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19
00719 162. 스타트업 =========================
형진의 말에 신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그건 그의 말에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제안에 넋이 나가 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종족들을 찾아가 그들을 대상으로 유일무이한 신으로서 군림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인가!
게다가 무작정 빈손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전 건립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지분은 확실하게 챙겨가겠지만, 그동안 일해서 모은 얼마 안되는 공헌도만 가지고 시작을 하느니, 그런 식으로 투자를 받아서 확실하게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몇 배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신도들의 입장에서도, 제대로 권세를 발현하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신보다는 그럴 듯한 신전을 갖추고 강력한 권능을 베풀어주는 신을 선호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빨과 말뚝의 떨리는 말에 형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몇 가지 조건에만 동의해 주시면 말이죠.”
“그게 무슨 조건입니까.”
다급하게 되묻자 형진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 새로 설립되는 교단의 지분 가운데 반은 초기 투자비용을 감안해 저희가 가지게 됩니다. 또한 개척 교단의 설립은 최소 둘 이상의 신이 함께 진행해야만 합니다. 이 조건에 동의하신다면, 저희는 여러분이 새로운 세계에 교단을 설립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저희라는 말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잡신들은 그런 것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형진이 건 조건에 대해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교단의 지분을 반 가져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니만큼 이 부분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만에 하나 자신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경우,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형진이 교단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
둘 이상의 신이 합작을 해야만 한다는 단서 조항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상의 유일신이라는 말의 어감은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한 편으로 독단과 독선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합작은 그들에게 좋은 경쟁자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형진이 제안한 두 가지 조건은 투자에 있어 기본적인 안전을 담보하는 조항인 셈이다. 그로서도 땅 파서 공헌도를 얻는 것이 아닌 이상, 만약의 경우 입게될 손실을 대비할 안전장치 정도는 갖출 필요가 있다.
이제 잡신들에게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졌다.
기존에 다른 신들이 발판을 마련해 놓은 세계에서 한 자리를 얻어 편안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신라이프를 즐기는 대신, 그저 그런 잡신으로서의 지위를 그냥 이어가느냐. 아니면, 리스크를 각오하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 단숨에 대신으로 올라설 기회를 잡느냐.
편하고 안정적인,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기존의 대신들에게 뒤지지 않을 강대한 힘을 지닌 신이 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기존의 대신들에게 업혀 가더라도 대신들의 권세가 커지는 만큼 그들의 권세 역시 커지게 마련이니 무작정 보잘 것 없는 신이 될 거라고 확정 지을 필요도 없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교단을 개척하는 일도,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대신은커녕 커다란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형진은 고민에 빠진 신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겸사겸사 오늘부터 휴가를 드리도록 할 테니 편안하게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언제든 상담에도 응할 테니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럼, 바쁜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진이 요안나와 제랄딘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버리자, 허세와 망상이 투덜거리면서 아유무와 함께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에게 교단을 이끄는 자질이 없음을 지난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투덜거리며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형진, 그리고 허세와 망상이 자리를 비우자 잡신들은 그제서야 연회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 가깝게 지내던 이들끼리 모여, 형진의 제안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뱀과 깃털은 소외되어 있었다. 가까이 지내는 이 자체가 없는 그녀로서는 최소 둘 이상의 신에 의한 합작을 전제하는 형진의 조건 자체가 너무나 가혹했다.
“후…”
결국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더 기다려 봐야 자신의 처지만 더 비참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별궁으로 가서 모처럼의 휴가를 즐길까도 생각했다. 형진은 자신과 계약한 연습생들이 휴가 중에 별궁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별궁을 찾아갔다가 다른 이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의 개척 교단 설립에 함께할 이조차 없어서 혼자 별궁을 찾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가 본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것도 싫다. 이런 와중에 숙소에 혼자 처박혀 있다가는, 정말 고독에 미쳐 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 먹었던 생맥주가 떠올랐다. 마지막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생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는 좀 그랬지만, 두툼한 소시지 역시 꽤나 맛있었다.
그래. 술이다. 술이라도 마시면 이 울적한 기분이 좀 더 나아지리라. 아니, 오히려 우울함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식으로는 마음속에서 뭉글거리며 피어오르는 이 어두운 감정들을 발산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생맥주 큰 거 하나랑, 소시지 모듬 안주 하나요.”
“생맥주 큰 거랑, 소시지 모듬 안주. 주문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혼자 찾아온 그녀의 모습에 펍의 주인은 내색 없이 기계적으로 주문을 받았다. 차라리 이게 편하다. 괜히 아는 척 친한 척 해봐야 지금의 그녀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맛있다. 생맥주는 물론이고 소시지 역시 아주 맛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술도 안주도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데, 뭔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진다.
