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88
00588 133. 회견 =========================
문득 회견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카메라의 셔터가 멈추고, 노트북을 타이핑하던 기자들의 손가락도 멈추었다. 실황으로 회견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마치 생중계로 메두사의 얼굴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느 순간 나타나, 세상 모든 범죄자들의 악몽이 되어버린 그 존재.
죄를 지은 자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그 존재.
때문에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사고를 한 순간 멎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발언에 잠시 모든 이들의 사고와 행동이 우뚝 멈추어 버린 그 순간, 형진은 앞서 제랄딘과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옷을 입는 와중에 노닥거리며 커밍아웃 어쩌고 했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설마 신의 반열에 올라버린 탓에, 아무렇게나 농담처럼 던지던 말에도 언령 같은 것이 실려서 이런 식으로 현실화되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떠오를 정도다.
하지만 처음의 당황스러운 기분이 사라지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보면 어제 무어가 희망과 생명에게 던졌던 질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부정할 수 없는 정확한 증거를 찾은 상태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다른 언론사들이 한데 모인 기자 회견장에서 터트릴 이유가 없다. 물론 영세한 언론사나 프리랜서 기자라면 시청률이나 주목도를 고려해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CNL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이름 높은 언론사 가운데 하나다.
잠시 가만히 행동을 멈춘 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형진은 차분하게 반문했다.
“실례지만, 질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잠시 아무런 말도 없던 형진의 입에서 그와 같은 대답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CNL의 기자에게로 쏠렸다.
기자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앞서의 질문을 반복했다.
“말한 대로입니다. 당신과 죽음의 천사는 어떤 관계입니까. 제 질문은 그것입니다.”
“딱히 관계랄 것이 있겠습니까. 만나 본 적도 없는데.”
형진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되물었다.
“앞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셨다고 하셨죠. 도대체 뭘 발견하셨길래 이런 당황스러운 질문이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밝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기자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옆에 앉은 누군가와 뭔가 말을 나누고는 형진을 향해 답했다.
“저희는 어제의 일이 언론에 드러난 이후로 당신에게 주목했습니다. 뒤쪽에 자리하신 프리츠 베커씨에 이어, 미라지 코어의 경영진 가운데 언론의 전면에 나선 두 번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그 와중에 저희들은 당신이 쓰고 있는 눈가리개가 어떤지 눈에 익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가면이란 보통 사람들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고, 당신이 쓰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의도를 지닌 물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죠. 그래서 과거 저희가 수집했던 정보 가운데 유사한 형태를 지닌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한 사람이 포착되었습니다. 저희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란 바로, 해커가 엘리시온을 장악했을 당시 이벤트에 출현했던 죽음의 천사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가면이 동일한 물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거였나.
형진은 그제서야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죽음의 천사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 형진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몸 전체를 흑요호의 기운으로 감싸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게임에서 공포와 죽음에 의해 처음 보스로서의 일을 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다. 죽음의 천사로 분하기 전, 일반 유저를 가장하고 돌아다닐 때 심연의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는 것이다.
당시 이벤트에 참석했던 유저 가운데 해당 언론사의 기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일까. 용케도 그런 정보를 찾아냈다 싶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자신을 죽음의 천사로 몰아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엇보다도, 게임 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죽음의 천사와 현실의 그것이 동일 인물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 때문이었군요.”
형진은 자신이 쓰고 있는 심연의 눈가리개를 톡톡 건드려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눈가리개는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이런 문제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타나토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시겠지만, 현재 미라지 코어는 게임 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물품들을 현실화시키는 일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이 물품 역시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테면 포션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자신은 죽음의 천사와 관련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형진의 대답에 기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간단하게 몇 가지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잠시 봐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기자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커다란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심연의 눈가리개를 착용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이쪽은 어제 에스페란토양과 함께 파티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그리고 이쪽은 게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죽음의 천사가 변신하기 전 일반 유저 행세를 하고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
이제는 사진까지. 형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비록 게임 속의 사진은 억지로 확대를 한 탓인지 다소 해상도가 떨어졌지만, 누가 봐도 꽤 닮았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기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형진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 사진만 가지고 둘을 동일인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죠. 무엇보다도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눈을 통해 얼굴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금처럼 얼굴의 반을 가린 상태에서라면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어차피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스스로 그런 점을 지적하는 기자의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기자께서는 달리 두 사진이 동일인물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원래부터도 두 개의 사진을 놓고 동일 인물 여부를 판독하는 기술은 의외로 꽤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기술입니다. 저희는 이 기술을 응용하여, 가면으로 가려진 아래쪽의 얼굴 윤곽과 골격을 통해 동일인물인지 판별하는 프로그램을 모 대학 연구진의 협력을 통해 확보하였고, 그것을 사용한 결과 이 두 사진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9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90퍼센트.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탄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90퍼센트에 육박한다. 뭔가 말은 그럴 듯 했지만, 사실 이건 법리적인 증거로 삼을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보면 90퍼센트도 되지 않는 확률을 말장난으로 뻥튀기 시킨 것일 뿐이니까.
