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94
00993 [추종자] =========================
종교가 현실 정치에 개입하게 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러한 논제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의 예로부터 전해지는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형진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역시 무오류성이라고 불리는 부분이다.
무오류성은 단어의 뜻 그대로 해석하자면 오류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지구의 역사에서는 이른바 교황이나 성서에 대한 무오류성이 부각되어 논쟁의 불씨를 만든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신에게 직접 의사를 물을 수 없었던 탓에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이나 신의 말씀을 적은 성서에 그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문제는 과연 신이라고 해서 절대로 오류가 없는가 하는 점.
다른 종교야 어떨지 몰라도 엘리시온의 신들에게 있어서 무오류성은 옳지 않은 말이다. 다른 모든 신들을 통할하는 주신의 자리에 올라있는 형진부터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현재의 자리에 올라섰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애초에 무오류성 같은 단어는 다른 모든 신을 발라먹는 유일신에게나 해당되는 얘기고, 그나마도 무조건 맞다는 개념이 아니라 맞다고 강요하는 수준의 얘기다. 그건 애초에 신이 아니라 섭리라는 단어 자체를 깨부수는 독재자나 마찬가지다.
혹시 모른다. 포트니아 테론이 말했던, 이른바 우주 전체를 돌봄의 대상이 아닌 먹이로 간주하고 그것을 실행한 존재가 있다면, 그러한 존재가 신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는 무오류성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자신 혼자만이 덜렁 존재한다면 진리고 뭐고 따질 필요 없을 테니까. 인과고 뭐고 다 씹어 먹고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이 아닌 이상 무오류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이나 종교라는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이다.
사회적인 생활을 하는 모든 지성체가 그렇듯이 인간은 수많은 제도와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제도와 법도 완벽할 수 없다. 글자 하나하나 아무리 공을 들여 법을 만들어도 결국 악용하려고 마음먹으면 구멍은 어떻게든 생길 수밖에 없다. 사회 자체가 정체되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야말로 시간이 멈춘 듯 한 세계라면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이상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게 마련이고, 과거에 마련된 법은 결국 그러한 변화에 따라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무오류성에 관한 문제도 결국 이런 식으로 법과 제도가 지닌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신의 말씀 그 자체를 법으로 삼는데서 오는 폐해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처음 신격이 유명무실해진 수호신들에게 이 일을 맡길 때만 해도, 형진은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엘 파르드라는 나라를 통해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여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의지를 현실 정치에 대입하는 문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정치 체제와 관습에 따라 같은 문제라도 한 가지 답이 아닌 여러 가지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굳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는 것이라고 수호신의 역할을 한정 짓기는 했으되, 동시다발적으로 수호신이 투입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겨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세상물정 모르는, 그야말로 순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호신들이 닳고 닳은 기득권 세력에게 어떻게 보일까. 처음에야 신이니까 함부로 생각지 못한다 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만만하게 보고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결국 바츠크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선제적인 공작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미끼는, 다름 아닌 추종자 신분.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그것을 확장시키기 위해 골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특권적인 지위는 너무나도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과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독이 든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결국은 손으로 집어 한 입 깨물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미끼인 셈이다.
“괜찮겠나.”
경과를 봐야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 전체가 마치 쟁기로 갈아엎은 것과 같은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다.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겠다 싶으면서도, 인간의 욕심이란 어떤 식으로 그 불길이 번져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형진의 물음에 룩스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 나라는 저에게 그리 큰 의미를 지닌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일에서 룩스는 문자 그대로 형진의 아바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의 기득권 전체가 뒤집어질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매국과 같은 행위로 치부될 수도 있다. 룩스는 그와 같은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형진에게 자신을 대신해 이 계획의 실행자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때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수락했다. 단순히 신이 시키니까 한다는 식의 반응이 아니다. 처음부터 룩스라는 이름의 추종자에게 있어 바츠크렌이라는 나라는 그 정도 의미 밖에 없었다.
배후에서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탑와와 루벨라는 자신의 첫 번째 추종자와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 귀여운 추종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만, 이제는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아쉬울 정도다.
아무리 추종자라 해도 침식마저 같이 하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그나마 유일한 예를 찾자면 허세와 망상 정도. 하지만 그조차도 같은 방에서 함께 부둥켜안고 잠이 든다든가 하지는 않는다.
“웅…”
바츠크렌의 왕녀 루이스는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궁이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찬 밥 취급을 당하기는 했어도, 어쨌든 루이스가 왕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녀의 오빠인 룩스가 권력에 가까워지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우가 좋아졌다.
그런 그녀의 관점에서, 지금 그녀가 잠들어 있던 방은 어떻게 보면 다소 초라할 수도 있었다. 설마 이런 작은 방에 신이 머물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 물론 여기서 작고 초라하다는 건 왕족에게나 해당되는 얘기긴 하다.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음냐 거리면서 배를 긁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과연 이 모습을 보고 여신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까.
“풋!”
루이스는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여신의 모습을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은 루이스에게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친한 이라고는 오빠 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있어 때로는 엄마처럼 또 때로는 언니처럼 자신을 돌봐주는 여신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따뜻했다.
