노력할 필요가.
‘……’
고소가 샜다. 한 짓거리라고는 병신새끼처럼 군것밖에 없으면서 노력이라니. 힌 분 일 초마다 불안이 찾아온다. 아무리 시가를 피우고, 술을 마셔도 좀체 해갈되지 않는 불길이었다. 그리 닳고 닳아서, 뭔가를 더 생각할 여념도 남지 않은 것은 꽉 닫아둔 틈 새로 가는 석양빛이 비칠 때였다.
누가 떠민 것처럼 발이 움직였다. 무작정 잉그리드를 만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리건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달리듯 걸어가다가. 우뚝 멈추었다. 지금 자신이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차림, 피로에 절어있는 얼굴, 무엇하나 말끔하지도 못한데 그 추한 꼴을 보이고 또 추한 꼴로 찾아가서 뭘 하겠다고.
왜 내가 이래야 해. 왜 내가.
소파로 되돌아가 앉았다. 머리를 뜯듯 쥐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술잔을 그대로 털어 넘기려다, 내려놓았다. 이걸 마셔서 제 속에 붙은 불이 덜어진다면 단숨에 들이킬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 제 망가진 술버릇과 약버릇들을 생각하면 더 괴로워지기만 할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는 자문은 두 번 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미쳐있는 것은 자신이지, 그녀가 자신에게 미쳐있는 게 아니었다. 미치도록 자존심이 상하고, 욕지거리가 터져 나와도. 잉그리드를 아쉬워하고 있는 게 자신이니 별 도리가 없는 거다. 너 싫다고, 역겹다고, 온갖 얘기를 해놓고 그 여자에게 끌려버린 거다. 씨발, 씨발…….
그 때였다.
끼익.
그가 열지 않은 문이 열렸다. 가슴에 걸어둔 망가진 빗장이 덜컹 떨렸다.
*
리건은 그대로 굳어졌다. 카펫을 딛고 들어오는 걸음 소리가 도도했다. 발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다. 잉그리드는 그렇게 줄기차게 그를 따라다녔다. 결혼하기 한참 전부터, 그가 싫다싫다 발악을 해댈 때부터 발소리를 기억하게 했다. 걸음소리는 길게 멈추었다가, 다시 짤게 따각따각 이어졌다. 잉그리드는 그가 앉은 소파를 지나쳐 커튼으로 가리워진 벽을 등진 책상으로 걸어갔다.
“……으음, 환기를 좀 해야겠는데요?”
다정한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리건의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한 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온 마음이 주저앉는 기분이 들었다.
촤르륵- 커튼을 걷는 소리가 났다. 주홍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격자무늬의 석양빛은 그의 무릎까지 드리워졌다. 눈이 부셨다. 리건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장이라도 잉그리드를 잡아채러 달려갈 것만 같았다.
또 미친놈처럼, 또.
저와 한 방에 있는 미친새끼가 무섭다더니, 행동은 전연 아니다. 잉그리드는 리건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책상 주위를 뱅뱅 돌았다. 가볍게 뒷짐을 진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석구석을 살핀다.
고개를 든 리건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한 바닐라빛 드레스에 연하늘색 리본을 감은 잉그리드가 보였다. 볼이 조금 발갛다. 잉그리드의 가늘고 긴 팔이 그의 책상을 뒤적였다. ‘감히’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냥 잉그리드가 그의 책상을 살피는구나 했다. 아니 아무 생각도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잉그리드가 무언가를 잡아 들었다. 우아하게 내리깔려있던 눈매가 올라가 동그랗게 뜨이더니, 홀로 미소를 띠었다. 옆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석양, 햇살마저 부수는 백금발, 우아한 곡선의 옆모습, 하늘색의 리본, 천천히 턱을 들어 자신을 돌아보는 보라색의 눈동자.
“이거 내 건데.”
잉그리드가 손수건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리건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잉그리드가 쥐고 있는 천조각을 응시했다. 곧 그의 입술이 오므라졌다. 얼굴로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잉그리드가 주었던 장미자수의 손수건이었다. 리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쥐라도 난 것처럼 휘청하며 비틀거렸다. 잉그리드가 웃는 것을 보니 불안이 씻은 듯 걷히는데, 그 자리에 창피함과 수치스러움만 남았다.
리건이 소파 팔걸이에 겨우 걸터앉아 지탱하며 손을 뻗었다.
“내 거야. 내놔.”
“왜요? 리건이 버린 거, 내가 다시 주워서 챙겼는데 내 거죠.”
그렇게 말한 잉그리드가 요망하게도 그녀의 드레스 가슴골 사이에 손수건을 쏙쏙 밀어 넣었다. 리건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잉그리드의 미소에도 긴장의 기색이 묻어있다. 웃고는 있지만 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창을 등지고 선 잉그리드의 그림자가 제 발치까지 이어졌다. 그림자마저 우아하다는 생각이 드니 자신이 아주 제대로 맛이 간 모양이다.
리건은 제 꼴이 어떠할지에 대한 생각도 잊고 잉그리드를 바라만 보았다. 왜 왔냐, 당연히 물었어야 할 질문을 애초에 생략해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시는 먼저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또 다시 먼저 다가와서.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귓전을 속살거렸다.
제발, 제발,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이제 그만 좀 병신같아지라고.
잉그리드가 리건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발견하고 물었다. 리건은 자신이 여태까지 들고 있었는 지도 몰랐다.
“발렌틴의 노인, 이번에는 정말 보셨어요?”
닷새간의 피말리던 자괴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잉그리드를 마주한 이 짧은 찰나, 여전히 잉그리드가 그에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한결같은 여자가 낳은 제 새끼라면 어쩌면 자신보다는 저 여자를 더 닮지 않을까.
아들로 태어난다 해도 저 여자처럼 올곧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연 없을 거고, 딸이라면 그 어떤 병신 새끼를 만나더라도 결국 이렇게 웃는 얼굴로 무너뜨려버릴 것 아닌가. 그러면 상관없는 건 아닌가.
저 같은 병신 새끼도 이렇게나 휘청휘청 꺾어대는데, 저 여자라면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