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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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면접
수빈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이 남자는 초식 연합 자체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건 차라리 문전 박대를 당한 것보다도 못한 결과다. 이래서야 일부러 찾아와서 제안을 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결국 수빈은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가서… 제안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다. 처음부터 그녀에겐 결정권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초식 연합의 의견을 전하고 상대의 답을 받아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편한대로.”
수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터덜터덜 길드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토끼들이 우글거리는 정원을 지나고, 다시 턱시도에 선글라스를 낀 토끼가 지키고 있는 입구를 빠져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만 하고 있었다
“하아아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깊게 한숨을 몰아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정도 길드 하우스에서 멀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감시자들이 다가와 말을 건다.
“어떻게 됐습니까.”
“후우우…”
수빈은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실 처음부터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기에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내 그녀에게서 멀어져 간다.
“미치겠네.”
걍 게임이고 뭐고 관둘까. 스트레스를 풀려고 게임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정말 더 이상 게임을 계속해야 하나 싶은 생각만 들뿐이다.
그렇게 답답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 있는 버프 아이콘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어?”
순간 뭔가 잘못 본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버프 효과를 뜻하는 아이콘이 그녀의 시야 한쪽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그녀가 저 길드 하우스에 들어가 입에 댄 것은 차 한 모금이 고작이었다. 요리 하나로 구현할 수 있는 버프 효과는 모두 세 가지. 장인이든 명장이든 달인이든 그건 변함이 없다. 그런데 다섯 가지라니?
명색이 요리사 길드의 마스터인지라, 그녀 역시 요리는 이미 장인을 찍은 상태이고, 명장을 찍기 위해 조만간 열릴 제국 요리 토너먼트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이 게임에서 요리라고 불리는 컨텐츠에 대해서는 그녀 이상 가는 실력자는 손에 꼽을 정도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그녀조차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하나의 요리로 다섯 가지 버프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방금 전까지 흐느적거리며 걷던 그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빠른 동작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저편에 보이는 길드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알고 싶다.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도대체 자신이 모르는 어떤 비법이 이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인지!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입구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곳을 지키고 있는 토끼들이 곧바로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녀는 그곳의 길드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 그 분은요?”
“갔어.”
형진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신이 나서 자신이 오늘 봤던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카트린이 바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형진은 화덕으로 다가가 냄비를 집어 들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곧 돌아오게 될 거야.”
“와앗! 오빠가 또 악당 흉내 낸다!”
“무슨 소리야. 악당 흉내라니!”
“그럼 아니에요?”
“당연하지. 난 흉내 따위를 내는게 아니야. 그냥 악당일 뿐이라고.”
“뭐야 그게. 아하하하!”
카트린에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너스레를 떠는 형진의 모습에 크루그는 속으로 피식 웃어 버렸다. 또다시 불쌍한 영혼 하나가 이 사악한 요리사의 도마 위에 올라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하기야 크루그로서는 딱히 상관 없는 일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여동생인 카트린에게만 향하고 있으니까.
한편, 자신이 그렇게 식탁 앞의 얘깃거리가 되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수빈은 곧바로 초식 연합의 회의실로 돌아가 자신이 들었던 얘기를 가감 없이 전했다.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쳇. 망할 육식 놈들.”
애초에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초식 연합의 수뇌부들은 그녀가 전한 형진의 말을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인식하고는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기존의 육식 길드도 감당 못하던 그들이, 혜성처럼 등장한 이 새로운 강자에게 대항할 방법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수빈은 피곤하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물론 이미 자기들끼리 갑론을박을 시작한 초식 연합의 수뇌부들의 입에서는 잘 가라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부터 수빈이나 그녀의 길드는 이들에게 그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다.
수빈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벤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앉았다.
아직도 그녀의 눈앞에는 다섯 개의 버프 아이콘이 떠있었다.
틀림없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남자. 틀림없이 요리를 익혔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방 안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둘이만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만들어진 차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대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을 곰곰이 되짚은 수빈은 자신이 마셨던 차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남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했다.
설마, 명장? 아니면 달인?
명장은 그렇다 쳐도, 달인의 경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미 명장을 달성했던 이에게서 더 이상 버프 효과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그 위의 달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뿐.
명장 이후에는 확률적으로 같은 종류의 버프가 중첩될 수 있다. 혹시 그것이 단서는 아닐까.
