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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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출발
“헉!”
“저, 저건!”
처음 하마란이 사람들을 뛰어 넘을 때만 해도 경비병들은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이었다. 메이드복을 닮았으면서도 훨씬 야시시한 느낌의 옷차림을 한, 살짝 그을린 피부를 지닌 육감적인 여자가 두건을 뒤집어 쓰고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헌신의 일격이 발동되자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경비병들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는 함부로 상대해서는 안 될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저렇게 몸에서 불타는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그 중에서도 오직 하나 뿐이다.
“서, 설마… 신성 폭… 읍읍!”
“미쳤어? 죽고 싶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분위기. 모험가들을 막아서고 있던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그런 경비병들에게 항의하던 모험가들마저 일순 주춤하며 뒤로 물러선다.
“역시 신성 폭력배. 아니, 저쯤 되면 차라리 만능열쇠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사람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대미궁의 입구에 순식간에 커다란 공터가 생긴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형진은 다른 이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다음 순간 그들은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 듯이 뛰어 넘어 하마란의 뒤에 섰다.
“힉!”
“조용히.”
“…”
형진의 품에 안겨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로지르는 체험을 한 유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 했다가 주의를 받자 얼른 입을 막았다.
경비병들은 하마란의 등 뒤에 정체 불명의 인원이 더 늘어나자 당황했다.
등장하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감히 그 옆으로 얼씬거리지 못하는 신성 폭력배의 등 뒤에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 잡는 모습은 딱 봐도 동료임을 알 수 있었다. 오귀스트마저도 어느 틈엔가 두건 달린 망토를 꺼내 뒤집어썼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두건이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 그래서 경비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들 모두가 신성 폭력배라고 착각해 버렸다.
모험가들 중에는 오귀스트를 아는 이들도 제법 많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두건 달린 망토를 뒤집어 쓴 뒷모습 뿐이라 그들 역시 이 상황에서 오귀스트를 알아보거나 연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디서 이렇게 많은 신성 폭력배들이 갑자기 나타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어, 어쩌지?”
“그, 그게…”
당황한 경비병들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문득 하마란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
그러자 경비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하마란의 입에서 커다란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커허엉!
“히이익!”
“헉!”
귀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딩딩 울리는 듯한 그 거대한 포효에 경비병들은 일순 몸에서 혼이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때문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평형감각을 잃으면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와르르.
한 사람이 뒤로 넘어가듯 쓰러지자, 서로 몸이 뒤엉키며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경비병의 대열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대단하다.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고함 한 번 지르는 것으로 창을 들고 대열을 지은 경비병의 대열을 저렇게 단숨에 무력화시키다니.
“무, 물러나!”
백인장으로 보이는 자가 뒤늦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얼른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호구신을 제외한 신의 추종자 대부분은 그 자체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자들. 모험가들에게 밀려 통로를 열어줬다면 문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 그 상대가 신성 폭력배라면 경비병이 아니라 기사단이 와있었더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버티다가 박살이 나면 단순히 병력에 손실을 입는 것을 넘어 수호자와 백작령 사이의 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미궁이 문제가 아니라 영지 자체가 박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명령이 내려지자 그렇지 않아도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경비병들은 다급히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하마란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앞장 서서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일단 그렇게 대미궁의 입구를 막고 있던 경비병의 전열이 무너지자, 멍하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험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경비병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젠장.”
처음부터 백작이 무리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건 여기 파견된 경비병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백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대미궁을 탐사하기 위해 급히 소집된 추가 병력이 도착할 테니 그들에게 방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수호자는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 상대 아닌가.
“어쩐 일로 주먹질을 안 하고 그냥 호통만 쳐서 물리친 거지?”
형진이 하마란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이죽거리자,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 주먹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헤에, 제법인데.”
그러자 제랄딘이 문득 한 마디 던진다.
“저렇게 입구를 막는 걸 보면 조만간 백작령에서 추가 병력이 도달하겠네요. 우리들과는 상관 없지만.”
일행들에게 적외선 시야를 걸어 주던 미엘이 그 말을 받았다.
“근데 정말 여기가 백작령이에요?”
제랄딘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아니지. 보나마나 화전민촌의 사람들이 본래 자기 영지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둘러댈거야. 자기 영지 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니까 자신들의 영지라는 식으로.”
“아하.”
입구에서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오자, 앞장서던 오귀스트가 물러나며 형진에게 지도를 건넸다.
“여기부터는 리스폰이 시작되는 영역입니다. 진님, 부탁드립니다.”
“네.”
형진은 이전에 탐색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미궁 내부의 지도를 받아들고는 하마란에게 말했다.
“넌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오직 유아만 지키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하마란이 짧게 대답하자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물러나서 미엘님이랑 같이 따라와.”
