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ection RAW novel - chapter 16
그 순간,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반짝이는 두 눈 때문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코도 아니었으며 생글거리는 입술 때문도 아니었다.
짙고 풍성한 머릿결.
굵은 물결이 들어간 검정색 단발머리는 그녀의 갸름한 턱밑에서 찰랑거렸고, 머리숱이 어찌나 많은지 작은 얼굴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유명했던 배우는 아니었더라도 연극·영화판에 있으면서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송정의였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그중에서 한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주연 검사님?”
아주 잠깐, 아는 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존댓말을 썼고 직함을 붙여 부른 걸 보면 그리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은근슬쩍 근황 얘기를 하며 넘어갈 수도 있을 듯싶은데···.
하나, 그렇게 어물쩍 넘기면 그녀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시죠?”
그녀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일 초 정도 구겨져 있던 미간이 금세 펴지더니 그녀의 두 볼에 보조개가 파인다.
“뭐죠? 이런 게 나주연 씨 방식이라면, 별론데요.”
방식? 무슨 방식? 별로라면서 왜 웃는 거지?
“죄송합니다. 그게 제가···.”
여자는 장난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마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봐 놓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전화번호를 물어봐? 어디서? 길거리에서? 이놈이 그런 놈이었나? 길거리에서 전화번호를 물어본 남자한테 이렇게 와서 말을 걸 것 같지는 않은데. 보아하니 한동안 못 본 사이인 것 같고. 뭐지? 길거리가 아니고 어떤 모임 같은 거였나?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내가 만난 것도 아니잖아.
“네. 죄송하지만 기억이 없습니다.”
이번에 잡힌 주름은 조금 더 선명했다.
“제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간 의식을 찾지 못했고, 깨어나서도 기억상실 증상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하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사고 전에 얘가, 아니 제가 아가씨한테 호감을 느끼고 연락처를 물어봤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예의를 갖춘 대답에도 그녀는 한동안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믿기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다.
드라마도 아니고 기억상실증이라니···.
근데,
“흠, 얼추 설명되기는 하네요. 전화번호를 줬는데도 그동안 연락 한번 없었던 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믿어주는 듯하다.
“죄송합니다.”
“사실이라면 죄송할 필요는 없죠.”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합니다.”
“······.”
잠시간 흐르는 어색한 침묵.
몇 개월간 연락이 없었던 남자에게 다가와 말을 걸 정도로 활달한 그녀라도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근데, 그건 처음 보는 여자한테 기억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요?”
“네?”
“나이 드신 분들한테 아가씨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은 사람한테 아가씨라는 말은 처음이네요.”
“아, 네. 기억이 안 나다 보니···.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네? 흠.”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에요.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서···.”
“······.”
그럴 수밖에. 외모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때마침 정혜와 통화하러 잠시 자리를 비켰던 흥식이 돌아왔다.
“혹시 교통사고 당하셨을 때, 핸드폰도 망가지셨나요?”
동행이 돌아오는 걸 보고는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그럼, 제 전화번호 아직도 갖고 계시겠네요.”
“아···.”
“은채에요. 이은채.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의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은은한 삼나무 향을 낸다.
“누구야?”
“이은채.”
“그게 누군데?”
“나도 몰라.”
테이블로 돌아온 흥식의 질문에 주연은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뭐야?”
“얘가 아는 애.”
주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에서 ‘이은채’라는 이름을 찾았다.
“너, 그것 좀 하지 마라.”
“뭘?”
“손가락으로 네 얼굴 가리키는 거.”
“그게 왜?”
“말할 때 자기 자신을 삼인칭으로 바꾸어 말하는 애들 있지? 그런 애들같아.”
주연은 흥식의 비꼼을 무시하고 이름을 찾는 데 전념했다.
“찾았다!”
“뭘?”
“전화번호.”
“누구?”
“누구겠니? 다 먹었지? 가자.”
애초에 흥식이 돌아오면 나가려 하던 참. 주연은 멀리 있는 이은채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흥식도 덩달아 그녀가 앉아있는 쪽을 힐끔 보고 주연을 뒤따랐다.
“저 여자가 누군데?”
“난들 알겠냐? 사고 전에 나주연 씨께서 전화번호를 따신 분이란다.”
“전화번호를 따?”
“응.”
“야- 역시 젊은 세대들은 다르구나. 나는 내 평생 모르는 여자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이 없는데.”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근데 저 여자 번호는 네가 왜?”
“응? 아, 뭐, 굳이 와서 아는 척까지 했는데···.”
“아는 척까지 했는데···뭐?”
“전화번호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대.”
“······.”
“왜? 뭐?”
주연에 대답에 흥식이 가증스럽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언제는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게 좀 그렇다며? 진짜 나주연이 돌아와서 혼란스럽지 않겠냐며? 너 나한테 5분 전에 말한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건 새로운 인간관계지. 이건 이미 알고 있던 관계. 혹시 또 아냐, 둘이 운명 같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거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꼬인 건지? 당장 오늘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것 자체가 신기하잖아.”