고작 단 한 번 술자리를 같이 한 것 뿐인데,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인가. 맙소사.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는 술과 안주를 먹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울분을 쏟아낼 수 있는 누군가가 그리워서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아 버렸다.
“후…”
갑자기 술도 안주도 맛이 없어지고 말았다. 정확히는, 입맛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두커니 술잔을 손에 쥔 채 바라보기만 하는데, 문득 누군가가 다가와 앞에 앉는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바로 우산과 구유였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 남자라면, 친구와 함께 새로 만들어갈 교단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어째서…”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우산과 구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한 잔 하고 싶어져서 왔지.”
“하지만… 반지와 거울은?”
“그게…”
우산과 구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답했다.
“녀석은 그런 식으로 모험을 하는 것이 싫대. 안정이 최고라나. 덕분에 대판 말다툼을 하고 왔지 뭐야.”
“아…”
친구라고 해서 가치관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경우에는 우산과 구유, 그리고 반지와 거울이 그런 형국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요.”
‘네.“
“생맥주 큰 거 하나랑, 스테이크 레어로.”
“생맥주 큰 거, 스테이크 레어. 주문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은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주문에 응했다. 공연히 두 남녀를 흘긋거린다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든가 하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과 깃털은 어쩐지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휴. 그나저나 큰일이야. 이래서는 개척 교단으로 나설 수가 없으니까. 어디 적당히 노는 신 하나 없나 몰라.”
“…”
나름대로 능청스럽게 말을 꺼낸다고는 했는데, 속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인다. 모두들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 혼자 따로 떨어져 나와 술을 마시고 있으니, 합작할 이가 없을 것은 분명한 일. 반지와 거울이 합작을 거부하는 바람에 난감해진 상황이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개척 교단을 만들고 싶어?”
“물론!”
우산과 구유는 잘 말해 주었다는 듯이 열띤 표정으로 바로 답했다.
“일전에 견고와 인내가 우승했을 때, 난 정말 그 녀석이 부러웠어. 그래서 나도 언젠가 저 녀석처럼 하고 말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지. 그런데 마침 적당한 기회가 왔어.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으로.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랬구나.”
뱀과 깃털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술잔을 기울이자, 우산과 구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힘을 합쳐 보지 않을래?”
“내가?”
“그래. 귀찮으면 그냥 이름만 빌려줘도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론 지분도 확실히 나눠줄게. 어때. 생각 없어?”
“…”
나름대로는 최대한 좋은 조건을 맞춰주려고 그러는 모양이었지만, 뱀과 깃털은 다시금 울적해지고 말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 따위 이름을 제외하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생각이 없어.”
“뭐? 하지만…”
“미안. 난 그만 일어나 볼게.”
뱀과 깃털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일어났다. 그제서야 우산과 구유는 자신의 말이 뭔가 그녀의 역린을 건드려버렸다는 것을 이해했다.
“잠깐만.”
허겁지겁 아직 먹지도 않은 술과 요리의 값을 치르고 나와 그녀의 뒤를 따른다.
“왜?”
“내가… 뭔가 기분 나쁘게 한 거라도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여기서 어 그래 하고 넘어가 버렸다면, 그들의 관계는 여기서 그대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산과 구유는 생각보다 훨씬 오지랖이 넓은 신이었다.
“아냐. 뭔가 내가 잘못 말한 것이 분명해. 그러니 사과할게. 그러니까 기분 풀어. 응?”
“…”
뱀과 깃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우산과 구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저 자격지심 때문에 그를 피하려고 한 것일 뿐. 그런데도 그는 사과를 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바보다. 이 남자는.
하지만, 그래서 기대고 싶어진다.
“난 지금부터 집에 갈 생각이야. 할 말이 있다면 따라와도 좋아. 라면 정도는 끓여줄 수 있으니까.”
“…”
우산과 구유는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뱀과 깃털은 바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흐음. 의외의 커플링인데.”
“좋구만 뭐. 풋풋하고.”
“저런 게 좋아?”
“당연하지. 일단 엎어놓고 힘부터 쓰는 누구보다야.”
희망과 생명의 말에 옆에서 가만히 차를 따르고 있던 보호와 균형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뭘 연상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게 네가 말한 떡밥이야?”
“맞아.”
그러자 공포와 죽음이 조용히 말했다.
“성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텐데, 괜찮겠어?”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감안해야지.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그거면 충분하기도 하고.”
그 말대로였다. 개척 교단에 대한 내용은 순식간에 엘리시온의 신들에게 퍼져 가기 시작했다. 그냥 공헌도만 조금 얻어도 감지덕지인 신들에게 있어 대신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곧바로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그동안 연습생으로서 열심히 일해주신 여러분의 노고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기획한 일입니다. 그간의 성실함을 통해 투자를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같은 조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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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