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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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재회
빙글빙글 웃으며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형진의 모습에, 미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미나 역시 집행자이고, 그것은 이따금 드물게 흘러나오는 공지 정도는 좋든 싫든 봐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어지간해서는 한 번도 띄우기 힘들다는 업적에 대한 공지를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 동안 벌써 몇 번이나 띄운 그런 인물이다.
처음의 한 번이야 그냥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다가 운 좋게 얻어 걸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파괴와 재생, 흔히 미친놈이라고 불리는 신의 강림을 막는데 일조했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지만, 엄연히 여러 명의 집행자와 함께 거론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토너먼트의 승리나 새로운 스킬의 완성 같은 부분으로 넘어가면 그저 운 좋게 얻어 걸렸다고만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새로운 스킬의 경우엔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래서 미나는 일단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상대의 허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싸움부터 시작하기엔 뭔가 걸리는 부분이 많은 탓이다.
하지만 형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아주 좋은 교리를 가지고 있더군요.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하냐 라던가. 제가 지금 딱 그런 심정입니다.”
“…”
물론 그런 교리를 가진 자가 누구인지는 미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대놓고 폭력적인 대화를 입에 담는 형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미나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일단 때려눕혀 놓고 제 욕망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만,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명예를 소중히 하라는 말씀을 떠올리니 차마 그러진 못하겠군요.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지켜보는 사람? 설마 또 다른 누군가가 근처에 있단 말인가.
미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주위를 살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탐색은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애초에 형진이 말한 다른 누군가는 바로 미엘이었고, 그녀는 지금 형진의 목에 감긴 채 목도리인 척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한 제의를 하고자 합니다.”
“무슨?”
“정말 간단한 겁니다.”
그런 말과 함께 형진이 내보인 것은 바로 바니걸 슈트였다.
“아란씨가 입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바로 바니걸 슈트라는 물건입니다.”
“…”
알다마다. 아란이 처음 이 마을에 머물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니 미나가 모를 리가 없다.
“제 제안은 간단합니다. 패배하는 쪽은 앞으로 이것만 입고 다니는 겁니다.”
“뭐?”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딜 잘라 낸다든가 하는 식의 끔찍한 벌도 아닙니다. 그냥 앞으로 이걸 입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죠. 아, 물론 그 위에 뭔가를 덧입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가리는 건 안 됩니다.”
“…”
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바니걸 슈트는 훌륭한 방어구지만, 저런 물건을 평상시에도 입고 다니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아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일상은 그냥 포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벌칙의 대상에는 눈앞의 남자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는 그렇다 쳐도 남자가 저걸 입고 다니다니. 생각만 해도 눈이 썩는 듯한 느낌이다.
“어떻습니까. 별로 대단한 벌칙도 아니죠?”
“제 정신이냐?”
“물론 아닙니다.”
너무나 담담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형진의 모습에 미나는 잠시 자기가 뭘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흥. 좋아.”
그러나 여기서 위축된다면 그건 패배와 직결되는 일. 그녀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며 승낙의 뜻을 밝혔다.
“약속하겠습니까?”
“약속한다. 하지만 넌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요. 이런, 너무 말이 길었군요. 그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물론 몸으로.”
“!”
순간 스윽하고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형진의 모습에 미나는 급히 양손에 단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내밀어 견제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처 몰랐다.
이미 형진의 단검 숙련 스킬이 자신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이며, 또한 눈앞의 남자가 상대의 어지간한 움직임 정도는 단숨에 그 허와 실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엘 파르드 왕실 비전의 스킬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인스턴트 킬의 존재.
이 세 가지의 조합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는 이미 필드 보스를 일대일 대결에서 쓰러뜨림으로서 증명이 된 상태.
쨍!
“큭!”
견제를 위해 내밀어졌던 단검이 아차 하는 순간 유리 깨지는 소음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흩어진다.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형진의 단검이 순식간에 찔러 들어와 인스턴트 킬로 박살내 버린 것이다.
공격을 하려 한 것이 아니기에 경직까지는 걸리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사용했던 애병이 너무나도 간단히 파괴되어 버리자 미나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저는 지금 충분히 진심이니까.”
“…”
슬쩍 내뱉은 형진의 경고에 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믿을 수 없다. 고작 몇 달 지나지도 않았건만, 이미 상대는 자신을 농락할 수 있는 수준까지 실력이 발전해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좋단 말인가.
하지만 당황한 중에도 미나는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형진이 자신을 향해 스윽 다가서자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비기, 그림자 유린.
발동되는 순간, 미나의 육체는 반쯤 그림자의 영역에 속한 채 일반적으로 인간이 낼 수 없는 극한의 속도로 가속했다. 그렇게 가속한 그녀의 육체는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박쥐가 미친 듯이 날아드는 듯한 느낌으로 사방을 가득 메우며 형진을 향해 쇄도했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사방에서 베어 들어오는 것 같은 그 공격은 상대로 하여금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할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걸 가만히 서서 다 맞아준다는 전제 하에서.
