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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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돌파
요며칠 동안 보호와 균형은 꿈결을 노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혀끝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은 맛있는 음식.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자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누우면 출렁거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안락한 침대와, 발을 담그면 시원한 물줄기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작은 욕조.
귀여운 목소리로 재잘거리며 함박웃음을 짓는 카트린이나, 혹시라도 동생에게 문제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며 항상 그 곁을 맴도는 크루그.
항상 열심히 형진을 도우며 포근한 미소를 선사하는 유아와 조금 엄격한 표정을 짓곤 하지만 항상 맛있는 차를 끓여주는 제랄딘. 언제나 형진의 목에 감겨서 꾸벅꾸벅 졸기만 하는 미엘이라는 이름의 환수.
보기만 해도 듬직해지는 오귀스트. 여자답지 않게 무뚝뚝하지만 그래서 더 멋있어 보이는 하마란이나, 덩치에 맞지 않게 좀 덜렁대는 할.
귀여운 요정과 토끼들. 따스한 햇빛과 찰랑거리는 푸른 바다. 그리고 언덕 위의 풍차를 움직이는 시원한 바람.
행복이라는 단어를 형상화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활 속에서 여신은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파캉!
“키엑!”
“꽥!”
검은 꼬리와도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훑고 지나가자 선두에 섰던 몬스터 둘이 단숨에 죽어 넘어지며 룻을 떨군다. 여신은 전신에 보호의 권능을 두른 채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얼른 달려가 룻을 집어 들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그녀의 정신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신도들의 기원을 전해 듣고 빠짐없이 그것에 응답하고 있었다. 이틀 전인가. 동시에 기원을 전하는 사람이 천 명을 넘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차마 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신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천 명 넘는 사람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식의 격한 육체노동을 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아무리 허접하고 힘이 없어도 신은 신. 그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기적을 선보이고 있었다.
다른 신이 보면 아마도 그런 식으로 기적을 남발하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겠지만, 그녀는 이것이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치루어야 할 정당한 보수라고 인정하며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식으로 단 둘이 사냥을 나오는 일이 많아졌다. 유아도 제랄딘도 각자 하는 일이 많았고, 그건 섬 안에 사는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할 일이 없었던 오귀스트와 하마란, 그리고 할 역시 각 신전에 신상과 김밥천국이 들어설 때마다 질서를 확립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오귀스트의 경우엔 그 와중에도 대미궁에 임의로 설치된 코어를 관리하는 일까지 맡고 있었다.
카트린은 요즘 토끼들에게 무술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크루그는 동생이 그런 식으로 싸움 기술을 익히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형진은 만약 카트린의 관심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파악된다면, 조만간 라이언하트를 가르쳐 주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쯤이 좋겠군.”
형진은 문득 위치를 가늠하더니 머리핀 하나를 코어로 만든 다음 통로 한 귀퉁이에 그것을 심었다. 그러자 이내 작은 진동이 일어나며 그 일대가 새로운 던전의 중심 지역으로 설정된다.
대미궁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돌파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형진의 손에 의해 임의로 서브 코어들이 추가되면서 이제는 정말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극악한 구조로 변모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미궁 돌파에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얘기다. 형진의 경우엔 서브 코어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마치 와드를 박아 놓은 것처럼 그 주위의 지형이 환하게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서브 코어 자체가 형진의 소유이니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잠시 배낭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요.”
신도들이 많이 늘어나서 힘도 많이 강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냥을 돕는 일은 역시 아직 많이 힘들다. 게다가 그 와중에 계속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 더욱 더 그렇다. 만약 라야의 총괄 지부장이 지금의 여신을 보았다면 제자로 삼아달라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새로운 녀석들이었군요.”
“그런가요?”
모습이 좀 특이하다 싶긴 했지만 룻을 줍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에 제대로 볼 틈이 없었다.
형진이 배낭에서 집어올린 것은 팔찌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파트반 궁수의 완대
등급 : 희귀
착용제한 : 없음
설명 : 파트반족의 궁수들이 착용하는 완대.
효과 : 집중력, 적중력 증가
강화시 효과 : 집중력 상승
아마도 궁수들이 활을 쏠 때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진 아이템인 것 같은데, 집중력이나 적중력은 딱히 궁수가 아니라더라도 꽤 쓸모가 많은 능력치다.
형진은 새로 얻은 완대를 양 손에 하나씩 찼다. 갈고리 팔찌랑 착용 부위가 같아서 괜찮을까 싶기는 해도 형태가 다른 아이템이라 그런지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거… 일일이 손으로 입고 벗으려면 꽤 곤란할 것 같네요.”
“그러게요. 후훗.”
자신이 몸에 두르고 있는 희귀 아이템이 몇 개나 되는지 이제는 세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방금 전 했던 말대로 일일이 입고 벗으려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귀찮은 일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장비 토글 아이템이 있어서 그런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언제 어디서든 마치 변신 히어로처럼 복장을 확 바꿀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이거야 말로 진짜 사기 아이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계속 가겠습니다.”
“네!”
기존의 서브 코어를 회수하고 새로운 코어를 설치하는 일이 꽤 진행 되어 이제는 대미궁의 사분의 일 정도가 형진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일까. 초반에 주로 나타났던 임프들 대신 이제는 꽤 새로운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전 처치한 파트반 궁수도 바로 그런 녀석들 가운데 하나다.
파트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녀석들은 임프와 비슷한 체구를 가졌지만 황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이마에 눈 하나가 더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금 더 지능이 높은지 고작해야 나무껍질 엮은 것 정도의 방어구 밖에 걸치고 있지 않았던 임프들에 비해 제법 그럴 듯한 갑옷을 걸치고 있다.
