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58)
샌프란시스코의 남쪽에는 미국 최대의 IT산업 밀집 지역인 실리콘밸리가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연구소에서 신차에 탑재할 자율주행기술에 대한 발표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 상황도 좀 둘러봐야 하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엘리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나이아가라는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나도 마음 같아서는 아예 캐나다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미국 와서 관광은 못하고 계속 일만하게 될 줄이야.
“차타고 로드트립하는 것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디트로이트에서 실리콘밸리까지요?”
대략 잡아도 4000킬로미터다. 시속 100킬로로 쉬지 않고 달려도 40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중간 중간 다른 도시도 들러서 구경하면 되죠.”
그럼 한달은 걸리지 않을까?
미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여행이라…….
“재밌긴 하겠네요.”
이 나이에 여행이 아니라, 기업경영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일 좀 마무리 되면, 다 둘러봐요.”
“흐음, 누군가 말했죠. 바쁜 일이 지나가면 더 바쁜 일이 오기 마련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시카가요.”
“…….”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 같아서 반박할 수가 없다.
엘리는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거예요?”
사실 머리가 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증상을 들은 엘리가 말했다.
“멀미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제까지 비행기를 타면서 멀미를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게 멀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엘리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냥 몸이 안 좋은 걸 수도 있어요. 그동안 스트레스 받을 일도 많았잖아요.”
“그런가요?”
난 일부러 웃음을 지었다.
“좀 쉬면 나아질 테니, 걱정 말아요.”
난 좌석을 젖히고 누운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러고 있으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속이 안 좋아서 기내식도 건너뛰었다.
그러는 사이 창밖으로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다행히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에는 두통과 메슥거림이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정말로 멀미였나 보네요.”
엘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병원은 안 가 봐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나와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생각날 듯 말듯 한데…….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서자, 엘리가 물었다.
“왜 그래요?”
난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진짜 스트레스 때문인가?
국내선을 타고 온 것인 만큼 따로 입국절차는 없었다. 짐을 찾고 나가자 경호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공항을 나와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공항에서 실리콘밸리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차는 바로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중간에 거실이 있고, 두 개의 침실이 있는 형태였다.
우리는 각자의 침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비행으로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요.”
“엘리는요?”
“전 아래 내려가서 운동 좀 하고 올게요. 며칠 안 했더니, 몸이 찌뿌둥해서요.”
출장 와서까지 운동이라니. 역시 이런 몸매가 그냥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엘리는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호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엘리가 돌아왔다. 마치 비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카락부터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에메랄드빛의 샌프란시스코베이(San Francisco Bay)가 펼쳐져 있었다.
날씨는 햇빛이 쨍쨍했다.
설마 비를 맞은 게 아니라 땀에 젖은 건가?
“일어났네요. 더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운동을 한 거예요?”
“호텔에 스쿼시장이 있어서, 간만에 실컷 했어요. 진후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
전에 한 번 같이 갔다가 토할 뻔했지.
난 시계를 보았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산책하러 나갈래요? 커피도 한 잔 하구요. 어차피 일은 내일부터 실컷 할 거잖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잠깐 기다려요. 샤워하고 나올게요.”
엘리는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흰색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발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롱 플레어스커트를 입었고, 약간 굽이 있는 샌들을 신었다.
“어때요?”
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예쁘네요.”
딱히 꾸미지 않았음에도 오늘도 미모가 열일하는 느낌이다.
나도 양복 대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가요.”
호텔을 나서자 엘리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날씨는 그야말로 완전히 봄 날씨였다. 우리는 햇볕을 막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
워낙 안전한 도시지만, 사람 일이란 혹시 모르는지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남녀 경호원이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그들 역시 사복을 입고 있었기에 마치 데이트 나온 연인들처럼 보였다. 품에는 권총을 숨기고 있겠지만.
‘인종의 용광로’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있었다. 동양인 역시 매우 흔했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덕분에 우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라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
선글라스를 낀 채 거리를 걷는 엘리의 모습은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델 아니냐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IT전문가나 유학생쯤으로 보이려나?
엘리는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저 카페 어때요? 저기서 커피 한 잔 할래요?”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는 길을 가로질러 근처에 있는 노천카페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커피와 함께 해산물이 들어간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먼저 커피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는데, 20대 후반 정도의 금발청년이 열심히 엘리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여행 오신 건가요?”
“일 때문에 한국에서 출장 왔어요.”
“오! 코리아! 반갑습니다. 전 케빈 엔더슨이라고 합니다. 이 근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케빈. 무슨 일 하시나요?”
“현재 M피자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엘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M피자에서 일하시는구나. 우연이네요. 마침 그 회사 최대주주가 뒤에 서있는데.”
“예?”