“조심하세요.”
“걱정마.”
유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형진의 품에 안기는가 싶더니 도망치듯 미엘의 옆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대놓고 염장을 지르는 커플의 모습에 야유를 보내면서도 알아서 대열을 갖추었다.
트래커 역할을 할 형진이 선두. 그 뒤는 제랄딘이 서고, 하마란이 미엘과 유아를 보호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오귀스트가 후미를 지키는 식이다.
[코어는 어떻게 찾습니까?]형진의 물음에 오귀스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던전은 형태에 따라 크게 몇 가지로 나뉘지만, 공통적인 점은 코어 자체가 던전의 씨앗이나 다름없다는 점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나무들은 씨앗에서 싹이 터서 크게 자라나게 되죠. 우리들이 할 일은 뿌리나 가지를 되짚어 처음 씨앗이 뿌려진 장소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그럴 듯 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면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이런 저런 변형이 일어나고 허를 찌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코어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던전이라면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린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대미궁은 일반적인 던전과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건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대미궁은 코어가 하나가 아니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심이 되는 코어 외에도 지엽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서브 코어가 따로 존재한다는 얘기죠. 이 때문에 구조가 훨씬 복잡해지고 미궁이라고 불리울 만한 모습이 되어버렸다는 가설입니다.] [허…]둘이 메시지로 주고 받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제랄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하루 이틀 안에 돌파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합니다. 어제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그래서죠.] [아하.] [그러니 무리하게 곧바로 돌파하려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그저 대미궁이 어떤 곳인지 분위기만 파악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모두 능력은 출중하지만 던전 탐색 자체는 처음이니 먼저 그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일. 욕심 같아서야 단숨에 돌파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숙련된 모험가인 오귀스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
형진은 지도에 기재된 지형을 근거로 현재 그들이 위치한 곳을 가늠했다. 하나의 코어에 의해 형성된 미궁이라면 본류라고 할 수 있는 맥을 짚어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쓰면 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차근차근 주위의 지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체의 지형을 파악하고 나면 거기서 규칙성을 찾아내어 중심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물들은 일견 무질서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면서도 자기 유사성을 갖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식으로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규칙을 찾아내는 것으로 흔히 쓰이는 것이 이른바 프랙탈인데, 대미궁 자체가 오귀스트의 말대로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공간이라면 그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데 이러한 방법론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형진은 복잡한 자연물로부터 그 규칙성을 수학적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오귀스트가 언급한 나무의 비유를 이해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실제로 나무의 형상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우선은 지도로 확인된 지형에 변화가 없는지를 살피며 새로운 지형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게 지엽적인 구조의 확인이 끝나면 그것을 전체로 확대해 코어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유추하는 것이 대미궁에서 트래커가 해야할 일인 셈이다.
형진은 지도를 되짚어 가다가, 별표로 표시된 지점에서 움직임을 발견했다.
[첫 번째 포인트에서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임프들입니다. 반쯤은 정령에 가까운 최하급의 몬스터입니다만, 약한 속성력을 쓸 수 있고, 개중에는 상당히 덩치가 큰 놈도 존재합니다.]오귀스트의 설명을 들은 형진은 놈들의 위치와 숫자를 확인한 뒤 개개의 임프들에게 마킹을 하고는 표적을 할당했다. 숫자는 모두 다섯.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두 마리를 맡겠습니다. 제랄딘님, 나머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다 맡기셔도 괜찮아요.] [욕심이 많으시군요. 하지만 저도 실전 연습이 필요하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죠.] [감사합니다. 숫자를 세겠습니다. 3, 2, 1, 지금!]메시지가 끝남과 동시에 형진과 제랄딘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미처 일행들을 탐지하지 못하고 있던 임프들은 갑작스런 둘의 습격을 미처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임프들의 외형은 못 생긴 작은 꼬마 악마를 닮았다. 등에는 박쥐를 닮은 날개가 달려 있었지만, 놈들이 그것을 활용할 기회를 줄 생각은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촤라락!
양손에서 갈고리가 뻗어 나가 두 마리의 임프를 단숨에 낚아채더니 그대로 끌어당긴다.
“키엑!”
당황한 놈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미처 그 외침이 제대로 울려 퍼지기도 전에 가차 없이 단검이 놈들의 몸을 찌르고 지나간다.
[인스턴트 킬! ‘잿빛 임프’가 죽었습니다!] [인스턴트 킬! ‘잿빛 임프’가 죽었습니다!]형진의 손에 의해 두 마리의 임프가 단숨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제랄딘에게서 뻗어나온 검은 채찍과도 같은 무언가가 남은 세 마리를 단숨에 박살내 버린다. 그야말로 순식간. 하긴 이 인원들이라면 당연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