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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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천벌
그렇게 기나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녹초가 되어 버린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날이 밝은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꿀맛 같은 단잠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내리 꽂힌 천둥소리와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 때문이었다.
“꾸엑!”
격렬했던 간밤의 일 때문에 지쳐 잠이 든 상태에서도, 집행자와 수호자라는 본분을 지닌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듣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번쩍 떴다.
“뭐지?”
“글쎄요.”
커다란 소리에 잠에서 깨긴 했어도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알아챈 것은 아니다. 그냥 잠에서 깰 정도의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 밖에는 알 수가 없다.
하마란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살짝 열었다. 오귀스트는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몸을 지그시 감상하면서, 여과없이 전해지는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어떡해. 진, 괜찮아요?”
“으으으…”
“유아님. 나도 좀.”
“이런! 미엘님까지! 괜찮으세요?”
“안 괜찮으니까 일단 회복 좀.”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진과 미엘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은 꼼짝 않고 이렇게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지내고 싶은데. 하지만 함께 동고동락하는 식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이대로 모른 척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귀스트는 옷을 입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의는 하마란이 찢어 버렸고 하의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마란은 괜히 딴청을 부리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옷을 챙겨 입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야수처럼 덤벼들더만, 아침이 되니까 영락없이 부끄럼 많은 새색시라 오귀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인벤토리에서 새옷을 꺼내 입었다.
“크흠. 그럼 나 먼저 나갈테니까…”
아무래도 대놓고 그녀의 집에서 아침에 나오는 모습을 보이긴 뭔가 겸연쩍은 탓에 그렇게 말했지만, 하마란은 그런 오귀스트를 살짝 노려보더니 도망치지 못한다는 듯이 그의 팔을 왈칵 껴안아 버렸다.
“안 돼요.”
“…”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주는 뭉클함이 팔에 전해지자, 문득 어젯밤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 오귀스트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하마란은 그가 시선을 피하자 손을 뻗어 강제로 고개를 돌리게 하더니 다시 못을 박듯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날 비밀스런 밤친구로 만들 셈이에요?”
“그럴 리가. 그냥… 좀 부끄럽달까.”
“뭐가요?”
“…”
당돌한 하마란의 말에 오귀스트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안. 내 실수야. 용서해 줄래?”
“말로만?”
“크흠. 그럼… 어떻게.”
“알면서.”
“…”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오귀스트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입을 맞추었다.
“이러면 될까?”
“네.”
아무래도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다시 침대로 뛰어들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 오귀스트는 하마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집을 나섰다.
둘이 집 밖으로 나가서 본 첫 번째 광경은 온 몸이 새카맣게 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모습. 그렇다. 바로 할이 처음 진의 저택에 왔을 때 공포와 죽음으로부터 천벌을 받았던 바로 그 때의 모습과 판박이다.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이라면 그렇다 쳐도 진이 이런 식으로 천벌을 받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떻게 된 거죠?”
둘은 제랄딘에게 다가가 그렇게 물었다. 이마를 짚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녀는 다정하게 서로를 안고 있는 둘의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른 척 이렇게 답했다.
“그게… 진이 좀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공포와 죽음께서 노하셔서.”
“네?”
“사실은 말이죠…”
제랄딘에게 전해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진은 파스파 왕국의 보물창고에서 거둬들인 보화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 아무리 집에 보물이 쌓여 있어도 쓰지 않으면 그저 좀 반짝이는 장식품에 불과하니 그것을 굴려 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큰 사업을 벌이려 한 것이다.
하기야 그의 성향이나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그의 발상은 엘 파르드의 권력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은행 체인을 만드는 것. 하지만 이것이 공포와 죽음의 노여움을 샀다.
다른 일들은 엘 파르드를 평안케 하라는 공포와 죽음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다.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을 통해 엘 파르드의 권력자들에게 쌀을 빌려주는 것이라든가, 신뢰와 헌신을 통해 채권 추심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닦아 놓는 일이라든가, 미궁을 장악해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다른 나라의 간섭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는 일까지도 전부 그런 일련의 큰 계획에 속한 작은 일들로 볼 수 있다.
보호와 균형 또한 데려다가 부려먹으라는 말이 있었으니 빨대를 꼽든 뭘 하든 그것 역시 공포와 죽음의 지시를 따르는 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파스파 왕국의 창고를 털고 그곳의 귀비를 납치해 아디슈에게 맡긴 일은 어떠한가. 물론 이것도 넓게 보면 대미궁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한 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턴 보화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려 하는 것에 있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공포와 죽음과는 관계없는 형진 개인을 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파스파 왕국의 일로 조금 언짢았던 공포와 죽음은 형진이 자신의 명령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을 벌이려 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할에게 그랬던 것처럼 천벌을 내린 것이다.
“끙… 이거 정말 죽여주게 짜릿하네.”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공포와 죽음께서 화가 나신 거에요?”
“그, 그게… 아하하하.”
그의 목에 감겨 단잠을 자고 있다가 엉겁결에 함께 천벌을 받은 꼴이 되어버린 미엘이 버럭 화를 내자 형진은 얼른 목을 감싸며 딴청을 부렸다.
다행히 유아가 바로 회복을 걸어준 덕분에 둘 다 몸에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미엘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아이를 낳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 있던 상황.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이번 일로 인해 유산이 되었을 테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 때문에 형진도 뭐라 변명조차 못한 채 절절 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행이 뭡니까?”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제랄딘이 형진에게 들은 내용을 주섬주섬 읊어대자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고리대금?”
