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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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돌파
과연. 이런 방법이었나.
인력과 물자를 쏟아 붓기로 마음먹는다면, 이런 방법도 충분히 쓸 수 있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일정 거리 안에 결계로 보호되는 안전 지역을 만들어 놓고 계속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 형진이 쓰고 있는 서브 코어 확장도 결국은 이와 비슷한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인력과 거기에 소요되는 물자를 무한정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던전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에 의뢰를 통해 구할 수 있는 사념체를 섞어 서브 코어를 만든 다음 그걸 베이스 캠프 대신 설치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계 자체는 미엘 수준의 강력한 결계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다만 그런 마법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던전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 댓가가 필요하고,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베이스 캠프를 지킬 인원과 그들이 소모할 물자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인원들 또 계속해서 투입해야만 한다.
처음 한두 개야 어렵지 않다 쳐도, 미궁에 만들어진 베이스 캠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는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궁이 일방통행식이라도 만만치 않을 텐데, 서브 코어가 뒤섞여 문자 그대로 미궁의 형태가 되어 버린다면 거의 갈림길마다 베이스 캠프를 만들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전진하다가 서브 코어를 장악하게 되면 다른 코어의 영향력이 가해지는 곳까지의 베이스 캠프는 철수하는 식으로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진이 대미궁을 지금까지 탐사한 바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비용을 줄인다 해도 결국은 새발에 피 정도 수준 밖에 되지 못한다. 대미궁이 괜히 대미궁이겠는가.
그래서 형진은 상대의 방식을 깨달은 순간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라야바르트나 다른 나라가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를 안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
어떻게 보면 형진이 희귀급 아이템을 새로운 서브 코어로 만들어 미궁 안에 뿌리는 것이 오히려 단순 비용으로 계산하면 더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희귀급 아이템의 가치를 액면 그대로 계산한다면. 하지만 형진은 인스턴트 킬이라는 수단을 통해 희귀급 아이템 정도는 얼마든지 즉시 수급이 가능하니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 아니다.
하지만 미친 짓 같아 보이는 이 짓거리가 의외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쪽 나라에서 사용하는 대미궁의 입구가 생각보다 가까운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빨리 대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실수다. 라야바르트 쪽에만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다른 나라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적어도 이것은 되돌리는 것이 가능한 실수니까.
형진은 여신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신님. 이리로.”
“네.”
여전히 토끼 귀를 머리에 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여신은 형진이 손을 뻗자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얼른 형진의 손에 내려않았다. 이래서야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게 애완 여신스러운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렇게 정신없이 몰아치면 여신 아니라 누구라도 꼼짝없이 형진의 마수에 걸릴 수밖에 없다.
형진은 일단 여신이 매고 있던 배낭을 벗겨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그녀를 주머니로 인도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주머니 안으로 여신의 모습이 감추어지자, 이내 환하게 밝혀졌던 던전 안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 버린다.
물론 주머니 속에서 고개를 빠꼼히 내밀고 있는 여신의 작은 머리로부터 여전히 은은한 후광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것도 검은 기운을 내뿜는 꼬리가 형진의 몸을 감싸는 순간 어둠 속에 묻혀 버린다.
이전까지는 심연의 눈가리개로 얼굴을 가리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신분을 감추는 일이 가능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그래서 찾은 새로운 방법이 바로 미엘과의 계약을 통해 얻은 힘인 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꼬리로 몸을 휘감으면 투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 안에 숨겨진 형진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에 대비해 그렇게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위장을 마치자, 형진은 그대로 천천히 결계가 쳐진 베이스캠프로 다가갔다. 그러자 안쪽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자기들끼리 뭐라 떠드는 소리가 전해진다.
“아, 심심해.”
“그러게.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이 말판 놀이도 이젠 지겹다. 너 노래나 하나 불러봐라.”
“이게 미쳤나. 내가 네놈 쫄따구인 줄 알아?”
“그러지 말고 하나 불러봐. 너 노래 잘한다고 소문 자자하더만.”
“누가 그래?”
“다들 그러던데?”
“어떻게 또 소문이 돌았나보네. 할 수 없지. 크흠. 그럼 한번 불러볼까.”
“병신. 띄워주니까 좋단다.”
“뭐?”
“응? 뭐가?”
“뭐라고 방금 그런 거 같은데.”
“바람 소리라도 잘못 들었나보지. 봐. 발자국 소리… 어라?”
“누구냐!”
자기들끼리 그렇게 주절대다가 뒤늦게서야 바작거리 소리를 내며 다가서는 형진의 걸음 소리를 알아차린 보초병들이 후다닥 캠프 입구로 나와 석궁을 겨눈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형진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설수록 보초병들의 안색은 시퍼렇게 질려가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형진은 어둠을 몸에 두른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니까.
“힉!”
“종을 울려!”
다급하게 종을 울렸다. 그것은 캠프 안에서 쉬고 있던 공략대를 깨우고 인접한 다른 캠프에 위급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것. 어찌 보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보초병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전부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 다가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쏜다! 누구냐!”
보초병 하나가 그렇게 위협을 했지만, 옆에서 종을 울리던 보초병이 그런 동료의 모습에 욕설을 내뱉는다.