훅!
형진의 모습 마치 촛불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훅 불어 끄기라도 한 것처럼 미나의 시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환영의 반딧불이 시도되며 공격 범위에서 이탈해 버린 것이다.
“거기냐!”
하지만 그것은 미나 역시 예상한 바였다. 때문에 그녀는 형진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감각을 최대한 확장하고 있다가 그의 기척이 나타나는 순간 단검 하나를 새로 뽑아들고는 그곳에 기운을 집중했다.
파창!
그러자, 그녀의 손에 쥐어진 단검이 폭발하듯 깨지며 한 방향을 초토화시킬 기세로 날아들었다. 스스로 단검을 부숴 그 파편으로 적을 공격하는 그녀의 또 다른 비기가 발동한 것이다.
퍼퍼퍼퍽!
그녀의 비기는 어김없이 목표물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단숨에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미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의 공격이 명중한 것은,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통나무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밑천이 바닥 난 겁니까?”
“!”
그리고 그렇게 놀라는 그녀의 등 뒤로 무언가가 스륵 나타나더니 가볍게 단검을 내리 긋는다.
“큭!”
예리한 일격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느낌에 미나는 급히 스킬을 펼쳐 회피를 시도했으나 형진의 단검은 어김없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고,
푸학!
다음 순간 그녀가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은 터져 나가는 것처럼 갈가리 찢겨 나가고 말았다.
“이건…”
몸에는 상처 하나도 내지 않은 채, 입고 있던 재킷만 단숨에 조각내버리자 미나는 등골을 타고 차갑게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고작 이 정도가 당신의 한계라면 전 무척이나 실망할 겁니다.”
“웃기지 마!”
미나는 발악하듯 다시 한 번 그림자 유린을 펼쳤다.
하지만 형진은 앞서와 달리 피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지, 몸 전체에서 기이한 돌풍을 뿜어내며 느릿하게 손에 들린 단검을 움직이기만 할 뿐.
그림자의 영역으로 들어가 신체를 가속시키며 형진을 향해 쇄도하며 단검을 찔러가던 미나는 담담한 형진의 시선과 마주치고 나서야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미처 뭔가 다른 행동을 하기도 전에,
파창!
사각을 노리고 찔러 들어가던 그녀의 단검이 다시 한 번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컥!”
앞서 견제 동작 중에 단검을 깨먹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충격이 일순 미나의 전신을 파고 들며 모처럼 펼친 비기마저 깨뜨리고 그녀를 경직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나는 가속 상태에서 경직이 걸리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을 세차게 구를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그렇게 바닥을 구르는 미나의 눈앞에 스륵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시 한 번 단검을 휘둘렀다.
푸학!
그러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상체를 덮고 있던 두툼한 가죽 셔츠가 단숨에 찢겨져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설마 얕보는 겁니까? 한 번 쓴 기술을 그렇게 면전에서 대놓고 다시 쓰다니.”
“…”
그 목소리에는 실망감마저 서려 있었다. 미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춥다. 당연하다. 이제 그녀의 상의에 걸쳐져 있는 것은 얇은 셔츠 하나와 속옷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이미 한 겨울이 되어 버린 산 속의 싸늘한 바람을 견디기엔 터무니없이 빈약한 옷차림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의 마음을 더 춥게 만드는 것은, 두 번이나 입고 있는 옷만 그렇게 찢어 버린 형진의 솜씨였다. 도대체, 도대체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해져서 돌아왔단 말인가.
이쯤 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넘어 자괴감이 들 정도다. 상대가 이렇게 강해질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는, 그런 자괴감.
농락.
이건 이미 대결이 아니다. 단순히 강자가 약자를 가지고 노는 농락에 불과하다. 미나는 그것을 깨닫자 발악하듯 형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럴 리 없다. 뭔가 잘못 된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하지만 그녀의 발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숨겨둔 단검을 빼들 때마다 형진의 단검이 그것을 단숨에 깨부쉈다. 그녀가 비기를 펼치면 가만히 지켜보다가 역시나 그것을 파훼했다. 무기도 소용이 없었고, 스킬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씩 공격을 실패할 때마다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옷가지가 하나씩 찢겨지며 사라져 갔다.
“…”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미나는 싸늘한 겨울바람 속에서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결판이 난 것 같군요.”
“…”
“자, 그럼 약속을 지키셔야겠지요?”
형진은 인벤토리에서 바니걸 슈트를 꺼내 미나의 눈앞에 던지며 말을 이었다.
“입어. 그리고 맹세해라. 공포와 죽음의 이름 앞에.”
졌다. 그것도 한 마디 핑계조차 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패배. 상대는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백 번은 자신을 더 죽이고 남았을 정도이고, 자신은 단 한 번도 상대의 몸에 단검을 스치지도 못했다.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 합니다.”
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고, 다음 순간 그녀의 문장이 반응하며 그 맹세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음을 증명했다.
그것을 확인하자 미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니걸 슈트를 들고는 형진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입어야 했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어느 틈엔가 미나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