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ection RAW novel - chapter 139
서울, 남산.
페닌슐라호텔.
운행 중지 푯말이 세워지자, 로비에 앉아있던 서울고검장 김길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4호기로 다가갔다.
—*—
페닌슐라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길주 자네가 비상시에 하자고 만들어놓은 그 ‘프로토콜’인지 하는 걸 내 진짜 쓰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어.
김길주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 두려웠다. 그래서, ‘프로토콜’을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영영 오지 않기를 빌었는데···.
전화를 받는 김길주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부산이십니까?”
– 타이밍이 좋았지 뭐야. 그냥 오랜만에 용찬이 놈도 보고, 바다나 볼까 해서 온 건데···. 흐허허.
내심은 어떤지 몰라도,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조필건 회장의 목소리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한 모양이다.
“차 실장 없이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 아니야. 괜찮아.
“차 실장이랑 용인 직원들은 48시간 이내로 풀려날 겁니다. 하지만, 바로 부산으로 부르시는 거는···.”
– 알아. 나 그렇게 늙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프로토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 그렇게 해. 아, 근데.
“예, 회장님.”
– 나 출국 안 해.
“예?”
– 이 나이에 내가 내 나라 놔두고 왜 익숙지도 않은 다른 나라에 가 있어야 해.
“잠시만이면 됩니다. 석 달. 길어도 다섯 달 정도면 수사 종결될 거고, 관련자들 징계로 덮어질 겁니다. 그러니까···.”
– 김 검사.
“예, 회장님.”
– 나 안 나가.
“·········.”
사실, 이 계획에서 조필건 회장의 해외 도피는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그가 국내에 있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보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심적으로 부담의 크기가 다른 거니까.
“알겠습니다.”
김길주는 더 논쟁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겠다면 그렇게 따라야 한다.
– 아, 그리고 데이비드한테는 내가 연락해두었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거기한테 연락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창은 홍콩에 있는 펀드매니저로 조필건의 또 다른 ‘주머니’를 관리하는 인물이다.
– 그래, 그럼. 수고해. 나는 여기서 한동안 좀 쉬다가 올라갈 테니까.
“예, 수습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아, 맞다. 그놈은 어떻게 됐어?
“예? 그놈이요?”
– 그 검사 놈. 나주연이.
“아, 용인현제병원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상태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깨어나도 뇌 기능이 손상되어있을 가능성이 크고 당시 기억이 상실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 흐허허. 신기한 놈이야. 다섯 시간이지, 아마? 땅속에 묻혀있던 던 게. 재밌어, 아주 재밌어.
“···.”
– 그놈 좀 잘 봐.
“회장님, 지금 경비가 심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검사에게 접근하는 거는 쓸데없는 의혹만······.”
김길주는 이 상황에서 회장이 나주연을 제거하라는 황당한 명령이라도 내릴까 봐, 미리 조언했다. 다만, 조필건은 그런 명령을 내릴 마음이 없었다.
– 아니야. 그냥 자네더러 잘 보라는 말이었어.
“아···예, 알겠습니다.”
– 자네의 계획이 틀어지면 말이야. 아마 그놈 때문일 거야.
“예?”
병원에 누워있는 저놈이 뭘 어쩐다고 저리 말씀하시는 거지? 산소 부족으로 뇌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놈일 뿐인데.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욕봐.”
딸깍.
조필건과 통화를 마친 김길주는 창밖으로 한강을 내다봤다.
정말이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노인네다.
서재에 처박혀서 몇 달이고 장난감인지, 모형인지 하는 것을 만들고 있을 때는 영락없이 자폐아 같다가도 이럴 때는 노망난 노인네 같다.
‘저주하는 거야 뭐야? 흥, 병원에 누워있는 놈이 뭘 어쩐다고···. 당신의 기행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건데. 쯧.’
김길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똑똑똑.
“안녕하셨습니까, 검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청장님.”
김길주가 먼저 와 있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안으로 때마침 들어온 건 경기남부경찰청 청장 허정태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오늘 새벽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용인에서 검사가 발견되었다고 하던데······.”
“배경 설명은 잠시 뒤에.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일단 수사권을 광수대로 넘기시죠. 그리고······.”
시간이 촉박했다. 김길주는 곧바로 허정태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
용인경찰서, 강력팀.
“제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인아의 요구에 용인서 강력팀 팀장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기가 조사한 내용을 브리핑해주었는데, 본인이 들어가겠다고 하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왜요? 뭐 나도 비리 경찰로 보여서 그런 건가?”
이틀 전 밤 서초서 경특대가 관할 내로 출동했고, 경기남부청에서는 기동대를 같이 보냈다. 영문도 모른 채, 졸지에 핫스폿이 된 용인서 내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팀장님.”
옆에 서 있던 동석이 힘주어 말했다. 평소 성격이라면 조용히 있었을 텐데, 그날 밤 펌핑된 아드레날린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들어가 보시던지.”
팀장은 동석을 아래위로 한번 훑고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비켰다.
인아와 동석은 조필건이 변호사와 와있다는 취조실로 향했다.
—*—
“아직도 할 말이 남아있는 겁니까?”
