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17
00617 140. 초래 =========================
과정이나 결과야 어찌 되었든, 사실상 안식과 동굴은 파괴와 재생 측의 모든 교통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작정 티폰 같은 녀석을 투입해서 전부 쓸어버리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의 권능을 통해 인원과 물자가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세력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집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모두 그녀가 관여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두 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이런 파국을 맞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형진은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안식과 동굴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그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당한 억울한 상황 같은 것을 설명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실 파괴와 재생이 나쁜 놈이라는 건 이전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충분히 인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제 와서 놈의 악행을 더 전해 듣는다고 그런 평가들이 바뀔 이유도 없다. 어쨌든 파괴와 재생은 이제 이 세상으로부터 구축되어야 할 악으로 완벽하게 낙인찍힌 상황이니까.
“지금 이 순간 놈에게 가장 확실하게 타격을 입히는 방법은, 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놈의 거점에 대한 정보를 밝히는 겁니다. 너무나 넓어서 정확히 어느 정도나 넓은 건지조차 알 수 없는 언데드의 영역 안에서, 거점의 위치만 특정할 수 있어도 그만큼 빠르게 놈의 팔과 다리를 잘라 버릴 수 있으니까요.”
안식과 동굴은 태연하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형진의 모습에서 작은 두려움과 동시에 작은 안도감마저 느꼈다. 적어도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상대가, 파괴와 재생이라는 강대한 신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하게 인식한 덕분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들은 문자나 도식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권능의 발현 자체도 성물을 통한 것이 아니라면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 지라.
확실히 권능은 그런 면이 좀 있다. 사실 형진도 언데드의 영역을 표현한 지도 같은 걸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적인 적의 세력을 파악하여 어떤 식으로 공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만이라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안식과 동굴이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라면, 파괴와 재생이 아무리 멍청해도 그녀의 성물을 자신의 진영에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다. 그것 자체가 바로 형진의 침입 경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근에 파편을 잃어야만 했던 상황이 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억이라. 그럼 심상의 형태로 전달한다든가 하는 건 불가능 합니까?”
-심상이라면…
“비슷한 종류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거든요. 당신이나 당신 추종들의 기억을 일부라도 넘겨 받을 수 있다면, 저 역시 그 기억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
안식과 동굴은 태연한 그의 말에 작게 놀라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느끼고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아직 이 남자가 지닌 신격은 하나뿐이다. 따돌렸는지, 해치웠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자신을 추격했던 티폰 같은 말도 안 되는 괴수를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든 처리하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당장 그녀가 느낀 것만으로도 몇 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신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와서 다시 떠오른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녀와 그녀의 추종자를 이곳으로 옮길 때 그러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추종자들이 권능을 빌려 쓸 때, 저에게 심상을 전달하는 것을 경험하기는 했어도 다른 신에게 그런 식으로 심상을 전달해 본 경험은 없는지라… 게다가, 지금 제가 이런 상황이기도 하고.
“흠…”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턱대고 다짜고짜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일을 시키는 것도 무리한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다른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씀이신지.
씩 웃으며 말하는 형진의 모습에 안식과 동굴은 작은 불안감을 느꼈다. 어쩐지, 이 남자의 입에서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까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밤의 종족들을 제외한 다른 제 추종자들은 조금 특별합니다. 본래는 밤의 영역에 속한, 반쯤은 언데드 상태인 존재들을 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네? 하지만, 그럴 리가…
주시자들이 조금 특별한 존재임은 안식과 동굴도 단숨에 인식했지만, 그들이 사실은 언데드의 영역에 걸쳐 있던 존재들이었다는 말에는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들에게서는 언데드의 힘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이유는 잘 모릅니다. 혹시나 해서 다른 신들도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한지 확인해 봤지만, 어림도 없더군요. 아마도 제 신격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실제로 형진은 오래된 자들을 복속시킨 뒤에 다른 신들에게도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몇 가지 방법으로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희망과 생명이나 공포와 죽음 같은 신들은 물론이고, 황혼과 망각처럼 경계를 오가는 권능을 지니는 신마저도 그와 같은 일은 불가능했다.
주시자들을 복속시킨 일이 밤이라는 신격을 얻기 이전의 일임을 고려하면, 아마도 형진이 지닌 힘의 속성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제가 하고자 하는 제안은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게서 언데드의 힘을 몰아내는 겁니다. 사실 저로서도 성공 가능성이 그리 높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여기서 이런 식으로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버티는 것을 넘어 엘리시온에서 그곳에 받아들여진 아이와 함께 회복을 할 수도 있겠죠.”
-그, 그게… 정말입니까?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떠나보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안식과 동굴은 크게 동요했다. 아이의 안위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긴 했어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가슴에 사무치고 있던 참이라 더욱 그러했다.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뭐라 해도 신에게 직접 시도해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성공한다면 당신은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고, 저는 그 파렴치한 미친놈을 단죄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로운 일이 되겠죠.”
물론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니다. 그의 힘이 안식과 동굴이라는 신에게서 언데드의 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는 의미는, 바꿔 말하자면 안식과 동굴이라는 신격을 이루고 그것이 발현되는 근간으로서 그의 힘이 자리 잡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안식과 동굴이라는 이름의 신이 사실상 형진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계약을 통해 다른 신들에게 빨대를 꽂는 식의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단순히 어떤 조건에 따라 그들의 권능이나 힘을 빌려 쓰는 것을 넘어, 안식과 동굴이라는 신격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과 동굴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채, 그가 흔들어 대는 미끼를 보며 갈등에 빠졌다.
