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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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무슨 일…”
침실의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한 사람이 들이닥쳤다가 그 안의 모습과 확 풍겨 나오는 짙은 냄새를 느끼고는 그대로 굳어 버린다.
굳어 버린 건 안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몸을 합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음미하며 후희를 즐기던 두 남녀 역시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들이닥친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어 버렸다.
“어, 그게… 미, 미안…”
갑작스럽게 침실을 열고 들어 왔던 리페는 시야에 들어온, 너무나도 적나라한 부부의 모습에 얼굴이 벌개진 채 그렇게 말하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형진과 누군가가 침실에 들어가면 일단은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다. 처음부터 여럿이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방해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해 받고 싶지 않으면 우선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보면 리페의 행동은 명백한 잘못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리페 역시 할 말은 있었다. 비록 방음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도록 침실 주위에 조치가 취해져 있긴 했지만, 절정의 순간 형진과 미아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은 그런 식의 조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있던 리페와 아란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리페가 놀라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래서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명백히 어떤 행위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무너진 침대 위에서 후희 중인 남녀의 모습이었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도, 그렇게 적나라한 남녀의 사생활을 목격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겉으로는 대범한 척 툴툴거려도 희망과 생명도 알고보면 꽤 부끄럼쟁이이기 때문이다.
“어쩌죠?”
“뭘?”
“일단… 나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괜찮아.”
“네? 하지만…”
“괜찮다니까.”
“앗!”
미아는 일단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형진은 괜찮다면서 곧바로 2차전에 돌입해 버렸고, 내친 김에 3차전까지 치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녹초가 되어 버린 미아가 잠이 들자 함께 숙면을 취해 버렸다.
결국 둘이 침실 밖으로 나온 건 꼬박 하루가 다시 지나버린 다음의 일이었다.
“너…”
그렇지 않아도 내심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안절부절하던 리페는,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모습을 드러낸 미아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밤을 보내는 모양이다 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던 아란 역시 미아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힘을 느끼고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된 거죠?”
“그게…”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미아는 형진을 흘깃 바라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러니까… 앞으로 진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다고 해야 하나…”
“네?”
“그, 그게 무슨!”
화들짝 놀란 리페와 아란은 급히 미아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놀랍게도 추종자처럼 형진의 문장이 새겨졌음을 확인하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형진과 만난 이후로 이래저래 전대미문의 연속이긴 했지만, 지금 벌어진 일은 이전까지 정말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한 명의 독립적인 신이, 다른 신의 추종자 비슷한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이것은 보호와 균형 스스로가 바래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신들 사이에 상하 관계가 설정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자 그대로 전대미문의 일이다.
“아무리 의존증이라도 정도가 있어!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잠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리페가 그렇게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미아는 의외로 차분하게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니에요.”
이전 같지 않은 미아의 단호한 태도에 리페는 조금 당황해 버렸다. 얘가 이런 애였나 싶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럼? 어디 들어나 보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린 건지.”
“아시다시피…”
미아는 조용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은 이런 커다란 힘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점과 더불어, 차후 누에들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였다는 식으로.
“…”
설명을 들은 리페는 이마를 감싸 쥐었고, 아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이 사태를 다른 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형진이 주신으로 옹립되는 과정에서도 이래저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왔었다. 형진에게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차별화된 지위가 생김으로 인해서 신들 사이에 계급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호와 균형이 형진에게 완전히 속하게 되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보호와 균형 스스로가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신과 신 사이의 관계에 하나의 선례가 생겨 버렸다는 것은 분명 우려 섞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안 되겠다.”
잠시 이마를 감싸 쥐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리페는 진지한 목소리로 미아에게 말했다.