“신기는 무슨. 그래서 뭐? 연락이라도 하게? 만나시게?”
“최소한의 운명의 끈 정도는 유지하게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드네?”
“도리는 개뿔. 야, 솔직히 말해. 저 아가씨가 예쁘게 생겨서 그런 거 아냐.”
“어허-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절대 예뻐서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솔직히 진짜 예쁘지 않냐? 화장이 짙지도 않은데 저 정도면 진짜 미인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뭐, 좀 예쁘긴 하네···.”
“야!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왜? 뭐? 뭐가?”
“너는 내 동생이 더 예쁘다고 해야지! 이 쉐끼 안 되겠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
“야, 이건 그냥 네가 물어서 동의한 것뿐이잖아. 누가 저 여자가 내 스타일이라고 했냐. 저 여자 내 스타일 아냐. 전혀 아니야.”
장난이었을 뿐인데, 흥식이 발끈했다. 예전부터 정의는 흥식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툭툭 건드리다 보면 반응이 재미있다.
그렇게 주고받으며 카운터에 도착했고, 주연이 계산하는 동안 잠시 멈추었던 대화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이어졌다.
“나는 긴 생머리를 좋아해.”
정혜가 긴 생머리를 가졌다.
“누가 뭐래?”
“그렇다고.”
“농담이야, 농담. 긴장하기는···.”
“긴장은 무슨···.”
“그래서 정혜는? 뭐래?”
주연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꾸고 정혜와 통화한 내용에 관해 물었다.
“정혜? 아, 있다가 병원에 간대. 혹시 시간이 있으면 와줄 수 있냐고 해서 그런다고 했어.”
“그래?”
“응.”
병원에 누워있는 오빠 때문에 주말도 쉬지 못하는 동생이 안쓰러웠다. 조금 전까지 즐거웠던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연은 지갑에서 있던 삼십만 원쯤 되는 현금을 전부 꺼내 흥식에게 내밀었다.
“뭐냐, 이게?”
“정혜 맛있는 거 사줘.”
“야, 나 돈 있다.”
“누가 뭐래? 그냥 이걸로 사줘.”
“됐어. 내가 사줄게.”
“그냥 좀 받아, 새끼야! 평생 해준 게 없어서 그래.”
진심이었다. 화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좀 전까지와는 다르게 목소리에 장난기가 하나 없다.
“그럼 뭐 옷이라도 사주던가. 네 돈으로 맛있는 거 사주고···.”
친구의 그런 마음을 알아챈 흥식은 더 싸우지 않고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저녁에는 네가 준 돈으로 한우나 먹어야겠다.”
피식-
방금 스테이크를 먹고 나왔다.
그런데도 정혜가 소고기를 좋아하니까 한우를 먹겠다는 녀석이다.
주연은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는 이제 뭐 하게?”
“나? 나는···원래는 너랑 영화나 한 편 때리려고 했는데, 그냥 사무실에나 나가봐야겠다.”
“사무실?”
“응.”
검사 흉내 낸 지 4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가 마치 진짜 검사처럼 토요일 오후에 사무실에 나간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고작 4개월이었지만, 그리고 ‘야매’라고 장난삼아 늘 놀려대지만, 가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야매 주제에 토요일에 출근은 무슨···.”
“내 동생이랑 데이트 잘해라. 이 검사님은 대한민국 정의를 위하여 일하러 갈 테니까.”
“그럼, 이따 밤에 한잔할 텨?”
“됐다. 들어가 쉬어라. 매일 나 만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우, 고마워. 나도 그냥 예의상 던진 건데. 휴우-”
“새끼-. 가라.”
“간다.”
—*—
서울중앙지검, 1303호.
월요일 아침 일찍 송재현은 나주연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어, 나 프로, 거기 좀 앉지.”
주연은 지시대로 소파의 한쪽에 앉았고, 잠시 뒤 송재현도 책상에서 나와 소파 상석에 앉았다.
“형사부 일은 어때?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지?”
“하나둘씩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부서들보다 가장 민생에 가까운 사건들을 다루는 곳이야. 있다 보면 배울 게 많아.”
“네.”
성낙현이 피의자 조사 중에 녹음한 내용 때문에 부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송재현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용건을 꺼냈다.
“오늘 나 프로를 부른 이유는 형사3부 수사지휘 전담검사직을 맡기기 전에 먼저 의사를 물어보려고.”
2012년 2월에 제정된 대검찰청훈령 따라, 각 지방검찰청은 관할 사법경찰 관리에 대한 수사 지휘를 전담할 검사를 지정하도록 되어있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별도의 전담팀을 꾸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 형사부에 한 명씩 전담검사를 두어 각종 영장 및 압수수색, 긴급체포, 가정폭력범죄에 관한 임시조치 등 법 집행과 관련하여 관할서 경찰관들의 의문 사항을 즉각 즉각 해결해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