비록 자신의 권능을 통해 고통을 억누르고 자연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엘리시온에 들어가는 것과 완전히 같은 효능을 갖는 건 아니다. 효능은 물론이고, 효율에 있어서도 엘리시온에서의 회복이 월등하게 좋은 건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니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떨리는 여신의 말에 형진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저는 단지, 이 방법이 지닌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나마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 드릴 뿐입니다.”
결코 높다고는 할 수 없는 가능성. 게다가 실패할 경우 그 여파 역시 안식과 동굴이 온전히 짊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녀는 떠나보냈던 아이와 함께 엘리시온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파괴와 재생에게 그의 힘을 빌어 복수도 할 수 있게 된다.
실패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당장의 안식과 동굴에게는 성공의 과실이 더 크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손만 뻗으면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만 그녀를 현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진은 더 이상 이런 저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눈앞에 먹음직스런 향기를 뿜어내는 미끼를 흔들어 보이기만 했다. 미끼를 보고 그것을 물지 말지 갈등하는 시점에서, 이미 이 여신은 그의 먹이감이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조용히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결국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민을 거듭하던 여신은 마침내 형진에게 이렇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해볼게요. 만의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형진은 그제서야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힘으로 강요하고 억눌러도 쉽지 않을 일이 이렇게 성사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파괴와 재생이 노리고 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뜻을 강제하며 거칠게 몰아쳤던 놈의 행동에 대한 반발 때문에 더욱 그녀가 쉽게 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했던 태양과 바람의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어쩌면 먼저 바람이 몰아치며 추위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후에 내리쬐던 햇빛을 더 뜨겁게 느끼며 그토록 쉽게 옷을 벗었던 것은 아닐까.
안식과 동굴의 허락을 얻은 형진은 자신과 관계된 신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뭐? 그게 정말이야?”
“물론.”
“그게… 가능할까?”
“몰라.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해볼 필요는 있다고 봐.”
“음…”
이것은 어찌 보면 단순히 안식과 동굴이라는 이름의 여신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신격 자체가 그런 종류이고 추종자들이 그쪽에 있는 이상 그와 관련된 누군가가 언데드의 힘에 오염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특히나 나중에 마눌이나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반신이 된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언데드의 힘에 오염되거나 하는 상황이 생겼다면? 그런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이번 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같은 생각에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공포와 죽음 역시 동의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형진 스스로가 보유한 공헌도의 양도 만만치 않았지만, 상대는 언데드의 힘에 의해 타락했던 신이니 당장 그의 주위에 있는 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두 여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마침내 필요한 공헌도와 신앙을 수급하기 위한 교섭이 끝나자, 형진은 라이언하트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상태로 안식과 동굴이 웅크리고 있는 알껍질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안식과 동굴의 대답이 들려온 순간, 알껍질에 얹은 그의 손을 통해 웅혼한 신의 힘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흐윽!
이질적인 힘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안식과 동굴은 짤막한 비명을 터트렸다. 하지만 형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곧장 알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몸 안으로 진입시켰다.
-으으으… 흐으윽…
듣기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야릇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음성. 안식과 동굴 스스로도 놀라 입술을 깨문 채 소리나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아보려 애썼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굳이 참으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어차피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장소. 당신이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을 쳐도 저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할 테니까.”
-크윽… 아아악!
형진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을까. 안식과 비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명이 커질수록 형진의 얼굴 역시 땀방울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 일은 오래된 자들의 몸에서 언데드의 힘을 밀어내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소요되는 힘의 크기도, 그것을 조율하는 일도 실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상했던 대로 안식과 동굴이 완전히 언데드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형진이 이런 식의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나름대로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언데드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면, 그녀가 낳은 아이가 그토록 순수한 신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을 리가 없다. 형진이 이번 일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이의 존재였던 것이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형진은 끈질기게 여신의 몸 안에 신의 힘을 밀어내고 그것을 통해 언데드의 힘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안식과 동굴은 실로 뼈를 부수고 살이 절여지는 듯한 고통에 흐느끼고 통곡하며 아우성치다가 나중에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아이를 낳은 뒤 신격에 타격을 입었을 때 느꼈던 고통이 더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 할까.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자 그 고통은 천천히 사라지고, 그 대신 너무나 오래 전에 느꼈던 탓에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어떤 감각이 서서히 몸 안에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으으으으…
끈질기게 항거하던 언데드의 힘들은, 마치 검은 신기루처럼 알껍질 위에 피어오르다가 이내 파란 불꽃으로 타들어 가며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느 시점이 되자 그 불꽃은 맹렬한 화산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맹렬한 불꽃이 한풀 꺾이기 시작하자, 여신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알껍질이 서서히 순백의 그것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다.
형진의 이마에서 다시금 땀이 한 방울 주륵 흘러내린다. 뺨을 타고 내린 땀방울이 턱으로 내려가 가볍게 흔들리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지는 순간, 마침내 형진은 자신이 이 놀라운 일을 마침내 완전하게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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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