물론 은행의 업무가 그것만은 아니지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말에 두 사람은 가장 먼저 고리대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따지고 금융이라는 말 자체도 금전을 융통해 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전혀 틀린 얘기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니 천벌을 내리지. 하라는 일은 안하고 명예롭지 못한 일을 하려 했으니 공포와 죽음께서 발끈하며 천벌을 내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나마 형진이 상당히 쓸만한 인재라서 천벌로 끝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벌이 내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탄내를 풀풀 풍기며 몸을 일으키던 형진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거든요! 고리대금 아니거든요? 은행을 고리대금에 비교하다니 이건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거라고요.”
“어떤 면에서요?”
“에… 그러니까…”
형진은 말을 하려다 말고 흘끔 하늘의 눈치를 살폈다. 할이 천벌을 받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것을 직접 두들겨 맞아 보니 그 화끈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당했다가는 지금도 도끼눈을 뜬 채 노려보고 있는 미엘에게 정말로 목을 물어 뜯길지도 모른다.
“크흠… 아닙니다. 그냥…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죠. 에효.”
다시 벼락을 맞기는 싫었는지 형진은 그렇게 꼬리를 말았다. 금융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자체가 이 모양이라면, 사실 현재로서는 이 일을 밀어붙여도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 희망과 생명을 앞세웠다가 괜히 이미지가 추락하기라도 하면 그것도 문제이고, 전 세계의 금전 출납을 하나로 통합해 관리할 시스템도 완성되어 있지 못하다. 파스파 왕국에서 거둬들인 보화의 양이 상당하기는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한 나라의 통화를 관리하는 체계를 만들기도 벅차다. 이래저래 지금은 일을 벌여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다.
하지만 역시 억울하다. 당장 그것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앞으로 이런 것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계획을 늘어놓은 것 뿐인데 그걸 가지고 벼락을 때려 버리다니.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있나.
투덜거리며 잠시 집으로 돌아가 탄내 나는 옷을 갈아입고 몸도 씻은 다음 멀쑥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형진은 여전히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오귀스트와 하마란에게 작은 케이크를 만들어 내밀었다.
“뭐… 급하게 준비하느라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두 분의 결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둘의 모습을 살피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놀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가만히 케이크에 꽃힌 촛불을 함께 끄는 것으로 둘의 결합을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렇게 조금 번잡스럽고 시끄러운 아침 시간이 지나자, 제랄딘은 아침에 벌어졌던 일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안건을 다시 형진에게 알렸다.
“엘 파르드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의 양이 완전히 파악되었어요.”
“그랬지. 어디… 후, 금액이 만만치 않군.”
이 세계는 넓다. 그래서 그리칸이나 엘 파르드처럼 겨울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곳이 있는가 하면, 막 수확이 끝나가는 곳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싼 값에 매입을 한다 쳐도, 하나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일개인이 충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 당연히 필요로 하는 금액도 눈이 돌아갈 정도의 거금일 수밖에 없다.
“수매는 이 신전들이 나서서 하기로 한 건가.”
“네.”
“알았어. 바로 시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형진의 결재가 떨어지자 곧바로 식량 수매가 시작되었다. 곧바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식량이 요정들을 통해 엘 파르드의 희망과 생명 신전에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바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라야바르트와 파스파를 비롯한 국가들이 대미궁의 장악하는 일에 큰 성과를 보이자 타국의 침공을 우려해 긴장한 모습으로 힘을 합치고 있던 각 세력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대미궁의 악마로 인해 그러한 각국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다시 희망과 생명 신전을 통해 막대한 양의 식량이 공급되자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채 분열로 치달았다.
마침내 식량 공급이 시작된지 보름이 지났을 때, 겨우내 잠잠하던 엘 파르드의 내전은 어느 작은 영지들 간의 전투를 시작으로 활화산처럼 격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 참. 내가 꾸민 일이긴 하지만, 봄이 오기도 전에 이렇게 바로 시작하는 걸 보니 참 뭐같긴 하군.”
어떻게 보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금이 오히려 적기일 수도 있었다. 아직 날씨가 춥기는 하지만, 일단 대지를 뒤덮었던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대규모 군사 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된다.
게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땅이 단단하게 굳었을 무렵에는 이미 농번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이 훌떡 가버리고 모처럼 희망과 생명의 신전으로부터 지원받은 물자 역시 대부분 까먹어 버린 뒤가 되어 버린다.
물론 막바지 추위가 몰아치는 이 겨울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도 별로 좋은 선택은 못 되지만, 마음 급한 권력자들은 결국 들썩이던 엉덩이를 가누지 못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급격하게 군사행동을 일으키게 되면, 물자가 소모되는 속도가 그만큼 빨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 결국 희망과 생명의 신전으로부터 빌린 물자를 다 까먹게 되면, 그 다음에 그들의 시선이 향할 곳은 당연히 힘없고 약한 자들의 호주머니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에요.”
“뭐가?”
“자칫 미친 척하고 신전을 노리는 자라도 나타난다면…”
그 말에 형진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그걸 걱정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럼요?”
제랄딘의 물음에 형진은 눈을 빛내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건 기대라고 표현해야 옳은 거야.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굳이 변제 기한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바로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줄테니까.”
“…”
하긴.
이 남자가 느긋하게 변제 기한까지 기다리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말이 씨가 되었던 것일까.
마침내 제랄딘에게는 걱정스러운, 그리고 형진에게는 기대 되는 일이 엘 파르드의 한 신전에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