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An Adult Game As A Former Hero RAW - Chapter (187)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애쉬의 전방 500m 이내에 살아 숨 쉬는 마족은 없었다.
“…뭐야, 이건?”
한지수는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필멸자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기적이라 부르진 않으니.
털썩.
비틀거리던 애쉬가 쓰러졌다.
눈앞에서 펼쳐진 기적에 멍해졌던 한지수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성벽에서 뛰어내려 다급히 애쉬를 향해 달려갔다.
“괜찮냐?!”
혹시나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며 엎어진 애쉬의 몸을 뒤집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헤헤, 용사님. 봤어요? 제가 말했죠? 메리아 님이 제게 말씀하셨다고!”
실실 쪼개는 애쉬를 보며 한지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생긴 건 몸이 아닌 머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시 한번 두두두 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왕군의 후위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본대였던 선발대가 전멸해서 그런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해 보였다.
쿵!
한지수와 애쉬 앞으로 아스가트가 착지했다. 뒤이어 제랄, 펠릭스, 앨리피드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용사는 그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무슨 소리인가? 난 아직 싸울 수 있… 아얏!”
한지수에게 딱밤을 맞은 애쉬가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어서는 것만 해도 힘들어 보이는데 더 싸우긴 무슨.”
그는 애쉬의 무릎 안쪽과 어깨에 팔을 둘러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앨리피드를 돌아봤다.
“신전에 데려다주고 바로 합류할게.”
“천천히 다녀와도 돼. 저 정도는 정말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 대화를 끝으로 한지수는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애쉬, 아까 그건 뭐였…”
방금 그 기적에 대해 물어보려던 그는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또 왜 이래?
“표정이 왜 그래?”
“공주님 안기. 저 지금 용사님께 공주님 안기를 당하고 있는 거군요?”
“..뭐?”
“영광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일기에 꼭 써서 후대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머리가 맛이 갔군. 확실해.
한지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본교로 돌아가면 다른 성직자들에게 자랑하겠다며 시시덕거리는 애쉬를 쳐다보다가 크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애쉬.
한지수는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뭐냐… 잘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네 덕에 살았어.”
“…”
“…야,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대답이 없자 평소처럼 꾸짖으려던 그가 애쉬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별말씀을요.”
꾸밈없이 순수한 미소.
두근─!
평범하게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적어도 한지수의 가슴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어라? 용사님. 얼굴이 왜 붉어지셨어요?”
“닥쳐.”
“엑.”
용사는 결국 주지 않으려던 정을 주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도 결국에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사지까지 쫓아와주는 이들을 밀어낼 정도로 냉혹한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정을 준 그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더 노력하면 된다고.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노력해서 그들 모두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고.
하지만 늘 그랬듯 그의 삶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시작은 성검 탈환이었습니다.
“긴급호출 명령?”
한지수의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앨리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로부터 전서구가 날아왔어. 급히 복귀하래.”
“쉴 틈도 없이 급하게 보낼 때는 언제고, 인제는 돌아오라 재촉한다고? 하나만 할 것이지.”
한지수는 혀를 차며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애쉬가 그를 따라 일어섰다.
“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볼일도 끝났겠다, 지체할 이유가 없잖아. 빨리 돌아가서 오랜만에 황궁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보자고.”
그리 말하며 그는 망설임 없이 여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숙였고.
용사님?
용사님이시다!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안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용사님 덕분에 우리 마을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딸이 살았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하는 그들을 보며 앨리피드가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볼 거 있다고 자꾸 이렇게 모여? 그리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말이야.”
“이 새끼 말 존나 심하게 하네?”
“새끼? 용사. 내가 너보다 오백 년은 더 살았거든? 존칭까지는 안 바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줄래?”
“그 나이 먹고도 철이 덜 든 게 참 자랑이다.”
“뭐?”
앨리피드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나이를 이용해서 비꼴 때면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익숙했기에 한지수는 눈길을 돌리며 무시했다.
“자, 그럼 잡담은 그만하고 가자… 응?”
한지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웬 어린 여자아이가 불쑥 튀어나와선 반으로 접힌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다.
그가 아이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편지야?”
아이가 홍조가 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수는 피식 웃으며 편지를 받았다.
어머, 예니. 잘 됐구나.
군중 속 누군가의 목소리에 아이는 쑥스러워하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이름이 예니구나.’
한지수는 편지를 펼쳤다. 글씨가 삐뚤삐뚤한 탓에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단어만큼은 정자로 쓰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
그는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애쉬가 어깨를 흔들며 말을 걸 때까지.
“용사님.”
“…응? 왜?”
“또 그 생각하셨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요. 딱 봐도 그건데. 용사님. 그건 용사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수인과 사람. 둘 중 하나를 구해야 한다면 사람을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요?”
“…”
용사 일행은 현재 두 파티로 흩어진 상태이다. 아스가트, 제랄, 펠릭스는 남쪽 전선에.
