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12
00812 186. 대화 =========================
밤의 권능에 의해 갇혀 있던 수행원들은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뒤이어 즈라탈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죄를 저질렀고, 그 죄의 대가를 스스로 갚기 위해 다이애나님의 궁으로 보내졌다. 그리 알고 있도록.”
“네?”
밤의 권능은 일시적으로 상대의 모든 감각을 차단함으로서 극한의 공포를 안겨준다. 차라리 기절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도 못한 상태로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빼앗기는 것이다.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수행원들에게 그 정도의 혹독한 벌을 내릴 이유가 없는지라 형진도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이를테면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으로만 힘을 사용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오금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정신에 이상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겨우 풀려났나 싶어 안도하던 사람들은 즈라탈의 말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정신이 확 날아가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번 회담에서 황녀들을 수행하는 임무를 받고 각 제국에서 보내졌다. 그런데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황녀가 영문도 모를 이유로 느닷없이 어딘가에 유배 보내졌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야 겨우 끝도 없는 암흑으로부터 벗어났나 싶어 안도하던 사람들로서는 느닷없이 벼랑으로 등이 떠밀린 것 같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뭐가?”
“그분들은 황실의 금지옥엽입니다. 더구나 그분들은 사절로서 이곳을 찾은 것입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당한 절차조차 없이 임의로 처벌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즈라탈이 붉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그렇게 할 말 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말을 붙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다른 이들은 그런 모습에 크게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말들이 즈라탈에게도 감동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감히 밤의 신의 반려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네?”
“신께서 보는 앞에서, 그분의 반려를 대놓고 무시하며 추파를 던졌다. 너희 나라에서는 황후에게 그 같은 일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
수행원들은 즈라탈의 말에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황실의 위엄을 위해서도 반드시 처벌하고 그 자의 국가에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다.
“신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들 개인의 과오를 너희들의 나라에 묻지는 않겠다 하셨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 사실을 너희 나라에 알리고 새로운 사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아, 알겠습니다.”
“좋아. 알아들었으면 이만 꺼져라.”
“히이익!”
즈라탈은 그제서야 억누르고 있던 살기를 개방했다. 지금까지 선선히 대화에 응한 것도 형진이 가급적 차분하게 설명하라고 따로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조차 눈치가 보여서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감히 먼저 부뚜막에 앉으려고 들다니, 지금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고 있었던 것조차도 놀라운 일이다.
수행원들은 즈라탈이 뿜어내는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싼 채 도망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별장을 그렇게 도망쳐 나오고 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수행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어딘가로 잠적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전해 들었던 내용을 가급적 그럴 만했다는 식으로 포장해서 황실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황녀들이 신에게 죄를 짓고 어딘가로 유배가 보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고, 당장 본인들이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할 수도 없다. 황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밤의 권능에 사로잡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다가 날벼락을 맞은 수행원들도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절로 보내진 황족을 자기들 멋대로 구금하고 유배를 보내다니요!”
“유배 보내진 장소를 알아내어 반드시 구출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두 분의 청정에 누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밤의 신에게 볼모나 다름없는 역할로 보내진 것이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죄인이라니. 도대체 자신들의 제국을 얼마나 하찮게 보았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하지만… 당장 어디로 유배를 보낸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구출할 방법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조차 우리들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는 신입니다. 신에게 인간의 법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런 일이 가능했으면 신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번에 화를 내며 응징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이대로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처음부터 헛된 욕심을 버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요.”
“방법? 지금 상황에 더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잊으셨습니까. 지금 황실에는 반지의 주인이라 불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괜한 기대로 외교 경험이 전무한 황녀분들을 보내느니, 그분들을 보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나마 개인의 잘못을 국가에 묻지 않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큰 아량을 보인 것입니다. 그분들이 엄연한 외교 사절의 책무를 맡고 이번 여정에 오른 이상, 저희 제국에 책임을 묻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하루 종일 벌어진 논의 끝에, 양 제국은 밤의 신에게 다시 한 번 사절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렇게 새로 뽑힌 사절들은 이미 형진과 안면이 있는, 반지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쾌속선을 타고 급히 카살 제르토나에 도착한 그들은 남아 있던 황녀의 수행원들을 수습한 다음 바로 형진을 만났다.
“이번 일로 누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됐다. 그들의 죄는 그들이 원한대로 스스로 갚아 나갈 것이니, 그 일로 인해 제국 측에 불이익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해와 같은 아량, 깊이 감사드립니다.”
