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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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마주치다.
이 세계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인격을 가지고 있고, 그 인격은 인간보다도 개성적이며 약점이라고 해야 할지 결점이라고 해야할지 미묘한 그런 부분들 또한 가지고 있다. 어지간한, 사회에 매몰되어 개성을 잃어버린 보통의 인간보다도 더 개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을 신으로 불리게 만든 신위에 대한 반대급부인지도 모른다.
허세와 망상은 그런 신들 가운데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단순히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정도. 하지만 그의 환상은 단순히 감각을 속이는 것을 넘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 그 자체를 속이는 수준이다. 그렇게 허세와 망상이 법칙을 비틀어 버리는 과정을 학문으로 정착시킨 것이 마법이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은 모두 그의 신도나 추종자라고 봐도 좋을 자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다른 모든 신이 그렇듯이 허세와 망상 역시 인격적인 결점 내지는 좋지 않은 면으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무책임.
대부분의 경우 그가 지닌 결점을 중2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형진 역시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쪽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가 최고위의 신임에도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결국 지금의 상황까지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무책임이다.
어떻게 보면 희망과 생명과도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둘은 유유상종 내지는 동족혐오 같은 느낌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품 안으로 들어온 자들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보듬어 안아주는 최소한의 모성애를 지닌 희망과 생명과는 달리, 허세와 망상은 일을 저질러 놓고 그 뒤의 결과를 신경 쓰지 않는 무책임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성격을 가졌다.
어찌 보면 그의 생각이나 행동이 허세나 망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바로 이래서인데, 막강한 환상의 능력으로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니 결국은 그 모든 것이 허세 또는 망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까지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유지시킬 수 있다면, 결국은 현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런 인격적 결함이 없이, 공포와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와 헌신 정도로만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신이었더라도 허세와 망상이 이렇게 추종자 하나 없이 다른 세계를 홀로 떠도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마법사들이나 요정만 자신의 품으로 챙겼어도 자신에게 부족한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사드를 타나토스에 보내는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이 노옴!]하지만 그렇게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신이라 할지라도, 최고위급의 능력을 가진 신인 건 틀림없는 일. 하긴 그런 신이었다면 이렇게 형진과 싸움을 벌이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후우우우우…”
형진은 다시금 숨을 깊게 폐부 밖으로 밀어내며 힘을 끌어 모으고는 그것을 흑요호의 형상을 통해 쏘아냈다.
콰아아아아!
그러자 거대한 빛의 파도가 형진을 향해 쇄도하는 허세와 망상을 향해 그대로 날아든다. 희망과 생명으로부터 거의 무한에 가깝게 전해지는 힘을, 흑요호의 형상을 통해 브레스 형태로 쏘아대는 이 공격은 그 자체로 전략 병기급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방금 전 허세와 망상의 은신처를 박살내고 버섯구름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공격이었다.
하지만 허세와 망상은 자신을 향해 거대한 빛의 파도가 날아들자 그것을 피하는 대신,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더니 거대한 빛의 파도가 마치 스스로 알아서 비켜나는 것처럼 허세와 망상을 지나쳐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네놈이 지닌 그 능력.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대하다만, 그것만으로 신을 상대할 수 있다 여긴다면 오산이다!] “아, 역시 그렇습니까.”형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하며 뒤로 스르르 물러나자 그 자리에 흑요호가 다가서며 달려드는 허세와 망상을 향해 꼬리를 휘두른다.
“흥!”
허세와 망상은 주먹을 뒤로 빼더니 그것을 힘주어 꾸욱 말아 쥐었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주먹의 형상이 나타나 흑요호의 꼬리와 맞부딪힌다.
쩡!
두 힘이 허공에서 충돌하자 마치 빙하가 깨지며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허공에 아로새겨진다.
과연 허세와 망상. 이쯤 되면 현실과 환상의 구분조차 불가능하다. 정말로 흑요호의 꼬리가 힘에 밀려 튕겨난 것인지, 그런 식으로 상대의 힘을 착각해서 스스로 튕겨난 것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죽어라!]허세와 망상은 거대한 빛의 검을 만들어 내더니 그것으로 단숨에 흑요호의 형상과 그 뒤에 버티고 선 형진을 갈라버리려는 듯이 맹렬하게 휘둘렀다.
“휘유!”
역시 허세와 망상. 바보는 큰 걸 좋아하는 법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하기야 환상이니까 저런 무지막지하게 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형진은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존재하고 있던 허공이 마치 늪지대처럼 그의 움직임을 구속하기 시작한다.
“이크.”
직접 신과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집행자로서의 능력만으로는 역시 힘에 부친다. 하지만 형진은 당황하지 않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을 막아냈다.
콰가가가가가가!
형진이 내민 무언가로부터 반투명한 막이 형성되며 허세와 망상이 내리친 거대한 검과 힘의 대결을 벌이기 시작한다. 보호와 균형의 성물에 있는 대로 힘을 밀어 넣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이건?]설마 인간 따위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줄은 미처 몰랐는지, 허세와 망상이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는 순간 흑요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즉발로 브레스가 발사된다.
[헉!]전력으로 형진을 향해 검을 찍어 누르고 있던 허세와 망상은 기겁하며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주위 공간을 왜곡시켜 브레스를 빗겨가게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정도다.
번쩍!
브레스는 어김없이 날아가 다시 한 번 지면과 격돌하며 거대한 버섯구름을 피워 올렸고, 뒤이어 굉음과 폭풍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형진의 공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쳇.”