“미친 새끼! 지금 수하할 때냐! 그냥 쏴!”
“아, 알았어.”
동료의 욕설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든 보초병은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와 동시에 뜨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장전되어 있던 석궁의 화살이 형진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어지간히 강한 몬스터라도 능히 가죽을 뚫고 들어가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닌 화살이었지만, 형진은 몸을 휘감고 있던 꼬리를 부채처럼 휘둘러 그 화살을 가볍게 튕겨내 버렸다.
퍽!
모처럼 쏘아낸 화살이 폭죽 터지듯 부서지며 바닥을 나뒹굴자 그렇지 않아도 시퍼렇게 질려있던 보초병의 얼굴은 마치 썰물 빠지듯이 핏기가 싹 가시고 만다.
“무슨 일이야!”
바로 그때, 캠프 안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공략대들이 급하게 장비를 챙기고는 캠프 입구로 몰려나왔다.
잘 훈련된 기사로 보이는 인물이 두 명, 트래커로 보이는 모험가 남녀가 한 쌍. 지친 표정의 병사 서너 명과, 긴 장포를 두른 마법사 하나. 공략대로서는 꽤 균형이 잡힌 구성이다. 회복을 담당할 사제나 폭력배가 끼면 더 완벽한 구성이 되겠지만, 그건 형진의 생각일 뿐이고 신의 추종자는 이런 식의 던전 탐험에 어지간해서는 끼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악마?”
“젠장.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마법사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그게… 잠시 시간을 벌어 주세요.”
“알겠… 크악!”
마법사의 말을 듣고 방패를 앞세운 채 나서던 기사가 순간 휘둘러진 꼬리의 묵직한 일격을 맞고는 뒤로 날아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공략대는 깨달았다. 눈앞의 이 존재는 자신들이 뭘 어떻게 해볼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캐스팅 시간이 긴 강력한 공격 마법을 준비하려던 마법사는 곧바로 다시 외쳤다.
“일단 물러나세요! 결계 안에서 버티면서 다른 캠프의 구원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략대들은 곧바로 기절해 버린 기사를 들쳐 업고 캠프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굳게 걸어 잠궜다. 자신들도 눈앞의 악마를 쓰러뜨리긴 어렵겠지만 버티고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애초에 이 캠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던가. 이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구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법사의 빠른 대처는 꽤 현명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얘기겠지만.
캠프 안의 공략대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안으로 도망쳐서 문을 걸어 잠그자, 형진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결계 앞에 섰다.
호오.
형진은 결계의 모습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런 쪽의 전문가인 미엘을 깨울까도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의 눈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결계의 약점 세 개가 또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결계를 푸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마치 자물쇠를 풀 듯이 그것을 이루는 복잡하고 정교한 술식을 풀어서 해제하는 방법. 또 하나는 결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으로 단숨에 깨부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결계는 상당히 강력하고 복잡해서 쉽게 해제하기 어려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제를 시도할 때의 이야기이다.
형진은 움직이는 약점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단검을 들더니 마치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듯 콕콕콕 세 번 허공을 찔렀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결계가 순식간에 깨져서 사라져 버린다.
“어? 어어?”
“겨, 결계가?”
“이게 도대체?”
철석같이 결계를 믿고 있던 공략대와 보초병들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깨져 버리는 결계의 모습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 결계가 무엇이던가. 그들의 나라인 파스파에서도 최고가는 결계의 권위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결계다. 힘으로 깨부수려면 설령 백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도 한 달은 두들겨야 될 거라고 자신하던 바로 그 결계가 아니던가. 그 결계가, 단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힘없이 무너져 내리다니!
“어쩌죠? 마법사님.”
장포를 걸친 마법사는 입술을 깨물고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준 채 얼핏 장렬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도망쳐!”
그리고 자신이 외친 바대로 줄행랑을 쳐버린다. 참으로 언행일치에 충실한 마법사가 아닐 수 없다.
“에엣!”
“자, 잠깐만!”
“같이 가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마법사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결단이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을 지닌, 파스파 최고의 전문가가 만든 결계를 한 호흡에 깨뜨려 버리는 악마를 상대로 몇 안 되는 공략대로 대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괜히 건드려서 화를 돋우기 보다는 그럴 기회가 있을 때 도망치는 것이 최선 아니겠는가!
마법사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공략대와 보초병들은 다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도 기절한 기사를 버리지 않은 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가는 것이 나름 기특하다.
형진은 텅 비어버린 베이스 캠프를 보며 피식 웃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머리핀 하나를 꺼낸 뒤 그것을 코어로 연성하고는 그 자리에 심었다.
구구구구구!
곧바로 코어가 땅속으로 파고들며 주위의 지형을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베이스 캠프는 순식간에 매몰되어 사라지고, 그 공간에는 전혀 다른 형태의 또 다른 던전이 들어섰다. 설령 도망친 자들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베이스 캠프를 다시 되찾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형진은 코어에 의해 밝혀진 주변의 지형을 살펴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앞 뒤로 연결된 두 개의 또 다른 베이스 캠프가 바로 눈에 들어온 탓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들어간 모양인데.”
입구 쪽으로 갈까, 아니면 중심 쪽으로 갈까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는 미궁의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신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든 것을 형진의 주머니 속에 숨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