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75
00075 [열세 번째 역]개인교사 대니얼 =========================================================================
어리둥절하게 리건에게 이끌렸다. 잉그리드는 피아노가 버려진 후로 아주 가끔, 다른 악기들을 연습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던 연주실 앞에 섰다. 리건이 턱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붉은 석양의 채광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오는 넓은 연주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첼로 케이스와, 벽에 걸린 바이올린만이 전부였는데,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하얀색의 그랜드피아노가 우아하게 서 있었다.
“어.”
세 걸음도 떼지 못하고 멈추었다. 잉그리드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당겨 물었다.
리건이 그녀에게 말없이 내다 버렸던 피아노 때문에 서운했던 마음이 꽤 깊었다. 이 저택에 홀로 있을 때 그녀를 위로해주었던 피아노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버렸다기에 정말 속이 상했었는데.
달칵. 뒤따라 들어온 리건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서있어.”
“아니……”
잉그리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작게 웃으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피아노에 다가갔다. 단정하게 정리했던 백금발이 붉은 채광을 반사하며 흔들렸다. 리건의 눈은 자연스레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이거.”
클레아가 선물해주었던 하얀 피아노와는 달랐지만, 그것보다 더 커다랗고 튼튼해보였다. 여든여덟개의 하얗고 까만 건반이 다소곳했다. 잉그리드는 비스듬 열린 그랜드 피아노의 윗 뚜껑을 한번 어루만져보았다. 내부의 정교하고 복잡하게 얽힌 선율과 나무판들을 보며 건반을 하나 눌러보았다. 딩- 소리와 함께 청아한 선율이 울렸다.
“갑자기 웬 피아노예요?”
목소리가 그녀도 모르게 들떴다. 잠깐 입술을 다물었던 리건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피아노의 옆면에 허리를 기대어 섰다.
“내 집에 내가 물건을 들인다는데.”
“흐응, 리건, 지난 번에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거예요?”
“…….뭐? 누가 반성을 한다고.”
발끈하는 리건을 한번 바라본 잉그리드가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잉그리드는 여전히 리건이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이렇게 리건이 그녀를 배려해주면 참 기분이 좋았다. 리건은 사르르 녹는 눈웃음을 피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얀 피아노 옆의 잉그리드는,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피아노가 너무 예뻐요. 정말 아름다워요. 지난 번 피아노보다도 큰 거 같아.”
허리를 숙여 피아노의 밑바닥까지 살피며 알짱알짱 살핀다. 건반을 하나, 둘, 셋 눌러보고, 세 개의 화음을 동시에 눌러보기도 하고 들뜬 기색을 지우지 않는 잉그리드의 분홍색 치마가 나풀거렸다. 보랏빛 눈동자는 촉촉하게 반짝였다.
리건은 왠지 모를 미련함을 느꼈다. 저 눈빛이 자신에게 향했으면 하는 욕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잉그리드는 그의 시선을 깨닫고 말갛게 웃으며 ‘고마워요.’ 말했다. 가슴이 쿵 울린다. 낮은 건반들을 수십개 내려친 것처럼 떨렸다.
리건은 밀려오는 갈등 앞에 주저했다. 어쩐지 손바닥 안에 식은땀이 배는 것도 같았다.
리건은 충동적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잉그리드의 눈이 의문에 가까운 놀람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제 옆얼굴에 깃드는 시선이 간지러웠다. 참, 안하던 짓도 많이 하고 멍청한 생각도 많이 한다. 이게 다 저게 비현실적으로 예뻐서 그런 거다.
한데 정작 의자에 앉으니 머릿속이 하얗다. 리건은 아랫입술을 꾹 물고 제 머릿속만큼이나 하얗게 빛나는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리건, 피아노 칠 거예요?”
가슴이 울렁거려 미치겠다. 간밤의 숙취가 아직도 남은 건지 메슥거려 돌아버리겠다.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지 몇 년이다. 지난 비글 같던 부인이라고도 하기 싫은 년이 피아노를 망가뜨려 내다 버린 후로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은 기억은 손에 꼽았다.
“……듣고 싶다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금 거칠게 나왔다.
“듣고 싶어요!”
잉그리드가 피아노 옆에 팔을 기대고 허리를 기울였다. 긴 백금발이 흘러내려 건반에 닿자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반짝반짝한 보랏빛 눈에 아닌 체 시선을 주었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동자가 오로지 그에게만 박혀 있었다. 기대라니. 저런 눈빛이라니. 저 여자가 자신에게 기대를 한다니.