게다가 90퍼센트 확률로 동일인물이라는 얘기는, 바꿔 말하자면 10퍼센트 확률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 어제 파티에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부랴부랴 만들었다면 프로그램의 신뢰성을 확인할 시간조차 부족했을 터. 증거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신뢰성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자신을 죽음의 천사로 몰아붙이는 건 아무리 굴지의 언론사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이 기자는 자신이 잡은 특종을 굳이 이런 자리를 빌어 터트리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언론사의 이름을 걸고 발표하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고, 그냥 묻어버리자니 아까워서 질문의 형식으로 터트려 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사실 죽음의 천사와 미라지 코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이건 꽤나 위험하고 민감한 문제다. 정의를 집행하는 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죽음의 천사는 정당한 법적 권리 없이 범죄자를 임의로 처단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까발리는 행위는 자칫 죽음의 천사와 척을 지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질문을 던진 기자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형진은 훌륭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기자들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뒤에 나올 대답을 예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침묵과 정적의 나락 속에 빠진 회견장에서 혼자 박수를 치던 형진은, 모두의 이목이 자신을 향해 집중된 것을 즐기며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합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태에서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해오시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인정하시는 겁니까?”
형진은 두 말 할 것도 없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 두 사진의 인물은 모두 제가 맞습니다.”
“아!”
순간 회견장에서 다시 한 번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서 이 대담을 함께 듣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깜짝 놀랐다. 설마 형진이 이렇게 간단하게 인정해 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형진은 느긋하게 경악에 가득 찬 그 모든 시선을 가만히 받아들이다가 이내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죽음의 천사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네?”
한국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라던가. 물론 이 자리에 선 사람들 중에 그가 한국 출신이라는 걸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긴 하지만.
일생일대의 특종을 잡았다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기자는 물론이고, 마침내 죽음의 천사가 실체를 드러냈다는 생각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 또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기자가 제시한 두 사진의 인물은 자신이 맞다. 하지만, 죽음의 천사는 아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애초에 기자님의 질문은 전제가 잘못 되었습니다.”
“어떤 점이 말씀이십니까?”
“간단한 얘깁니다. 게임 속에 등장한 죽음의 천사와, 현실에서 활동하는 죽음의 천사가 동일인물이라는 전제가 어떻게 성립이 되는 겁니까?”
“그건…”
그렇다. 기자는 자신이 특종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한 가지 중요한 대전제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게임 속 이벤트에 등장한 죽음의 천사와 현실에서 활동하는 죽음의 천사가 동일 인물이라는 전제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기자가 제시한 의혹은 게임사의 인물이 게임 속 인물로 분장해서 이벤트를 진행한 것을 꼬투리 잡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전제를 증명하는 것은 사진 속의 두 인물이 동일 인물임을 판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뭐라 해도 현실 속에서 활동하는 죽음의 천사는 딱히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자 분 질문해 주십시오.”
죽음의 천사에 대한 것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다른 기자들과의 질답은 흐지부지 끝을 맺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길게 끌어갈 수도 있었던 여신과의 스캔들 건이 죽음의 천사 이슈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린 탓이다.
물론 개중에는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이벤트에 나타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 이도 있었지만, 회사 기밀이라는 말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휴… 아까는 정말 어떻게 되나 싶어서 깜짝 놀랐어요.”
“특히나 동일 인물이라고 인정하실 때는 가슴이 다 철렁 주저앉았습니다.”
제랄딘과 프리츠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형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증거가 더 있다고 그랬으면 어쩔 뻔 했어?”
그 말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상관 없습니다. 필요하면 전 얼마든지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으니까.”
“알리바이? 어떻게?”
“아바타가 있지 않습니까. 같은 인물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니까. 그런 식으로 간단한 쇼를 보여주면 끝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 방법이 있었네.”
여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형진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말이 어떤 일을 초래할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여신은 어떤 발칙한 계획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