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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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칸에 부는 바람
김밥 한 덩이를 입에 넣자 부드럽게 잘 익은 쌀밥과 아삭한 야채의 식감이 혀를 자극한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새콤한 식초의 향이 어우러졌을 때, 뜨끈한 가락국수의 국물이 한 모금 입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두 남자는 뭘 어떻게 먹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음식을 비워 버렸다. 그리고 고작 세 닢으로 이런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라?”
“응?”
그렇게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두 남자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이 음식들이 지니는 버프 효과를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그거지?”
“그런 거 같은데?”
그들 역시 뛰어난 요리사가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은 아주 특별한 효과를 가진다는 풍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칸에도 그런 실력을 지닌 요리사가 몇쯤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그 명성에 맞게 아주 비싸다. 그런데 이곳은 어떤가. 단출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구성이긴 하지만 맛도 효과도 아주 확실한 요리가 고작 세 닢! 게다가 그런 음식을 먹으면 귀엽고 예쁜 견습 사제들의 미소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뭔가… 굉장하군.”
“그러게. 과연 호… 아니, 은혜로운 신전이야.”
자신도 모르게 호구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던 남자는 얼른 입을 닫았다.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사제들을 화나게 해서 출입 금지라도 당하면 너무나 커다란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하시는 건가요?”
“네? 아…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 거에요.”
“그렇군요. 종종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손님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돈을 치르고 나가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견습 사제들은 두 남자가 식당에서 나가기가 무섭게 꺅꺅거리며 환호하기 바쁘다.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무사히 개시를 잘 치른 것 같아서.”
“그러게. 아, 맞다. 뭔가를 잊은 것 같더니 그걸 깜박 하고 있었군.”
형진은 급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 아, 진님.”
“개시를 축하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하나를 더 드리려고 다시 왔습니다.”
“네?”
진의 선물이라는 것은 무엇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것들 뿐이라 견습 사제들은 기대에 가득찬 눈으로 형진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런 견습 사제들을 보며 형진은 손에 든 작은 상자를 보여주었다.
“우선 사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작은 구멍이 보이시죠?”
“네.”
“상자에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이 열쇠를 이 구멍에 넣고 돌려준 다음… 상자를 열면,”
형진이 마술을 펼치듯 상자를 열어 보이자 그 안에서 영롱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와아…”
“어쩜…”
한창 꿈꾸는 나이들이라 그런지 세 명의 견습 사제는 상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이것은 보호와 균형께서 부르신 자장가를 담아 놓은 상자입니다. 손님이 음식을 기다리실 때 이것을 틀어 주십시오.”
“여신님의 자장가라고요?”
“네. 하지만 그렇다고 일 하다 잠들어 버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아하하하.”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저… 계십니까.”
“네! 있어요! 어서오세요!”
방금 전까지 형진을 둘러싸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견습 사제들은 손님이 오자 반색하며 몰려가서 맞이하기 바쁘다. 형진은 조리대에서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당을 빠져 나왔다.
“견습 사제들이 의외로 똘똘해. 누구랑은 다르게 꽤 일을 잘 하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형진이 식당을 나오며 그렇게 말하자 유아가 볼을 부풀린다.
“그 누구라는 게 설마 저인가요?”
“오, 바로 알아차린 거야?”
“이쒸!”
“하하하.”
그렇게 웃던 형진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경비병을 하나 놔두기로 했다.
“협객 토끼, 나와 봐.”
그의 부름이 있기가 무섭게 반지 속에서 토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란웰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그에게 굴욕을 안긴 바 있었던 바로 그 녀석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법 그럴 듯한 하얀 턱시도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지켜라. 혹시라도 소란을 피우는 녀석이 있으면 혼내주고. 견습 사제들도 도와주고.”
“…”
협객 토끼를 형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옆에 의젓한 모습으로 버티고 섰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느 유명한 치킨 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이 정도면 됐겠지.”
협객 토끼 자체도 어지간한 남자 몇쯤은 우습게 때려눕힐 실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성역 안이라 설령 협객 토끼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있더라도 녀석에게 위해를 가할 수가 없다. 여신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자, 그럼 이제 성물이 있는 곳으로 가볼까.”
“네.”
둘을 데리고 참배객들에게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성물이 모셔져 있는 성소로 다가간다. 그러자 추운 겨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참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날도 추운데 저러다 다들 병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글쎄 그 문제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네? 어째서요?”
“저길 봐.”
유아와 제랄딘은 형진이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고는 과연이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호구 아니랄까봐 신상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지켜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제 신상이 놓여진 뒤로 계속 그랬던 모양인지, 성소 안쪽의 풀밭은 벌써부터 푸른 싹이 움트고 있었다.
제랄딘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식으로 힘을 막 쓰고 그러시면 금방 또 지쳐 버리실 텐데.”
“도시를 전부 다 저런 식으로 따뜻하게 밝히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보나마나 지금도 내가 눈치채면 어쩌지 하면서 걱정하고 있을 테고.”
“하하.”
“그나저나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아하, 왔군.”