가게에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연습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다.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오랜만이다보니 손가락이 굳는 느낌이었다. 만약에 제가 헥트르 에이버리 그 새끼보다 형편없으면 어떻게 하나.
“나, 3년 만이거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비웃음 사기 딱 좋은 말이었다.
잉그리드가 팔뚝에 턱을 괸 채로 가느다란 호선을 그려 웃었다.
“전에 나한테 형편없다고 했으니까, 나보다 잘 하는지 볼 거예요. 가이머스의 봄, 칠 줄 알아요? 봄이라서 그 곡이 듣고 싶은데.”
긴장으로 굳어있던 리건이 어깨에 힘을 풀며 웃었다. 괜히 퉁명스럽게 굳어지려던 성대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어째서 잉그리드 파르네세를 그토록 찬사했는지, 솔직히, 이해했다.
가이머스의 봄이라는 곡은 피아노를 배울 때 초심자를 벗어나면 거의 바로 배우는 중급자용 음악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피아노 교습생이 기초를 다지고 기교를 배우기 위해 거쳐가는 곡이다. 음은 발랄하면서 생기가 넘친다. 막 싹터오는 봄이 아닌 만개한 봄 햇살을 담았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평이 있다.
아직 리건은 선곡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어려운 곡을 칠 수 있더라도, 너무 오랜만이다보니 실수를 할까 선뜻 내키지 않았는데 호기롭게 피아노 앞에 앉은 주제에 쉬운 곡을 골라 연주하는 것도 우스워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 없는 한 마디를 하자마자 저런 식으로 먼저 선곡을 청하는 게, 내심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가슴이 뭉그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건은 편안히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는 잉그리드의 입술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떼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뭐…… 그 정도쯤이야.”
부러 거만하게 웃었다. 잉그리드가 새 부리처럼 입술을 오므리며 키득거렸다. 영락없이 ‘내가 한번 모른 척해준다.’ 그런 웃음이었다.
뭐, 이제 모르겠다. 그런 곡조차도 제대로 못 친다면 그는 정말 피아노 실력이 형편없이 녹슨 게 맞으니 인정해야지. 좀 창피하고 민망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잉그리드가 좋아하니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이 건반에 닿았다. 힘을 주자, 눌렸다. 소리가 튕기듯 공기를 흔들었다.
왼 손으로 낮은 음의 건반을 짚었다. 묵직한 울림이 피부를 적셨다. 하나씩, 하나씩, 눌렀다. 오른 손이 미끄러지듯 높은 음의 건반으로 옮겨갔다. 박자를 쫓던 손가락이, 어느새 박자가 손가락을 쫓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가이더스의 봄, 리건은 이 쉬운 곡에 긴장했던 자신을 자조했다. 봄, 봄, 겨울이 지나면 찾아오는 연둣빛이 건반 끝에서 터져 나온다.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걸로 내놓으라 윽박을 친 보람이 있었다.
경쾌하게 빨라졌다가, 놀리듯 높은 건반이 통통 튄다. 페달이 부드럽게 끌어주는 선율이 고상하게 퍼져나갔다. 리건은 가끔 그의 왼 손이 하는 실수에 잉그리드가 웃는다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창피하지 않아서 그냥 쳤다. 오른손은 착실히, 외려 만족스러울만큼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음율을 완성하고 있으니까.
붉은 채광이 발치를 드리우는 고즈넉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봄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붉은 석양 속에 앉아서 피아노를 치던 잉그리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정도 여유를 찾았다. 느린 구간에 접어들어 기계적으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며 잉그리드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잉그리드가 눈이 마주치자, 발갛게 상기된 뺨에 보조개를 패며 더 선명하게 웃었다.
그도 모르게 잠깐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체 선율을 자았다. 지금 멈춰버리면 어쩐지 어색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잉그리드가 허밍음으로 따라 불렀다.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구경거리가 된다는 생각이 들면 늘 불쾌했는데 지금은 쭉 이러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율 속으로 잉그리드의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좋아요, 나보다 잘하는 거 인정한다.”
리건은 헛웃었다. 저 빈말 투성이 여자. 이미 제가 몇 번이나 틀린 걸 듣고서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정말 좋아요. 있지, 나중에 디어 축제에서 저랑 춤 춰줄 거예요?”
“춤? 그런 거 취미 없어.”
“아쉽네요. 내 첫 춤은 리건이었으면 했는데.”
피아노에 기대어 있는 잉그리드의 엉덩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저거더러 사슴이래. 꼬리가 분명 수백 개는 달려있을 거다.
