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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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킷의 주요 거래처는 유럽이다.
지금도 캘리포니아 복구사업과 새만금 개발을 제외하면, 설계 발주처의 80퍼센트가 유럽 기업과 정부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자유롭게 거래를 했지만,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직격타를 맞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런던을 떠나야 한다는 쪽과 남아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경영진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를 놓고도 의견이 엇갈렸고.
피터 카즈요 사장이 말했다.
“영국은 불확실성이 너무 큽니다. 지금 돈을 버는 것은 창고업자들뿐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EU에서 제품을 수입해 오는 기업들은 창고가 터질 정도로 사재기를 해놓고 있고, 영국에서 제품을 수입하는 프랑스나 독일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니까요.이래서는 향후 경영전략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이다.
차라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그에 맞춰서 대응을 할 텐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은 영국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혜택을 내밀었다.
EU는 영국의 최대교역국. 막상 브렉시트를 결정하긴 했지만, 북아일랜드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듯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영국은 일단 EU를 떠나더라도 관세동맹은 유지하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인력의 이동은 막되 상품의 이동은 계속하겠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하고 불리한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체리피킹 같은 행태를 EU가 가만히 지켜볼 리 없다.
EU는 단일시장에 남아 있고 싶으면 대가를 치르라고 영국을 압박했고, 메이 총리는 분담금 390억 파운드를 비롯해 각종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EU와 합의했다.
그런데 영국 하원은 이 합의안이 굴욕적이라며 부결시켰고, 메이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 것은 전 런던시장 보리스 케인.
브렉시트 강렬 지지자인 그는 영국에 나쁜 협상은 하지 않겠다며 노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였고, EU는 EU대로 추가협상이나 협상 연기는 없다고 못 박았다.
다들 ‘설마 노딜 브렉시트가 일어날까’ 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생겼다.
이 문제가 3년을 넘게 끌다보니, 정치권이고 국민이고 지치다 못해 이제 진저리가 나는 기색이었다.
이제는 대체 그 투표를 왜 한 건지, 영국이 정말로 EU를 나가긴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카즈요 사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투표를 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죠.”
메이 전 총리의 말처럼 브렉시트는 브렉시트를 의미한다.(Brexit means Brexit) 그것 외에 또 뭐가 있겠는가?
노딜 브렉시트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과 EU의 경제규모를 생각했을 때, 만약 현실화된다면 국민투표 당시와 마찬가지로 세계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몰고 올 것이다.
아킷 본사에서 회의가 이어지는 사이, 기자들은 내가 있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내가 브렉시트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처럼 영국의 미래에 대해 정답 또는 해답을 내놓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큰 이슈가 될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말 한마디로 영국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국의 정치인, 기업인, 상원 귀족들이 만남을 요청해 왔다. 난 일정이 있다는 핑계로 요청을 전부 거절했다.
실제로 일정이 있기도 하고.
호텔에는 서신이 한 장 도착해 있었다. 봉투는 밀랍을 녹여 봉인했고, 그 위에는 인장을 찍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열어보니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G.R.’ 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영국인들은 원래 이렇게 고전적인 걸 좋아하나?
* * *
난 기자들의 눈을 피해 호텔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 경호원과 함께 안에 타고 있던 올리버 테일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제가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밖으로 새나갈 일은 없겠죠?”
“물론입니다. 대표님의 행적은 철저하게 비밀이 보장됩니다.”
난 주소를 내밀었다.
“여기로 가주세요.”
주소를 확인한 테일러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출발을 지시했다.
차는 버킹엄셔의 주도 에일즈베리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후 도착한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한적한 마을의 언덕에는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나무에 가려져 저택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입구를 찾기 위해서는 철조망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입구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난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강진후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내 얼굴을 확인한 이들은 바로 무전기를 들어 어딘가로 연락했고, 철문을 열어주었다.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철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정원이 펼쳐졌다.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 조각상들, 잘 관리된 나무와 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법한 대저택이 서있었다.
입구에서 저택까지는 또 한참이었다.
이 저택이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말.
당시 로스차일드 가주가 200에이커 넘는 부지를 매입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후 주변 부지를 포함해 다른 저택과 고성들은 영국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 대저택은 여전히 로스차일드 소유였다.
요즘 시대에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유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고성들이 있고,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기도 한다. 피카소 역시 말년에는 성에 살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성을 사들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체 이런 데서 살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지만 성에 사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다. 관리 문제도 있고, 냉온풍, 실내동선 등등.
게다가 드넓은 정원과 대저택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이런 데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자니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위치다.
성은 대부분 외곽이나 시골에 있고, 교통이 불편하다. 그래서 요즘 부자들은 도시 한복판의 펜트하우스를 선호한다.
뭐, 아예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면 상관없으려나?
생각을 하는 사이 차가 멈춰 섰다.