“일단… 본신부터 엘리시온에서 나와 있는 편이 좋겠어. 아니다. 그냥 그대로 엘리시온에 있어. 그리고 앞으로 본신으로는 가급적이면 다른 신들과 만나지 마. 꽃과 바람이라든가 황혼과 망각도 굳이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아바타로 만나든가 하고. 물론 그 문장은 최대한 숨겨야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다른 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꽃과 바람 같은 이들은 보호와 균형이 잊혀진 신이었을 때부터 친근하게 지내던 죽마고우라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숨겨야할 정도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리페라고 그런 미아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걔들이야 네 결정을 존중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이 다른 신들에게 전해지거나 하면 공연히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너도 너 때문에 진이 곤란해지거나 하는 건 바라지 않겠지?”
“그야 물론이죠.”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적어도… 음, 다른 어떤 신도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의 힘이 더욱더 강해질 때까지는 내 말대로 하는 편이 좋아.”
사실 이건 어폐가 있는 말이다. 언데드의 힘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데다, 이제는 보호와 균형을 자신에게 속하게 함으로서 누에의 힘까지 완전하게 손에 넣은 형진을 상대할 수 있는 신이 과연 엘리시온에 존재할까. 지금 상태라면, 포트니아 테론이나 그와 맞서 전쟁 중인 빛의 신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니, 포트니아 테론 역시 언데드의 힘을 정화하는 것으로 간신히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적어도 엘리시온이 속한 우주 안에서 그에게 대적할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리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형진의 힘은 강대하지만, 지금의 이 일이 작은 균열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아무리 단단한 제방이라도 작은 개미굴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것처럼, 혹시라도 큰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있는 일은 철저하게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빛의 신과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미아였지만, 진지한 태도로 자신을 설득하는 리페의 태도를 보고는 이 문제가 단순히 잘잘못으로 따질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놀란 것은 여신들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규설과 힐리에타 역시 오래지 않아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맙소사. 여신님을 추종자로 받아들인 거야?”
“말도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여신들 때문에 형진에게 눈도장 받기가 어려워서 고민 중이던 둘에게 이번 일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다니. 상식적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충격은 그나마 약과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이번 일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누에들이 받은 충격에 비하면 규설과 힐리에타가 느낀 놀라움 따위는 차라리 별 것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누에들도 형진이 보호와 균형에 대해 지니고 있는 우월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신은 생각보다 여린 마음을 지닌 이였고, 형진은 그런 그녀를 다잡아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본래라면 오직 보호와 균형의 말에만 반응했을 누에들도 진의 명령이나 지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누에들이 여왕의 생각을 따르고 여왕이 다시 보호와 균형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보호와 균형 또한 밤의 신에게 속해 그의 뜻을 따르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부부 사이이면서도 수평적이고 대등했던 관계가, 일순간 수직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버렸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보호와 균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누에들 역시 진의 명령을 받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 된다.
납득할 수 없다.
누에들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것이 밤의 신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반항이나 저항을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보호와 균형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런 행동은 누에들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절대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놀란 모양이군.”
[…]
형진은 누에 공주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모아놓은 채 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너희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은 또한 너희들에 대한 벌이기도 하다. 보호와 균형은 너희들을 거느린 신으로서 이번 일에 책임을 진 것 뿐이니까.”
그러자 누에 공주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연히 저희가…]하지만 형진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왜? 여기서 자해라도 하게? 그럼 나는 명령하겠다. 앞으로 너희 누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를 해치는 일을 금한다.”
[큭!]
이전이라면 진이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한들, 그것을 보호와 균형이 그대로 받아 읊지 않는 이상 누에에게는 직접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진의 말 한 마디는, 그들에게 있어 보호와 균형이 명령을 내린 것보다도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아무리 추종자라 해도 이런 식으로 신이 강제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 편이 맞다. 어찌 보면 이전에 벌어진 일 역시, 그런 식으로 누에들을 다른 추종자와 동일하게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누에들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어째서 이번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 벌이 되는 건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너희들 스스로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너희들의 결정이 무조건 옳은 것 또한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너희들이 어떤 식으로든 간에 너희 종족과 그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나와 여기 있는 내 반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그, 그런…]
형진은 누에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못을 박듯 선언했다.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너희들 멋대로 앞서와 같은 일을 벌이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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