형진은 뒤따라오는 여신의 기척을 느끼며 전율의 질주를 펼친다.
[축하합니다! ‘전율의 질주’를 체득하여 Lv.36을 달성하였습니다.]최근 던전을 헤집고 다닌 덕택에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던 이동 스킬들의 레벨이 크게 올랐다. 조만간 마스터 레벨에 도달하지 않을까.
“헉헉…”
뒤에서 헉헉거리는 여신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감히 전력 질주는 제대로 따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요즘은 신도가 늘어난 덕분인지 제법 잘 따라오고 있다. 마침 이동스킬들이 30레벨을 돌파했기 때문에 자신의 스킬들을 가르쳐 줄까도 싶었지만, 아쉽게도 여신은 그들과는 능력 체계가 다른 것인지 스킬 습득이 불가능했다.
하긴 여신이라면 스킬이 아니라 스킬 시스템을 만드는 쪽이어야 맞겠지만.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굽이치듯 휘어지는 통로 너머로부터 새로운 적의 기척이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자 형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확 하고 피어오른다. 검은 촉수와도 같은 이 힘의 정체는 바로 미엘과의 계약을 통해 빌린 힘이다.
아직 조건이 부족한 것인지 그녀처럼 분신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의 활용은 불가능했지만, 형진이 지닌 높은 손재주 능력치 때문인지 제법 섬세한 조작이 가능했다. 손가락만 구현해 낼 수 있어도 정말 손이 열 개 늘어난 것 같은 효과를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당장 가능한 것은 단검 대용으로 활용해 인스턴트 킬을 사용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이걸 과연 고작이라고 표현해도 좋은 것일까.
이론적으로는 손에 쥔 단검 까지 포함해서 동시에 열한 군데의 목표를 공격해 인스턴트 킬을 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기 기술이 되겠지만, 불행히도 그건 인간으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 없다.
천 단위의 사람과 동시에 대화하는 수준의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여신이라면 몰라도 형진으로서는 그렇게 동시에 다른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라이언하트의 힘을 빌린다 해도.
다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시간차 공격으로 주의를 옮기면서 서로 다른 목표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인 건 마찬가지. 현재의 형진으로서도 최대 세 개의 목표물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격력은 물론이고 사냥 속도까지 확연하게 올라갔다. 특히나 꼬리를 이용한 이 공격은 단검보다 월등한 공격 거리를 자랑한다. 물론 공격 거리가 길다는 얘기는 그만큼 빗나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도 되지만.
“응?”
역시나 통로를 통과하는 순간 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뭔가 다르다. 방금 전 쓰러뜨렸던 파트반 같기는 한데, 입고 있는 장비가 확연하게 다르다. 단순히 더 좋은 장비를 입고 있다든가 그런 식의 차이가 아니다. 저건 명백하게 인간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다.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한 상황 파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곧바로 공격을 시작한다.
“히캭!”
놈들은 뒤늦게 형진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공중으로부터 폭격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꼬리들이 융단폭격처럼 내리 꽂힌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파트반이 인스턴트 킬 판정과 함께 쓰러지며 룻을 떨구었고, 나머지 녀석들도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내린 공격에 큰 부상을 입었다.
“히크략!”
커다란 도끼를 든 놈이 뭐라 소리를 지르다가 환영의 반딧불을 써서 뒤로 떨어져 내린 형진의 단검에 척추가 끊기며 그대로 엎어져 버린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몇 놈이 형진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방금 쓰러뜨린 놈을 방패삼아 그 공격을 막아낸 형진은 팔을 뻗어 갈고리를 발사해 화살을 쏜 놈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김과 동시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꼬리로 놈의 목을 단숨에 꿰뚫어 버렸다.
아무래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살아남은 몇 놈이 도망치려고 들었지만 놈들의 눈앞에는 어느 틈엔가 환영의 반딧불로 날아든 형진의 검은 그림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려 했지만 그것을 미처 제대로 들어올리기도 전에 마치 성게의 가시처럼 뻗어 나온 검은 촉수들이 놈들의 몸을 꿰뚫어 박제하듯 벽에 매달아 버리고 만다.
형진은 겁에 질린 채 발버둥치고 있는 놈들에게 다가가 단검으로 하나씩 천천히 숨통을 끊어 주었다. 어느 샌가 다른 파트반의 룻을 모두 챙긴 여신이 놈들에게서 떨어지는 룻을 받아 배낭에 담는다.
여신은 형진이 다시금 바로 뛰쳐나갈 것을 예상했는지 배낭을 고쳐 매며 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형진은 그런 여신의 예상과는 달리 파트반이 입고 있는 갑옷을 유심히 살폈다.
부서지고 깨진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분명히 인간이 사용하는 방어구가 맞았다. 물론 고급스런 물건은 아니다. 기사나 병사들이 사용하는 제식 방어구라기보다는 모험가들이 없는 살림에 장만한 뒤 두고두고 아껴서 사용하는 그런 손때 묻은 물건이다.
라야바르트 방면의 미궁은 이미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상황.
그렇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자면 이 부근에 다른 왕국의 병력이나 모험가들이 이미 접근해 있다는 뜻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미궁에 손을 뻗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생각대로라면, 이곳은 서브 코어와 함께 대미궁의 중심 코어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생각보다 빠른데. 뭔가 다른 수를 쓴 건가.”
형진은 냄새를 추적해 방금 쓰러뜨린 놈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두 무리 정도의 파트반들을 다시 쓰러뜨리고 난 형진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허…”
그것은 던전 한복판에 세워진 베이스캠프였다. 그것도 강력한 마법 결계로 보호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