형진은 강렬한 힘의 격돌을 견디지 못하고 뭉개지고 녹아버린 보호와 균형의 성물을 보고 혀를 차더니, 그것을 버리고 곧장 공세로 돌아섰다.
자신을 내리 찍던 거대한 검이 사라진 순간, 흑요호의 형상이 꼬리를 활짝 펼치더니 아홉 개의 분신을 일시에 만들어 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열 마리의 흑요호들은 충전 시간조차 필요없는 즉발의 브레스를 마치 기관포처럼 허세와 망상을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미, 미친!]허세와 망상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 말도 안 되는 화력에 문자 그대로 질려 버렸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신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사용할 수 있는 힘에 허용범위가 있게 마련이다. 신이 기적이나 권능은 바꿔 말하자면 신앙과 공헌도라는 재료를 연성해 인과율을 조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면, 처음 보호와 균형이나 다른 꼬맹이 여신들이 조난당해 섬에 도달했을 때처럼 요정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허세와 망상은 충분히 강대한 신이었지만, 그 강대함을 현실에 드러내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물론 보통의 경우 인간을 상대로 그런 식의 밑천을 드러낼 일이 생길 이유가 없지만, 지금 허세와 망상이 상대하고 있는 인간은 그런 상식을 단숨에 깨부술 만한 존재라는 것이 문제였다.
순식간에 주위 공간은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공격에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전략핵까지는 아니어도 전술핵은 충분히 되어 보이는 위력의 공격이 기관포처럼 쏟아지는 상황이란 건, 허세와 망상 같은 신조차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미친놈!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셈이냐!]허세와 망상이 발악처럼 그렇게 외치자, 형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지랄.”
[뭐?]
“그렇잖아. 당신이 언제부터 세상을 그렇게 애지중지했다고.”
[…]
“공포와 죽음께서 그런 말을 했으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그딴 소리를 지껄일 처지는 아니지 않아?”
사실 형진이 이렇게 마음껏 힘을 써대는 것은 나름 뒤탈이 없도록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 것 아니다. 얼마 전부터 황혼과 망각이 사용할 수 있게 된 황혼의 결계를 인근 지역에 넓게 펼쳐 두었을 뿐이니까. 이것은 단순한 방어막과는 달라서 경계 자체를 유리시키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이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파괴의 여파도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이야 좀 파헤쳐지겠지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네 이 노옴!]허세와 망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악하듯 자신의 힘을 전력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크!”
그러자 세상의 모습이 확 뒤바뀌어 버린다. 그렇게 일그러지고 뭉개진 세상이 형진을 향해 노호하며 달려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형진은 또다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형진을 찢어발길 것처럼 덤벼들던 세상이 또다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일정 공간 밖으로 밀려나 버린다.
[너… 그건…]형진은 망연하기까지 한 그 말을 듣고는 손에 쥐어진 망상 구현의 단장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아, 이거? 그러고 보니 이거 만든 게 그쪽이었지? 덕분에 잘 쓰고 있어. 고마워.”
[…]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물품이 적의 손에 쥐어져 자신의 권능을 막아내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보자 허세와 망상은 허탈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신이 직접 만들어낸 물건이라 그런지 앞서 뭉개져 버린 성물보다는 훨씬 힘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형진은 무리하지 않고 조심조심 자신을 보호하는 정도로만 망상구현의 단장을 운용했다.
그 태연한 모습에 허세와 망상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래서 계속해서 거세게 환상의 힘을 밀어 붙였지만, 형진은 휘파람을 불며 태연하게 그 모든 공격을 받아 넘기더니, 나중에는 인벤토리에서 침대를 꺼내놓고 쿨쿨 잠을 자는 시늉까지 해보인다.
[이, 이, 이, 이놈이!]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허세와 망상은 미친 듯이 환상의 힘을 밀어붙이자 손에 쥐어진 망상구현의 단장이 그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좀 더 밀어붙이면 형진을 보호하고 있는 망상구현의 단장 그 자체가 부서질 수도 있는 상황.
“아차.”
형진이 혀를 차는 순간 허세와 망상은 만면에 통쾌한 웃음을 지으며 힘을 있는대로 끌어올려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파츠츠츠츠…
기껏 끌어올렸던 힘이 마치 심지가 다한 촛불처럼 사그라 들어 버린다.
[어?]놀란 허세와 망상이 그렇게 얼빠진 소리를 내자, 형진은 비로소 꺼내 놓았던 공중 부양 침대를 다시 집어넣고는 양아치마냥 목을 양 옆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멍청하긴.”
[뭐라?]
“일부러 맞아준 것도 몰랐나?”
[이, 일부러?]
“그래. 어차피 네놈이 지닌 신앙이나 공헌도라고 해봐야 뻔하니까, 처음부터 그걸 소모시키는 것이 목표였거든.”
[헉?]
허세와 망상은 그제서야 자신이 터무니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형진은 그런 신의 모습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이지. 신을 워낙 자주 많이 가깝게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까, 약점도 잘 알게 되더라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역사에 인간에게 퇴치된 신 하나 쯤은 있어도 괜찮잖아. 모두에게 그런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멋진 신이 되어주길 바래.”
[큭…]
허세와 망상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미처 공간을 열어 몸을 피하기도 전에 형진의 모습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형진은 다급하게 뒤돌아 공간 너머로 넘어가려는 허세와 망상의 등짝에 가차없이 단검을 박아 넣었다.
[커헉!]허세와 망상의 아바타는 휘황찬란한 구슬 하나를 떨구고는 그대로 공간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얼핏 보면 도망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지만, 형진의 입가에는 진득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의 눈앞에 또렷하게 한줄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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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