여유를 좀 찾기는 했지만, 3년 간의 연습 부재는 분명 그의 실력을 녹슬게 했다. 이것저것 다 동시에 할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디어 축제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리건은 무심히 답했다.
“넌 이미 사람들이 엘뷔니 디어라고 떠들어대는데 뭐하러 거기서 광대짓을 해.”
“춤추는 거 즐거운 걸요.”
페달을 느리게 밟았다 놓던 리건이 건반에서 손을 떼려 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잉그리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속삭였다. ‘멈추지 말고, 계속 해봐요.’ 리건은 습관처럼 ‘뭐, 싫어.’하는 말이 튀어나갈 뻔 했지만 잉그리드가 그대로 등 돌려 걸어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느릿느릿 건반을 누르며 고개만 돌려 잉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연주실 구석에 걸려있던 바이올린과 현을 집어 든 잉그리드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빠르게 달려왔다. 뭘 하려는 건지. 박자를 늦추어 움직이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잉그리드가 조금 비장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게 분명한 입술을 당겨 웃으며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자세를 잡았다.
“나, 이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피아노의 울림 속으로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화음이 덮였다. 우아한 손끝이 향하는대로 활대에서 소리가 피어났다.
봄, 봄이었다.
그 봄, 리건은 귀머거리가 되었다. 피아노 건반에 놓인 손은 잉그리드를 따라 움직였다. 비장한 빛을 띠었던 보라색의 눈동자가 찬찬히 기쁨을 머금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를 돌아보며 도려나간 달처럼 웃는 눈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늘어진다. 그의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던 마지막의, 마지막의 발악마저 도려나갔다.
자신에게 저 눈이 향하길 바라 이 웃긴 광대짓을 하며 피아노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제 눈만 그녀에게 있다.
저에게 반하기를 바라 이 짓거리를 했는데, 이쪽이 더 반해버리면 어떡하나.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딸을 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가만히 눈만 마주치는 것으로도 이렇게 숨을 막히게 하나.
잉그리드의 허밍음이 웃음기를 피웠다. 피아노의 멜로디를 따라, 바이올린의 화음 속으로 가슴 뛰는 소리가 섞여든다. 갑자기 목이 매여왔다.
딩- 순간 리건이 피아노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연주가 끊어졌다. 잉그리드의 손이 멈추었다. 바이올린을 내린 잉그리드가 그에게 걸어왔다.
“응, 왜 그래요?”
얼굴에 열이 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고도 지금 제 얼굴이 얼마나 붉어져있을지 상상이 갈 정도였다. 가슴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 나올 것처럼 뛴다. 리건은 손등으로 입술을 뭉개듯 문지르며 가렸다. 입술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리건, 괜찮아요?”
피아노 다리 옆에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잉그리드가 손을 뻗어 올렸다. 리건의 뜨거운 이마를 만지고는 ‘열이 나는 거 같아요.’하고 걱정스러운 입술로 말했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런 기분, 느껴본 적 없었다.
이 병신같은 새끼에게도 늘 변함없는 온정을 품어주는 보라색의 저 눈길에 목이 맸다. 채워지지 않을 허무감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 두렵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왜 자신이 병신같은 짓을 계속해온 건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피곤해서 그래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랑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한 번도 겪어본적 없는 이런 기분을 사랑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자신은 지금 이 여자를 사랑하는 거였다.
목울대가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입술에 키스하는 수밖에.
이 봄이 가기 전에.
============================ 작품 후기 ============================
[안내방송]
이것으로 개인교사 대니얼의 마지막 명소 관광이 끝났습니다. 본 기장은 이번 명소를 위해 지난 명소를 광속으로 달렸읍니다.
요즘 본 기장이 돌아있는 건 아닌지,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닌지, 우려를 표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 기장도 그 중 한 명으로 ‘본 기장의 목숨은 이대로 괜찮은가?’ 심도깊은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늘 본 기장과 함께 달리며 즐거워해주시는 승객분들이 있어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 기장이 후원팁 그만 주랬잖아! 이 이상 강제충전되서 질주하면 죽는다고!
말은 이렇게 해도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치킨값 벌었다. 본 기장은 다다음달에 치킨 먹을 것입니다. 아이 좋아라.
이상으로 다음 역 안내입니다.
다음 역은 ‘다잉 투 새드’, ‘다잉 투 새드’역입니다.
오늘도 흰사슴호와 함께 해주신 승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한 여행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