한지수, 애쉬, 앨리피드는 동남쪽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투입된 동남쪽 전선에서 검은 버섯 숲의 마물들이 날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인간의 마을을 구하느냐, 수인의 마을을 구하느냐.
병력을 나눌 수는 없었다.
마물의 수는 많았고, 어중간한 병력으로는 마을의 피해를 막아낼 수 없었으니까.
한지수는 고민 끝에 인간의 마을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인간 마을의 사람들이 수인 마을의 수인들보다 많았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다.
수인 마을을 지켜내지 못한 건 씁쓸하지만, 과거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는 이 선택을 바꾸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묵직한 죄책감을 애써 털어냈다.
“애쉬, 내가 그런 수인을 하대하는 듯한 말투는 그만하라고 했지?”
“앗..! 죄, 죄송해요..!”
애쉬가 실수했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한지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이 세계에는 수인을 박해하는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있다. 특히 종교 쪽에서는 더 심하게. 성기사단장인 그녀가 그의 말을 따라주려고 노력해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괜찮으니까, 제랄 앞에서만 조심해. 또 저번처럼 싸우다가 이빨 털리지 말고.”
“그건 그놈이 먼저”
“애쉬?”
“…네.”
애쉬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풀이 죽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귀여웠다. 한지수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잡담은 이제 그만. 슬슬 가자.”
적당히 쓰다듬다가 멈추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애쉬가 머리를 들이밀어왔다. 한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애쉬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조, 조금 더 쓰다듬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아… 그, 그래…”
덩달아 얼굴이 빨개진 한지수가 애쉬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앨리피드가 눈가를 좁혔다.
“염병하네, 진짜…”
그녀는 연인인 제랄이 보고 싶어졌다.
용사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무기가 있습니다.
성검.
여신의 힘이 담긴 성스러운 검입니다.
용사들은 이 검의 힘을 이용해 악덕한 마족들을 무찌르곤 하죠.
전투 경험 없이 이세계에서 넘어온 용사들에겐 필수불가결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대의 용사 한지수는 성검을 쥐기는커녕 본 적조차 없습니다.
전대의 용사가 마왕과 동귀어진을 한 탓에 성검을 회수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덕분에 한지수는 성검 없는 반쪽짜리 용사인 채로 전장에서 굴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습니다.
인간 측에서 성검이 숨겨진 장소를 알아냈기 때문이죠.
성검 없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가 성검까지 얻는다면?
높으신 분들은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사 파티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용사 일행은 마계로 잠입해 성검을 회수해오라!
그렇게 용사 파티는 은밀함을 위해 달랑 여섯 명이서 마계로 잠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는 마계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당첨은 나였군.”
전신을 갑옷으로 뒤덮은 것으로 모자라 올라탄 말에게까지 검은 갑옷을 입힌 마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4군단장, 에리키스.
마왕군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이다.
“…혼자 온 건가?”
한지수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황량한 대지. 그의 일행과 4군단장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 이런 즐거움을 다른 놈들에게 방해받을 수야 있나?”
“그래?”
한지수는 앨리피드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가 눈짓을 보낸 이유를 이해한 앨리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수가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마왕군에서 우리의 마계 침입을 알아차렸다는 건가?”
“알아차렸다고 말하긴 어렵군.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수상히 여겨 우리끼리 조금 움직여보기로 했을 뿐. 나 또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곳으로 와보았을 뿐이지.”
그게 당첨이었지만.
에리키스가 씨익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당첨은 무슨. 불운이겠지.”
앨리피드가 지팡이 끝으로 땅바닥을 찍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보랏빛의 손바닥만 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철의 속박]촤아악!
마법진에서 자주색 쇠사슬이 튀어나와 에리키스를 결박했다.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용사 일행이 움직였다. 애쉬, 펠릭스, 한지수, 아스가트가 동시에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목. 심장. 복부를 노리며 세 개의 검신이 궤도를 그린다. 머리를 터트리기 위해 육중한 주먹이 공기를 터트리며 나아간다.
카앙! 빠악!
둔탁한 소리.
검들은 모두 튕겨나갔고, 포탄과 같은 아스가트의 주먹 또한 에리키스의 머리를 조금 흔드는 데에서 그쳤다.
한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이리 단단해?”
오러가 담긴 검으로도 못 자르는 생명체는 처음이었다.
“크하핫! 오랜만에 때릴 맛이 나는 놈이군! 요즘 만나는 것들마다 물렁물렁해서 때릴 맛이 안 났는데 잘 됐다. 부드러워질 때까지 두드려주지.”
아스가트가 우두둑 주먹 관절을 풀었다.
“내 몸이 물렁해질 때까지 두드리겠다고? 그것도 나쁘지 않군.”
에리키스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불길함을 감지한 한지수는 다시 한번 에리키스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움직였으나, 에리키스의 수작질이 더 빨랐다.
“다만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면 재미없지.”
에리키스의 머리 위에 생겨난 검은 마법진.
그곳에서 여성의 형태를 한 원통형의 관이 서서히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