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26
00826 190. 아이들 =========================
비와 낭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돕다니. 네가 날?”
얼결에 되묻는 비와 낭만에게 다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물론 쉬운 것부터요. 차근차근 하나하나 배워가는 식으로. 안 될까요?”
“…”
어쩐지 어른과 아이의 입장이 바뀐 것 같은 느낌.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고, 또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기특한 일이기도 하다. 쉬운 것부터라고 단서를 달아놓은 걸 보면, 신의 일이라는 것이 아이들 놀이와는 다른 중요한 일이란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모양새다. 만약 형진이 이런 부탁을 다희에게 들었다면, 우리 예쁜 딸내미가 벌써 이렇게 컸냐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비와 낭만으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다희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건지조차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모르긴 해도 형진이라면 비와 낭만이 다희에게 뭔가 일을 시키는 순간 네 놈이 감히 누굴 부려 먹냐고 외치며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딸바보 형진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차라리 다희가 떼를 쓰고 그런다면 이렇게 당혹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가 떼쓰는 건 흔히 있는 일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비와 낭만이 대충 둘러대며 거절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다희는 그런 식의 얼버무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 누가 형진의 딸 아니랄까봐.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아무렇게나 남에게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일단은 정공법을 시도해 본다. 이 정도 말로 납득해 줄 거라고는 말하는 본인도 생각지 않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추종자들에게는 권능을 나누어 주고 계시잖아요.”
역시나 다희는 정론으로 대응해 왔다.
세상에. 내가 지금 한 살도 안 된 어린 아이랑 대화하고 있는 것이 맞긴 한 걸까.
비와 낭만은 망연한 기분마저 느끼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추종자들은 밤의 신께서 나와 함께 고르고 고른 사람들로 뽑은 이들이다.”
하지만 다희는 이번에도 침착하게 그런 비와 낭만의 말에 답했다.
“모르긴 해도 두 분이 저를 보아 오셨던 것보다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뽑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
비와 낭만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선발 과정을 거쳤다고는 해도, 눈앞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이 소녀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거나 지켜보거나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일이니까.
괜히 이런 저런 안전 장치를 마련해서 추종자들이 권능을 남발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런 추종자들에 비하면, 다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나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얘기를 꺼내본다.
“크흠. 무엇보다도 넌 이미 아버님이신 밤의 신의 추종자가 되어 있는 상태다. 내 말이 틀리니?”
서로 다른 두 신을 섬기는 추종자라는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한 경우 추종자를 다른 신에게 파견 보내거나 하는 식의 일도 최근에야 겨우 생겨났다.
다희를 비롯한 아이들은 포트니아 테론과의 조우 당시 왕성을 옮기면서 형진의 추종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포트니아 테론이 정확히 어떤 신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안전장치로 그렇게 추종자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임시조치이고, 다희가 정말로 그것을 바란다면 형진이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일이 생기게 되면 형진은 또한 비와 낭만을 가만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기는 해도, 딸 바보 형진이 눈앞에서 귀여운 딸을 채가는 남자 신을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때로는 신이라도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있게 마련이고, 아이들은 형진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역린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추종자 지위를 버리겠다는 식의 대응이 나오거나, 그 점을 미처 생각지 못해서 망설이는 식의 반응이 나오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비와 낭만으로서는 다희의 요청을 차단할 근거가 생긴다.
기존의 추종자 지위를 버린다면, 그 사안을 형진에게 말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문제는 다희와 형진의 일이 되므로 차라리 비와 낭만은 부담을 덜어버릴 수 있게 된다.
만약 다희가 망설이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좋은 말로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어느 쪽이 되었든 비와 낭만으로서는 손해 날 일이 없는 셈이다.
이것이야 말로 비와 낭만이 현재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한 대응 방법인 셈이다.
하지만 다희는 여느 아이와는 여러모로 확실하게 달랐다.
“그거라면 문제없어요.”
“뭐?”
비와 낭만은 당황했다. 문제 없다니. 어째서? 어떻게?
하지만 당혹해 하는 비와 낭만을 바라보며 다희는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 말을 꺼내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 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지니신 신격이 밤 하나 뿐이지만, 필요한 경우 이런 저런 권능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니까, 각각의 신들과 계약을 통해 권능을 빌려올 수 있도록 하셨다고 그러셨어요.”
“그, 그건…”
아차. 그런 방법이 있었다.