젊은 변호사는 인아와 동석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의아했다. 좀 더 경험이 많은 변호사일 줄 알았는데,
“연로하신 분입니다. 이런 식의 과도한 조사는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어리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변호사님. 콜록, 콜록.”
더 의아한 것은 그 옆에 앉아있는 노인이었다. 마른기침을 해대며 어린 변호사를 다독이는 그는 너무나도 수수하게 생긴, 어느 동네서나 볼 수 있는 할아버지였다.
‘이 자가 조필건이라고?’
이런 자가 산 사람을 땅에 묻고 비밀스러운 그 큰 조직을 호령하는 인물이라고? 제대로 압박하려는 마음으로 취조실을 들어갔던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뭘 더 물어볼 게 남은 거죠? 이미 다 설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인아는 말없이 조필건을 노려봤다.
“이봐요, 형사님!”
그러고는 젊은 변호사를 무시한 채, 그 인상 좋은 노인에게 직접 물었다.
“조필건 씨?”
“예, 형사님.”
“정말 그 산속에 있는 건물들이 할아버님 것인가요?”
“예, 맞습니다.”
“할아버님이 명의로 되어있지 않던데요.”
“그건···.”
“형사님, 그건 저희 의뢰인이 조금 전에 팀장님께 다 설명해 드린 부분입니다. 같은 질문 계속 반복하실 겁니까?”
“대답해보시죠?”
“그게, 이 노인네가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남겨주고 싶어서 타인 명의로 등록한 건데······. 부끄럽습니다, 형사님.”
“탈세 목적으로 그러신 거다?”
“늙을수록 사람이 청렴하고 검소해야 하는데···. 노욕이라는 게 참···. 자식 사랑으로 생각해주시고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저는 그저 지방에 땅 몇 개, 그거 가지고 땅놀음 하는 노인네일 뿐입니다.”
“근데 왜 그 조폭들이 할아버님 소유 건물에 있는 건가요?”
“그거는 저도 잘······.”
“좀 전에 다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별장이 들어서 있던 건물을 펜션으로 개조해서 사용하려고 했는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그만뒀고. 그 와중에 건설자하고 분쟁이 좀 생겼는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그쪽 사람들하고 연관이 있는 자라서······.”
젊은 변호사는 준비해온 각본대로 주장했다. 근데 너무 어설프다. 오히려 증거라고 내미는 서류들은 완벽한데, 말투나 태도가 미숙하다.
결코 그런 커다란 조직의 보스를 대리할만한 자가 아니다. 그렇다는 말은···.
“그 음산한 건물들이 펜션이다? 개소리하고 있네. 흥, 당신 조필건 아니야. 진짜 어디 있어?”
—*—
대검찰청, 감찰부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권혁이 물었다.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주연이 그자를 만나러 그 밤에 거기를 혼자 갔다는 것도. 조필건이 검사를 생매장할 정도로 무서운 게 없는 자라는 것도.
송재현은 한참 뒤에나 입을 열었다.
“나 검사 상태는 어때?”
“위기는 넘겼는데,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도경이 답했다.
“조필건이 용인서에 출두했다며? 진짜야?”
“아닌 것 같습니다. 대역이거나 아니면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인 듯싶습니다.”
“조사해.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 싹 다 털어. 형제, 자식, 부모는 물론, 사돈에 팔촌까지. 가족 중에 없으면 학연, 지연 다 털어 봐. 분명 관련 있어.”
“알겠습니다.”
다시 흐르는 침묵. 그 무게가 상당하다.
아끼는 후배가 죽을 뻔했다. 그것도 자신이 내린 지시를 따르다가.
비록 무모한 짓까지 하면서 알아내라는 의도는 아니었어도 죄책감이 송재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특임검사는 어떻게···?”
애초에 조용히 진행하려던 수사였다. 평검사를 전면에 내세워 내부 비리 사건이 아닌 조직·강력범죄로 포장해서 초기에 집중될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관심을 피하려고 했었다.
특검 논쟁을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이 막혔다. 선봉장으로 내세우려던 에이스가 당한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송재현은,
“그냥 다 까고 간다.”
결정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마음이다.
“김길주 고검장 소환해.”
부장의 결정에 두 과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시를 내린 송재현은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띠리링- 띠리링-
– 여보세요?
“총장님 자리에 계시지? 지금 올라갔다고 전해드려.”
—*—
용인경찰서, 주차장.
“아무래도 가짜 같죠?”
별다른 소득 없이 취조실은 나온 인아와 동석. 침묵을 깨고 동석이 물었다.
“가짜야. 확실해. 저런 노인네가 진짜일 리 없어.”
“그럼 진짜는 어디 있을까요?”
담배를 꼬나문 주인아는 불붙이는 것을 까먹었다. 이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조필건이 너무나 잡고 싶다.
“넌 서울로 올라가서 저 노인네 뒷조사 좀 해 봐.”
“선배님은요?”
주연을 보고 갈 생각이다.
“병원에 들렀다 갈게.”
“아, 방금 취조실에 있을 때, 병원에서 연락 왔었는데.”
“뭐라고?”
“나 검사님 서울 병원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그래? ”
그쪽이 인아도 편하다. 그런데 그런 결정은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하는 건데···.
“도 변호사님이 요청하신 건가?”
“아···아닌 것 같아요. 여자친구라고 하던 거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