난 차에서 내렸다. 정문 앞에는 집사로 보이는 백인남성과 함께 젊은 여성이 나와 있었다.
금발에 새하얀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양손으로 치마 끝을 잡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서 오세요. 로스차일드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중세풍의 외관만큼이나 실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높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걸려 있고,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이깔려 있고, 벽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림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난 그레이스 로스차일드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저택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형태다.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한 세월일 것이다.
대체 이 넓은 집에서 몇 명이나 살고 있는 걸까?
그녀는 동관 끝에서야 걸음을 멈춰 섰다. 문 옆에는 정맥 인식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위에는 CCTV가 달려있다.
고풍스런 모습과는 별개로 첨단장비를 쓰고 있다. 하긴, 사람이 계속 살았던 만큼 문명의 발전에 따라 하나씩 바뀌었겠지.
스마트폰을 꺼내보니, 데이터와 와이파이도 잘 잡힌다.
그녀가 손을 올려 정맥을 인색하자 잠금이 풀렸다.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나를 반겼다.
그곳은 서재였다. 아니, 서재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에는 빛이 바랜 낡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지 책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끝쪽에 있는 책상과 의자는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보다는 박물관 같은 곳에 보내야할 것 같은 엔틱가구들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온 외부인은 흔치 않아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영광이죠.”
유리 진열장 안에 빛이 바랜 책 한권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오밀조밀하게 적힌 철자는 읽을 수가 없다. 라틴어인가?
“이 책은 뭔가요?”
그레이스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구텐베르크 성서예요.”
“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교과서에서 봤었나?
“진품인가요?”
“복제품 같아 보여요?”
멍청한 질문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는 무려 250년.
그 사이 그들은 유럽 내에서 수많은 그림과 조각품, 문화재 등을 사들였다. 그중 일부는 다시 팔거나, 각국 정부에 기증했지만,상당수는 아직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대해 알고 있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한국에서는 금속활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은 우리 조상들이지만, 큰 의미는 없다.
기술이란 누가 최초로 만들었느냐보다,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느냐가 중요하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최초로만들어졌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이력이 없다. 세상에 끼친 영향의 범위가 작기 때문이다.하지만 구텐베르크는 현대 인쇄술의 아버지다.
그는 금속활자뿐 아니라, 인쇄기, 인쇄에 적합한 종이, 인쇄에 적합한 잉크 등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냈다.
그렇게 제작한 인쇄기는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놓았다.
인쇄기가 생겨나기 전까지 책 제작은 숙련된 식자층에 의한 필사에 의존했고, 책 가격은 귀족이나 부호가 아니면 접하기 힘들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인쇄기 덕분에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렸고, 모두가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인쇄기로 처음 찍어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구텐베르크 성서다.
당연하지만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경매에 내놔도 1천만 달러 이상은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책은 대략 50권 정도.그중 한 권이 여기 있었나?
“그는 인쇄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어요. 다행히 요한 푸스타라는 부자가 돈을 빌려주었지만 그는 제때 돈을 갚지 못했어요. 재판에 져서 인쇄기와 기술을 전부 빼앗기고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죠.”
인쇄기는 분명 혁신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신기술이 바로 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자가 베껴서 내놓는 바람에 타격을 입거나, 상용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느라 뒤늦게 빛을 보는 경우도 많다.
기술 확산속도가 느린 과거라면 더더욱 그러했겠지.
“세상에는 뛰어난 발명가들이 많아요. 그중에는 성공해 부를 이룬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몰락해서 사라졌죠.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자본을 댄 투자자예요. JP모건이 에디슨과 카네기에게 투자한 것은 유명한 일화고, 당신 역시 그렇잖아요.”
전기차를 만든 데릴 세이건, 페이스잇을 만든 토비 스트롱과 제라드 베이컨, 그리고 OTK배터리를 만든 김호민 교수 등등.
모두가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지만, 정작 가장 많은 돈을 번 것은 그들에게 돈을 투자한 나다.
“로스차일드는 어떤가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얘기를 하는데, 잘생긴 외모의 젊은 백인남성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휠체어에 앉아있는 노인이었다.
새하얀 백발은 몇 가닥 남아 있지 않고, 주름 가득한 얼굴은 검버섯이 피었다.
체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왜소하고, 다리는 신체에 비해서도 작고 기묘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다친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듯하다.
코에는 산소호스가 이어져 있었다. 이런 도움 없이는 혼자서는 숨 쉬는 것도 힘든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장을 갖춰 입고, 구두까지 신었다. 놀라운 것은 눈빛이었다. 스러져가는 육체와는 달리 그의 눈은 마치 소년처럼 또렷한 빛을 발했다.
그러한 모습에서 어떠한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그는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반갑네. 드디어 만나게 됐군. 난 그랜트 데럴 로스차일드라고 하네.”
그레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사람이 바로 로스차일드라는 거대 금융가문을 이끄는 가주인가?
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진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