생모는 이미 죽었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언니와 어머니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눈앞의 여신처럼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다독여준 적이 없다.
그들에게 루이스가 받은 대접이라고는, 눈을 마주치는 순간 무시하듯 고개를 돌린다거나 계속 바라보더라도 환멸이나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차라리 남보다도 못한 관계라고나 할까. 왕궁 내의 권력다툼 같은 것 따위 알 리 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기는 것은 오빠인 룩스 뿐이었다.
루이스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통해 아침이 다 되었음을 깨달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여신님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난 루이스는 입고 있던 귀여운 잠옷을 벗고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과 평상복 모두 탑와와 루벨라가 거짓된 천국에서 사준 것이다.
벗어둔 잠옷을 조심스럽게 개어 놓은 루이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비록 왕궁에 비하면 작고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곳에는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집기가 완비되어 있었다.
루이스는 일단 간단하게 세수부터 했다. 그리고 곧장 냉장고를 열어 식빵과 야채, 그리고 우유를 꺼냈다. 그리고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은 다음 전원을 켠 다음 우유를 데웠다.
그녀는 아직 어리다. 게다가 명색이 왕족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지 소질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실 간단한 야채 토스트나 덥힌 우유를 준비하는 일이 소질까지 따질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다. 소질보다는 의욕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나 할까.
탑와와 루벨라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침실에서 나온 건 맛있게 구워진 토스트가 통 하고 튕겨 나올 즈음의 일이었다.
“음… 맛있는 냄새.”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신님.”
“응. 잘 잤니? 루이스.”
“네. 식사 준비 되었으니 씻고 오세요.”
탑와와 루벨라는 살짝 잠이 덜 깬 든한 부스스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한 귀여운 추종자의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루이스.”
“벼, 별말씀을요.”
가족에게 이런 식의 스킨십을 받은 경험이 없는 루이스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룩스는 분명히 좋은 오빠였지만, 이런 식의 스킨십은 거의 해준 적이 없었다.
탑와와 루벨라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다음 루이스와 아침 식사를 했다. 야채는 자기 전에 탑와와 루벨라가 직접 밑 준비를 한 것이라 실질적으로 루이스가 한 것이라고는 테이블에 차려낸 것 뿐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추종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여신의 얼굴에는 절로 행복한 미소가 피어난다.
“루이스.”
“네.”
“오늘은 내가 일하는 곳에 같이 가볼래?”
“일이요?”
그 동안은 휴가를 내서 놀러 다녔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새로 지급받은 아바타를 사용한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그렇게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탑와와 루벨라는 루이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함께 휴가를 보내는 동안 얼핏 들은 얘기로 미루어 보면, 지금까지 이 작고 귀여운 추종자는 제대로 된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응. 나는 평소에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거든. 루이스 또래의 아이들도 제법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친구를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친구.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이스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그래. 그럼 식사 끝나고 같이 가자.”
식사가 끝난 후 탑와와 루벨라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루이스는 옷장을 열고 그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파란색 원피스를 꺼냈다. 왕궁에서 입던 치렁치렁한 드레스와는 아무래도 다른 느낌의 옷이지만 탑와와 루벨라가 그녀에게 처음 사준 옷이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평상복을 벗고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설거지를 마친 탑와와 루이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잠시 머리를 땋는다 뭐한다 하면서 부산을 떨던 탑와와 루벨라는 요란하게 울리는 시계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보기에 적당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준비를 마치자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 있던 루이스를 안아들고는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향했다.
“어? 그애는 누구야?”
“뭐야. 잠시 안 보인다 했더니, 설마 그 사이에 아이라도 낳은 거야?”
함께 일하는 수호신들이 루이스를 안고 나타난 탑와와 루벨라를 보며 그런 식의 농담을 던졌다.
“처녀 보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얘는, 내 추종자라고.”
“뭐? 추종자?”
기껏해야 새로 맡은 아이겠거니 싶었던 수호신들은 추종자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왕성 한 켠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 교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명색이 신이다보니 언젠가는 교단이나 추종자를 꾸려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다들 조금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가 느닷없이 작고 귀여운 추종자를 데리고 등장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너, 아무리 추종자가 가지고 싶었어도 철모르는 아이를 꼬시면 안 되지.”
“그건 범죄라고. 주신한테 걸리면 혼난다.”
“맞아. 주신이 변태로 소문 자자하긴 해도,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건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고.”
당연히 올바른 방법으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 수호신들의 걱정스런 말투에 탑와와 루벨라는 발끈하고 말았다.
“아니거든! 루이스는 내가 제대로 맞이한 첫 번째 추종자거든? 아무 문제없거든?”
루이스는 투닥거리며 다투는 신들의 모습에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지만, 이내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작게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형 같은 귀여운 외모를 지닌 루이스가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자, 주위에 몰려든 수호신들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꺄아! 어쩌면 좋아. 너무 귀엽잖아!”
“이 정도로 귀여우면 탑와와 루벨라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가 가. 물론 그래도 범죄는 범죄지만.”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