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11
00811 186. 대화 =========================
두 황녀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이들은 이번에 파견된 사절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파견된 이유가 실무에 능해서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애초에 이들을 파견한 황실에서는 결혼해서 어딘가로 가버리면 끝인 황녀들에게 실무를 맡길 생각 자체가 없었고, 그녀들 스스로 그런 식의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물론 양 제국의 황실에서도 이런 상황은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 괜히 이런 저런 수행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온 것이 아니다. 황녀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상황에 충분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좌하라 수행원들을 충분하게 챙겨 보낸 것이다.
하지만 모처럼 챙겨 보낸 수행원들은 입구에서 밤의 권능에 의해 발이 묶여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뭔가를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지, 그녀들로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뭔가…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우로스 제국의 황녀 시스란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혹시라도 밤의 신과 일대일로 대면할 경우를 상정해서 제국측이 원하는 바와 그들이 들어줄 수 있는 범위를 조금은 들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레아 제국의 황녀 이노는 그저 입술을 깨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제국 측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는 상황이라도 초래하게 되면, 아무리 황녀라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라.”
형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듣자 하니, 이 도시의 정세가 그리 평안하지는 않은 모양이더군. 따지고 보면 이번에 있었던 소란의 원인도 결국 그것이고.”
“…”
시스란은 물론이고 이노 역시 움찔하고 말았다.
세계 최대의 상업 도시이며 동서 제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실로 화수분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는 도시, 카살 제르토나에 대한 것은 그녀들이 함부로 결정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밤의 신이라는 존재의 힘을 빌어 종주권을 확립 받고자 하는 쪽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곳이 좀 더 자유롭고 활기찬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 어떻게 생각하나.”
자유롭고 활기찬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양 제국에게 이 도시로부터 손을 떼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물론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양 제국에게 카살 제르토나라는 이름의 화수분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쨌든 외교란 주고받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쪽에서 받는 것이 밤의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용서뿐이라니. 물론 그것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의 약속을 하고 돌아가 버리면 황녀들의 정치적인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대답이 없지?”
“그, 그것이…”
즈라탈처럼 살기를 퍼트린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를 뿐이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밤의 신은 더욱더 노여워 하게 될 테니까.
실수다. 황녀들은 그제서야 핑크빛 꿈에 젖어 밤의 신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저희들은…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곧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지만, 형진은 턱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이번 만남이 이렇게 지체된 이유가, 걸맞은 자격을 갖춘 대상을 불러오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그런데, 권한이 없다고?”
“…”
외통수다. 완전히 걸려버렸다.
황녀들의 머리속에서는 이미 신의 눈에 들겠다는 식의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칫 하면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나 있겠는가.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서 느긋하게 다과를 즐기던 즈라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이 황녀들이 형진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전부 물 건너 간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유아가 나섰다.
“너무 그렇게 다그치지 마세요. 모든 아가씨들이 제랄딘님 같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요.”
제랄딘은 또 누군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말을 듣는 순간 형진의 고개가 끄덕였다는 점이다.
“하긴. 그건 틀림없는 말이야.”
두 황녀는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과 비교 대상이 된 제랄딘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은 그저 황실에서 태어난 것 빼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머리 빈 아가씨들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입을 연 것은 오레아 제국의 황녀 이노였다.
“좋을대로.”
형진에게서 허락이 나오자, 이노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렇게 아뢰었다.