엘리는 뒤에 서있는 나를 가리켰고,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난 말하는 대신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보였다. 그는 단숨에 나를 알아보고 입을 쩍 벌렸다.
“헉! 설마 강…….”
“쉿!”
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디트로이트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쪽 일이 끝나서요. 아무튼 저도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M피자를 위해 힘써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자리에 앉자 엘리는 웃으며 말했다.
“봤어요? 제 인기가 이 정도예요.”
인기야 당연하지만, 잠깐 사이에 헌팅을 당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혼자 놔두면 안 되겠는데요.”
“괜찮아요. 제 눈에는 진후가 제일 멋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되네요.”
엘리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날씨 정말 좋네요. 역시 나오길 잘했죠?”
“그러네요.”
봄 햇살이 따사롭다.
한국과는 달리 미세먼지도 없고, 황사도 없다. 테라스에 앉아 햇볕을 맞으니, 어째서 다들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임대료와 물가를 견뎌야겠지만. 세계 최고의 인력들이 몰리며 샌프란시스코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폭등 중이다.
현재 서울 아파트의 중위가격이 5억 원 정도인데, 샌프란시스코는 10억이다. 100억이 넘어가는 집도 수두룩하고, 도시외곽에 있는 허름한 원룸의 월세가 수백만 원이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도시 밖으로 밀려나거나, 노숙생활을 해야 했다. 실제로 높은 집값으로 인한 주거불안은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되고 있었다.
집값이 높은 만큼 소득수준도 높다.
연봉 10만 달러가 넘으면 어느 나라를 가도 고소득층에 속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연봉이 20만 달러는 넘어야 중산층으로 여긴다.
금융부자들이 몰려 있는 뉴욕 맨해튼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와 가장 잘사는 부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일 그만두면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더 오르기 전에 미리 집이라도 사놔야 하나?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는 점은 홍콩과 비슷한데,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요.”
“홍콩은 어떤데요?”
내 물음에 엘리는 잠시 생각했다.
“음, 번쩍거리는 고층빌딩 옆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빌딩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예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섞여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랄까?”
“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그에 비해서 이곳은 훨씬 깨끗하고 여유가 있네요.”
난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표정에는 생기가 넘쳤고, 걸음걸이는 편했다. 아무래도 IT인력들이 많이 몰려 있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엘리는 홍콩에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거기서 제시카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요? 고객 중 30대 중국인 부호가 제시카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주먹 만한 다이아반지를 내밀며 청혼한 일도 있었어요.”
“정말요?”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주먹 만하다는 건 과장이지만, 다이아반지를 들고 온 건 진짜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어떻게 하긴요. 단칼에 거절했죠. 그 사람 말고도 제시카에게 대쉬하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저보다 인기가 더 많았다니까요.”
“…….”
현주 누나가 그 정도였어?
하긴 객관적으로 봐도 현주 누나는 충분히 미녀다. 왠지 특정 취향을 지닌 이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난 그런 취향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아까부터 자꾸 뭔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 * *
다음 날.
우리는 차를 타고 연구소로 향했다.
서성전자는 글로벌 기업답게 실리콘밸리에 각종 연구소를 두고 있고, 여러 IT회사들과 협력하고 있다.
산호세에 있는 전장사업 연구소에서는 서성전자와 카로스의 연구진이 함께 소프트웨어 안정화와 양산을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술을 개발한 것과 양산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특정 기술이 상품성을 갖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통과해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격이다. 가격 때문에 상용화에 실패한 제품이 어디 한둘인가?
당장 전기차와 수소차만 해도 내연기관차에 비해 월등히 비싸다. 그나마 가격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건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덕분이다.
친환경차는 보조금이라도 있지만, 자율주행차는 그런 것도 없다. 결국 우리가 알아서 가격을 최대한 낮춰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탑재했다고 한들 가격이 비싸면, 수요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판매하려면,세단은 4만 달러, SUV는 5만 달러가 한계일 것이다. 그보다 더 낮으면 좋고.
어차피 차량 원가는 거기서 거기다. 문제는 자율주행 부품가격이다.
실험차에 탑재한 장비들은 시제품을 소량 생산한 것인 만큼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양산체제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한 투자가 뒤따라야한다.
결국 규모의 경제를 갖추는 게 관건인가?
연구소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먼저 와있었다.
“응?”
안경을 쓴 40대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난 놀라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임진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후배님께서 실리콘밸리로 온다는 얘기를 듣고 전용기를 타고 급하게 날아왔습니다.
내가 온다는 사실은 이미 서성전자 연구진들에게도 알려졌다. 당연히 서성전자 본사에도 얘기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미국까지 올 필요가…… 혹시 한국에서 할 일이 없나?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 순간, 오랜만에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