불려온 이들은 일단 형진이 원하는 문제에 대한 합의를 시작했다. 비록 유배 보내진 황녀들과 혈연관계이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두둔할 정도로 깊은 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딱히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황녀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 올라 설 가능성이 있는 경쟁자들이 이런 식으로 자멸한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중이다.
“그럼 카살 제르토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중립 상태를 보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암묵적인 인정이었던 것이 명문화된 협약으로 보호받게 된다는 점이겠지요.”
양 제국의 간섭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쨌든 그들로서도 카살 제르토나라는 세계 제일의 상업 도시를 완전히 포기하기는 힘드니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도시가 완전히 제국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히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암묵적으로 이 도시가 형진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양 제국이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합의는 양 제국이 형진에게 바치는 뇌물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물론 여기에는 또다른 정치적인 계산도 숨어 있었다. 사실상 양 제국이 형진에게 저 자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던가. 형진이 가진 강대한 힘도 문제긴 하지만, 그의 본거지가 앙그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커다란 이유라 할 수 있다. 상대는 자신의 본거지를 마음껏 때릴 수 있는데, 자신들은 상대의 본거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전략적인 고려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연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카살 제르토나는 형진에게 떠안겨진 인질의 역할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일단 그렇게 형진이 원하는 바 하나가 이루어지고 나자, 반지의 주인 가운데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두 황녀의 죄는 당연히 처벌 받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로서는 불안한 기분을 저버리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저희들이 그들을 잠시나마 만나 살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반지의 주인들로서는 사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굳이 그들이 보내진 이유 중에는 황녀들의 상황을 살피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거부해도 제국 측으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고, 반지의 주인들로서도 차라리 형진이 코웃음 치며 묵살하기를 바랬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다이애나의 궁은 이곳 앙그릴에서 감히 거리를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먼 곳. 여럿이 방문하기는 어려우니 너희들만이라면 허락하겠다.”
하지만 형진은 의외로 순순히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반지의 주인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본심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다시 무를 수도 없는 일. 반지의 주인들은 곧바로 황혼의 권능을 통해 다이애나의 궁에 도착했다.
“다이애나님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다이애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예물입니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성격이 많이 수더분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매사에 삼가고 조심하게 된 것도 있고, 궁의 주인으로서 공식적으로 맞이하는 첫 사절이라 조금 긴장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들을 만나러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가능하겠습니다.”
“밤의 신께서 이미 허락하셨다면 제가 말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접견이 끝나자 다이애나는 은염랑과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리를 벗어났고, 그들은 메이드복을 입은 요정들을 통해 황녀들에게 안내되었다.
“에메라? 에메라 맞지?”
“맞아. 이노 누나.”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으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던 이노는 배다른 동생의 모습을 보자 말을 잇지 못한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후… 그러기에 말조심을 했어야지.”
“하지만…”
이미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뒤라 에메라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본부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앞에서 추파를 던지면 어쩌자는 건지.
“나… 데리러 온 거야?”
이노가 훌쩍이며 그렇게 묻자, 에메라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그냥 별 탈 없이 잘 있는지 살피러 온 것 뿐이니까.”
“…”
에메라의 단호한 대답에 이노는 다시금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새삼스럽게 전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진 것이다.
이전까지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고는 해도 한때 제국의 꽃으로 이름 높았던 누이가 이런 식으로 전락할 걸 보니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결국 에메라는 그녀에게 한 마디 조언을 건넸다.
“이대로라면 누나의 존재는 그대로 잊혀지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생각해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물론 누나가 하기에 달린 일이지만.”
“어,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간단해. 다이애나님은 신의 반려 가운데 한 분이셔. 그분을 성심껏 보필하다보면, 신께서도 그 노고를 가볍게 여기진 않으실 거야.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 지금까지 누나가 지니고 있던 황녀라는 신분을 완전히 내려놓고, 마음을 다해 모셔야 할 테니까.”
“…”
“물론 어떻게 할지는 누나에게 달린 일이야. 어설프게 눈속임으로 넘어가려 해도 그분들에게는 통하지 않아. 모르긴 해도 다이애나님 역시 신과 관련된 분이라고 들었어. 게다가 주변에 계신 분들도 보통 분들은 아니시지.”
이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를 보필하고 있는 은염랑이나 요정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메라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더 나누고는 다시 앙그릴로 돌아왔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누이에게는 이번 일이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황실로 그녀가 무사히 잘 있다는 전갈을 보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밥먹고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