“으음…”
고민을 해봐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잠깐 고민해서 나올 만한 답이라면, 이미 그녀가 발견해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나.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길챗이 활성화되며 귀여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언니. 스푼 언니. 있어? 생존중?] [어, 살아있어.] [와… 타르타르인지 뭔지 하는 길드 찾아갔다길래 큰일 났다 싶었는데, 용케 살아서 돌아왔네.] [말하는 거 하곤. 그래, 살아 돌아와서 불만이니?] [에이, 언니. 내 맘 알면서.] [몰라. 기지배야.]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그제서야 슬금슬금 침묵하고 있던 다른 길드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역시… 잘 안 된 겁니까?] [네, 뭐…] [후우… 곤란하군요. 정말.]지금은 비록 인원이 십여명 정도로 쪼그라들었지만, 예전엔 엘리시온 최대의 요리사 길드 중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다. 길드 하우스를 장만할 때까지만 해도 떵떵거리며 잘 나갔었지만, 그 망할 거점전이 업데이트 되면서 한없이 쪼그라들어 지금이 이르렀다. 그나마 말석이라도 초식 연합 수뇌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때의 명성 때문이다. 그래봐야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거점전 사태가 벌어졌을 때, 처음에는 그래도 좀 버텼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이 한주 두주 지나고 다시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길드를 벗어나거나 엘리시온 자체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이제 십여명. 하지만 그 숫자 역시 반 정도는 이제 접속을 하지 않는 인원들이다.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수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실은…]그녀는 오늘 타나토노트10 길드에서 들었던 내용을 간단하게 길원들에게 설명했고, 가만히 그 얘기를 듣고 있던 길원 중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
[길마.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혹시…] [언니. 농담이지? 요리 길드도 아닌 육식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래?]그 말대로다. 지금까지 초식 길드에 있다가 육식 길드로 전향한 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길드 레벨을 올리기 위한 퀘스트 노예로 전락했고, 그렇게 착취당하다가 결국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게임을 접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초식 연합의 수뇌부들이 형진의 말을 최후통첩이나 선전 포고로 받아들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빈은 다른 이들이 모르는 사실을 한 가지 더 알고 있었다.
[실은 초식 연합의 길마들에게 전하지 않은 얘기가 한 가지 더 있어요.] [그게 뭔데? 언니.] [어쩌면… 타나토노트10의 길마는 요리 달인일지도 몰라요.]순간 길챗이 멈췄다. 마치 시간 자체가 멈추어 버린 것처럼.
하지만 약 십??정도가 흘렀을 때, 길원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정말입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요리 달인이라니? 정말 그 경지에 오른 유저가 있다고요?] [근거는? 그렇게 생각했다면 증거가 있겠죠?] [언니! 농담이지? 진짜야? 농담 아니고?]수빈은 흥분한 길원들이 잠시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니에요. 다만… 그쪽의 길마가 직접 탄 차를 마시는 순간 저에게 다섯 개의 버프가 들어왔어요.]그녀의 말이 전해진 순간 다시 한번 길챗은 침묵에 잠겼다.
[다, 다섯 개.] [말도 안 돼.] [혹시… 다른 것을 곁들여 먹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고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으음…]명색이 요리 길드의 길원이다 보니 그들은 버프 다섯 개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수빈은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그게 뭐죠?] [다들 들어보셨을 거에요. 그 길드에는 경비병이 없다는 얘기.] [네, 뭐… 하지만 기만 전술 같은 거라고 다들 그러던데요.] [아니에요. 제가 직접 들어가서 봤어요. 그 길드는 정말로 길드 하우스에 경비병을 두지 않고 있어요. 대신, 토끼들이 있어요.]그러자 길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토끼요? 설마 그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 말입니까?] [네. 하지만 조금 달라요. 정확히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토끼 모양의 소환수라고 하는 편이 맞을 거에요.] [소환수요?] [사실 소환수인지 아닌지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요. 다만, 그 길드 하우스 안에, 적어도 수십 마리의 그런 토끼 소환수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는 건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길챗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소환수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소환사가 접속 중이어야 한다. 즉, 수십마리의 토끼들이 길드 하우스 안에 가득 차있었다는 얘기는 그것을 소환한 장본인들이 접속중이라는 얘기가 된다.
소환사는 보통 테이머로부터 승급하는 것이 보통이고, 테이머는 간단한 애완동물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환수에 이르는 갖가지 생물들을 조련하여 동료로 삼는, 일종의 생활직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다. 즉, 그 길드는 달인급 요리사로 추정되는 길마 외에도 수십명의 테이머들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길드원은 무한정 받을 수 없다. 하나의 길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길드원은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고, 때문에 해당 길드의 성격에 따라 길드원을 가려서 받을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친목 길드라면 몰라도, 육식 길드라면 길드 레벨을 올리기 위한 퀘스트 노예를 받는 게 아닌 이상 엄격하게 스펙을 가려 받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이 길드는 그런 일반적인 상식에서 명백하게 벗어나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어쩌면, 타나토노트10 길드의 근본은 초식일지도 몰라요.]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길마인 형진이 생산 계열의 장인을 두 개나 찍은 인물이니까 근본이 초식이라고 해도 무조건 틀리다고 볼 수만은 없다. 문제는 형진 외에는 그런 식으로 생산 계열에 발을 담근 이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겠지만.
[언니.] [응.] [마음을 굳힌 거야?] [맞아.]수빈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른 길원들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같은 결정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내일까지 길드에 남으실 분들은 말씀해 주세요. 저는 그 분들에게 길드 마스터의 자격을 넘기고 그곳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후… 알겠습니다.]그 대답을 끝으로 길챗은 다시 잠잠해졌고, 수빈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늘어지듯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