맹점이다. 미처 그 부분을 생각지 못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진과의 계약은 신대 신의 계약일 뿐, 추종자와도 그런 식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와 낭만이 잊고 있는 부분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형진이 비와 낭만이라는 신과 만나 계약을 맺을 당시 그는 신은 물론이고 반신조차 아니었다. 당시의 그는 공포와 죽음에게 속한 집행자의 한 사람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다희가 비와 낭만과 그런 식의 계약을 맺어 힘을 나누어 주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설마 그런 부분까지 다희가 파고들어서 이번 일을 모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와 낭만은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어릴 적 다희의 손에 의해 인형 취급을 받은 그 시점부터, 어쩌면 이 작은 소녀의 손에 꼼짝도 못하도록 마음에 어떤 족쇄가 채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비와 낭만은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당황하다 못해 이제는 혼란스러운 표정마저 짓고 있는 비와 낭만을 바라보며 다희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처음부터 신께서 다루시는 그 모든 권능을 대신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일부터, 음… 그러니까, 이를테면 비와 낭만님의 길 안내를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나가겠다는 얘기에요. 물론 지금으로서는 많은 도움이 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직 어리고 무언가를 배울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
물론 비와 낭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완패다. 비와 낭만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애초에 다희라는 이름의 소녀를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기세는 물론이고 논리마저도 완벽하게 밀려버렸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해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어 그래 하며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비와 낭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니까… 음, 이건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일단 밤의 신께 말씀드려보자.”
결국 비와 낭만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는 형진뿐이었다. 하지만 다희는 이미 비와 낭만의 그런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럼 빠아가, 아니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일을 도와드려도 괜찮다는 말씀이신가요?”
“…”
외통수다. 도망갈 구멍이 없다. 비와 낭만은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운명을 형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아요. 그럼 당장 가서 허락을 받아요.”
“…”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다희의 모습에 비와 낭만은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꼬맹이신의 모습도 아니건만, 그는 다희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뭐? 계약? 일을 돕기 위해서?”
“네! 빠아! 허락해 주실 거죠?”
“…”
형진은 다희가 비와 낭만을 끌고 와서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찔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어쩐지 다희가 신랑감을 데리고 와서 결혼 허락을 부탁하는 상황이 연상되어 버린 탓이다.
“안 되나요?”
“그, 그게…”
하지만 자신의 품에 안겨서 눈치를 보는 다희의 모습을 보자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직 한 살도 안 된 애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인가 싶었던 탓이다.
게다가 사실 형진도 어느 정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장 이전에 다희를 추종자로 받아들일 때도 비와 낭만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자신의 추종자 지위를 던져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계약을 통해 비와 낭만의 힘을 일부 빌려 오는 대신 그의 일을 돕고 싶다는 것이 전부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서를 몇 가지 단다면 이 정도는 못 들어줄 부탁도 아니다.
“우리 다희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빠아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정말요?”
다희의 눈은 반짝하고 빛난 반면, 비와 낭만은 역시나 하는 생각이 되어 버렸다. 형진은 둘의 그런 상반된 반응을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왕성 밖으로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 비와 낭만님의 일을 돕더라도, 그것은 왕성 안에서만으로 한정한다. 만약 왕성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나에게 직접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나는 허락했던 모든 것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어때. 할 수 있겠니?”
“네!”
혹시나 왕성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런 단서를 달았지만 다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형진은 다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시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은, 네가 설령 권능을 나누어 받아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더라도 신중하게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모든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만약 네가 권능을 사용한 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가 생긴다면, 나는 너에게 합당한 벌을 줄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물론이죠. 약속할게요.”
“좋아.”
사실 아직 어린 아이가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 하지만 다희는 이따금 아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똑똑한 아이다. 물론 기대하는 만큼 우려도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장차 다희가 신의 딸로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일 수도 있었다. 벌써부터 이런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하는 딸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는 해도, 늦든 빠르든 거쳐 가야할 일인 것이다.
아직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저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언제가 되었든 마찬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흑요호를 보통의 인간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을 돕는다는 핑계로 비와 낭만님을 곤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니, 네가 말한 바를 어기는 일이 되겠지. 빠아는 우리 다희가 그런 나쁜 아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지?”
“음… 알았어요. 그것도 약속할게요.”
앞서의 두 가지 조건과는 달리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 어쩐지 다희답다.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자신의 귀여운 딸을 품에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들으셨겠지만, 다희가 이 세 가지 조건을 어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하겠습니다. 비와 낭만님께서 잘 지켜봐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난감하긴 했지만, 단서를 달았으니 막무가내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와 낭만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바로 그 순간 다희의 입술이 씨익 말려 올라가는 것은 형진도 비와 낭만도 미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두 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