아니나 다를까 형진에게로 여신이 보내는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참배객들 가운데 정말로 도움이 될만한 사항에 대해 여신이 정리해서 보내온 것이다.
“어디 보자.”
형진은 그렇게 보내진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형사와 민사, 그리고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그것이다. 형사 사건에 해당되는 중대한 범죄는 집행자에게로, 그 외에 민사 사건에 해당되는 것은 수호자에게로, 나머지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는 자신이.
“기젤님을 만나보고 와야겠군. 가자.”
“네.”
그들은 곧바로 신전을 벗어나 기젤의 옷 가게로 향했다.
“허어… 이거 참. 진님께서는 매번 예상치 못한 일을 들고 오시는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이시라면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바로 문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이 돌아왔다.
“공포와 죽음께서 건의를 수락하셨습니다. 인센티브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가 될 거라고 하십니다.”
“하하.”
사실 형진으로서는 한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었다. 물자 조달이나 긴급 운송처럼 집행자가 의뢰를 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수배자 처형과 같은 기타 암살 의뢰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예상하기로는 누군가가 깊은 원한을 품은 채 공포와 죽음에게 기원을 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공포와 죽음께서 의뢰를 발동하는 것이 그 한 가지이고, 또 하나는 관청으로부터 흉악한 범죄자의 의뢰를 지부장이 받아들이는 식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이고 정확한 내용은 직접 들어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들이 원한을 해결할 방법이 하나 더 생긴 것은 분명한 일이다.
형진은 건의가 받아들여지기가 무섭게 형사 사건으로 분류된 내용을 의뢰로 올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원을 다 들어주고 그러면 혹시라도 억울한 경우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유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형진에게 그렇게 묻자, 기젤이 대신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점이라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뢰가 들어간다고 다 그대로 실행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공포와 죽음께서 면밀히 확인하신 뒤에야 비로소 정식 의뢰로 설정되어 집행자에게 하달됩니다.”
“아하.”
하기야 공포와 죽음께서도 수없이 오랜 기간 동안 이 일을 해왔을 텐데 그 정도 대비야 당연히 해두었을 것이다.
“그럼 무고한 사람을 해코지 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신을 기만한 죄로 천벌이 떨어집니다. 이를테면…”
꽈광!
제랄딘의 물음에 기젤이 대답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커다란 벼락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천벌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기야 멀리 볼 것도 없이 할이라는 좋은 표본이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기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사실 저런 식으로 벼락을 맞는 건 아주 경미한 사건인 경우입니다. 만약 사안이 중대할 경우엔 반대로 집행자들에게 수배가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저런 식으로 벼락이 떨어지기 보다는 바로 집행자들에게 의뢰가 내려갑니다만, 이번엔 공포와 죽음께 직접 의뢰라 간 것이 아니라 보호와 균형에게로 기원이 간 경우라 특별히 경미한 정도로 처리가 된 모양입니다.”
“아하.”
설마 신에게 거짓말을 할 놈이 있을까 싶었는데, 호구신의 신전에 자리 잡은 탓인지 그런 놈이 벌써부터 나온 모양이다.
기질의 옷가게를 나온 형진은 다시 섬으로 가서 하마란을 찾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막 몸을 씻고 잘 준비를 하던 참이었던 모양인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던 하마란은 형진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바로 눈을 감고는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기젤과는 달리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조금 지친 표정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의뢰에 대한 건은 수락되었습니다. 인센티브는 공포와 죽음께서 정하신 것보다 5퍼센트 더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 와중에도 경쟁이 붙은 건가. 어쩐지 신들도 이래저래 복잡한 모양이다.
“고생했다. 아까 말했어야 하는데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아서 깜빡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마란이 꽤 심력을 소모한 모양인지 지친 표정으로 자기 거처에 들어가자, 형진은 남은 기원 목록을 제랄딘에게 넘겼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여지는 기원들이야. 내가 직접 나서도 되겠지만, 앞으로 이 업무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을 경우를 가늠하면 미리 체계를 마련해 두는 편이 좋겠지.”
“사제들에게 맡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이 기회에 지금까지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던 구호 업무도 체계를 세워두는 편이 좋겠어. 힘들까?”
어떻게 보면 정말 막막할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제랄딘은 고개를 저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이런 식으로 일이 주어지는 건 저에겐 언제나 기쁜 일이에요. 고마워요.”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알지? 일에 심취해서 과로하거나 하면 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후후, 걱정 마세요.”
혹시나 싶어 아틀리에 쪽을 바라봤지만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형진은 해안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기야 기원을 들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꼭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하란 법도 없다.
“어쨌든 이걸로 한 가지는 일단락을 지은 셈인가.”
“결국은 남에게 다 떠맡겼을 뿐인 것 같은데요.”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막 떠맡겨도 계속 일이 몰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리칸에서의 일은 어떻게 일단락이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각 신전에 배포할 신상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이번에 만든 신상처럼 엄청난 작품이 아니라 양산형으로 찍어낼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전에 신상을 모조리 나누어줄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째 내 무덤을 스스로 파고 들어가는 것 같단 말이지.”
“킥.”
투덜대며 한숨을 짓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은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