“저는… 나라의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의 일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노여움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이 두 황녀가 형진을 찾아온 이유를 다소 돌려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시스란은 당황했다. 뻔히 아내라고 소개한 여성이 눈앞에 있는데 이런 식의 말을 꺼내다니. 게다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한 것도 아니고 직접 전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
순간 유아가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분명히 표정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흠칫 놀라게 만드는 기이한 압박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형진은 여러 여자들을 안았고, 유아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면전에서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진 경우는 아직 없었다. 하다못해 희망과 생명이나 공포와 죽음, 그리고 보호와 균형 같은 여신들조차도 최소한 양해를 구한다거나 하는 식의 태도를 보여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당돌한 계집애는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아가 호구신의 성녀이고, 그 이름만큼이나 호구스러움이 넘친다고는 해도 이런 꼴을 당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 지금 그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잔뜩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사실 국가 간의 협상 와중에 이런 식으로 상대를 격동시켜서 시야를 자신에게로 고정시키고 뒤로 다른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또한 정치가 가운데 하나가 이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어서 자신의 이름을 다른 이들에게 각인시키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노가 그런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이라면, 이것은 충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그 모든 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이노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형진이 유아를 소개할 때 아내라고만 했을 뿐, 신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물론 유아 역시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신이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가 오레아 제국에서 첫 손 꼽히는 규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미 오랫동안 함께 지내서 신선한 느낌이 사라진 아내보다 젊고 새로운 아가씨에게 마음이 동하는 건 남자들에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어차피 그녀는 형진에게 스스로를 선 보이려고 찾아온 것이다. 기왕 그렇다면, 좀 더 저돌적으로 스스로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그녀가 즐겨 읽는 소설에서처럼 ‘이런 일, 네가 처음이야’라며 호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또한 모르고 있었다. 형진은 그런 취향을 가진 남자도 아닐뿐더러 도대체 그놈의 신혼은 언제 끝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아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 제안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네가, 너란 존재의 가치가, 감히 내 노여움을 가라앉힐 정도로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가.”
“…”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이 형진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이노는 그제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대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형진의 존재감에 짓눌려 버렸다. 옆에서 미친 거 아니냐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시스란 또한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시스란은 억울했다. 물론 자신도 같은 의도로 이곳을 찾은 것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망할 계집애와 똑같은 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하겠다고 했나.”
“…”
두 황녀는 이미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신의 노여움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그녀들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좋다. 하긴 개인의 잘못을 나라에 묻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러니, 너희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형진의 입에서 선고가 떨어지는 순간, 두 황녀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유아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죽인 건가요?”
“그럴 리가.”
형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그 몸으로 죄를 갚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 물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방금 전까지도 잔뜩 화가 나 있었던 유아였지만, 어쩐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험한 일을 시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
형진의 말에 유아는 살짝 눈을 흘겼고, 자신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다시 알콩달콩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 둘을 보며 즈라탈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유아에게 말했던 대로 두 황녀는 죽거나 여자로서 감당 못할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긴… 어디지?”
“그, 글쎄…”
방금 전까지 포근한 분위기의 응접실에 앉아 있던 두 황녀는 어느 틈엔가 자신들이 영문 모를 장소로 옮겨진 것을 깨닫고는 황망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게다가 여긴 어디고.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서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아름다운 은빛 갈기를 지닌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히익!”
“아… 아아…”
이대로 죽는 건가. 두 황녀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하고 아름다운 환수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을 지킬 만한 어떤 소양도 갖추고 있지 않은 그녀들로서는 이 거대한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흠… 너희들이 새로 이곳에 오게 된 무수리들인 모양이군.”
“…”
거대한 은빛 늑대의 말에 황녀들은 이게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무수리란 건 또 뭔지.
하지만 은빛 늑대는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그대로 거대한 입을 벌려 그녀들을 콱 물어 버렸다.
두 황녀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면서. 규중에서 애지중지하며 자라난 그녀들로서는 거대한 환수가 커다란 입을 벌려 자신들을 콱 물어버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온전하게 정신을 유지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거대한 은빛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은염랑은 그녀들을 잡아먹는다든가 하는 생각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녀들을 원하는 장소로 옮기기 위한 가장 간단한 수단을 사용했을 뿐이다.
은빛 늑대는 어쩐지 입 안에서 전해지기 시작한 이상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이전에 아르테미스라고 불리웠다가 형진에게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새로 받은 여성이 머물고 있는 궁을 향해 날아올랐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