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53)
개강 전에 현주 누나와 엘리를 만나러 홍콩에 한 번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골든게이트 아시아 지사장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잘 모르지만, OTK컴퍼니가 현주 누나의 고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계좌개설 때부터, 이후의 일까지 전부 현주 누나를 통해서 처리했으니까)
그래서 누나를 통해 넌지시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왔고,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나 역시 그를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체이스 사우스웰입니다.
우리 역시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진후입니다.”
“안녕하세요. 오택규예요.”
우리는 수십 명이 앉아도 될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서로 보이는 남자 직원이 커피와 차를 내왔다.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지사장님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노인은 유쾌하게 말했다.
“직함보다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더 좋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현주 누나와 엘리는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다. 한국기업이나 외국기업이나 사장과 함께 있으면 불편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무리 현주 누나라고 해도 지사장과 따로 만나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 역시 괜히 긴장되는 것 같다.
“오오! 여기 전망 되게 좋다. 홍콩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누나 엄청 좋은 곳에서 일하는구나.”
“······.”
무슨 엄마 직장에 놀라온 아기도 아니고.
현주 누나가 조용히 하라는 듯 미간을 찡그리자, 택규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체이스는 웃음을 지었다.
“일 때문에 만난 자리도 아니니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택규는 영어로 넉살 좋게 말했다.
“그렇죠? 우리 누나는 너무 까칠하다니까요.”
현주 누나는 아까보다 더 인상을 썼지만, 지사장 앞이라 아무 말도 못했다. 자신감이 붙은 택규는 농담 섞인 말을 건넸고, 체이스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저 누나한테 맨날 혼나는 거 아세요?”
“허허, 저도 집에 가면 와이프에게 자주 혼납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사람 좋아 보이는 외국 할아버지 같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골든게이트에는 대주주이자 CEO인 제임스 C. 골드맨을 포함해 총 다섯 명의 헤드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아시아지사를 책임지고 있는 체이스 사우스웰이다.
그는 아시아 금융계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전설적인 금융인.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금융이 아니더라도 시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가끔 뉴스에 언급되기도 하고.
체이스는 아시아가 성장하던 80년대 후반에 홍콩으로 왔다. 그리고 능력을 검증 받아 10년 만에 지사장의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터졌다.
당시 롱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골든게이트는 큰 손실을 봤고, 주주들은 아시아에 대한 투자 비중을 축소하길 원했다.
그는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오히려 아시아는 잠재력이 큰 시장이고,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투자를 늘릴 적기라고 역설했다.
CEO인 제임스는 체이스의 의견에 공감했고, 적극 지원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폭락한 채권과 주식을 대량 매입할 수 있었다.
몇 년 안 돼 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무사히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골든게이트는 엄청난 수익을 거뒀다.
현재 골든게이트가 아시아시장에서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 할아버지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지사가 한국 시장을 직접 관할하고 있는 만큼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지금도 한국에 대한 골든게이트의 투자는 전부 그의 손을 거쳐서 이뤄진다.
개인자산은 우리보다 적겠지만,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는 말 한마디에 수백억 달러를 움직일 수 있다.
만약 그가 한국에 대한 투자규모를 축소하거나,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면, 당장 한국 증시는 요동을 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단한 존재가 왜 우리를 만나자고 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도 어느 정도 거물이 되었기 때문이지.
* * *
1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우리는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했고, 많은 것들을 보고 익혔다.
나는 세계와 금융에 대해 끊임없이 배웠다. 영어도 세련돼져서 이제는 엘리가 듣고 발음과 표현이 좋다며 칭찬할 정도였다.
다행히 택규도 그럭저럭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인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12년에 걸쳐 영어를 교육받는다. 덕분에 필수 단어와 간단한 어휘는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다만 꺼내서 쓸 방법을 모를 뿐이지. 그 덕분인지 1년 정도 작정하고 하니, 웬만큼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우리가 놀러 다니며 공부하는 사이 세계경제는 빠르게 변화했다.
일부에서만 쓰이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동안 벌어질 변화가 지난 100년 동안 벌어진 변화보다 클 거라고 예측했다.
정부고 기업이고 할 것 없이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래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스타트업은 꿈을 먹고 자란다. 당장 수익을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앞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걸 보여주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투자한 기업들 가운데 현재 흑자를 내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오히려 매년 엄청난 적자를 발생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제발 투자해달라고 사정해도 거들떠도 안 보던 투자자들이 어느 시점부터 제발 투자하게 해달라며 투자금을 싸들고 찾아왔다.
기업이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수익을 내거나, 대출을 받거나, 외부에서 투자금을 조달해 와야 한다.
스타트업의 초기투자는 창업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매각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 이후의 투자는 과정이 조금 복잡하다.
이전에는 창업자와 투자자 양자의 일이었지만, 이후에는 창업자와 초기 투자자, 신규 투자자 셋의 일이기 때문이다.
추가투자는 일반적으로 신주발행 형식으로 이뤄진다.
기업이 일정 퍼센트의 주식(지분)을 새로 발행하고, 그것을 신규 투자자가 매입하는 형식으로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 투자자들의 지분율은 그만큼 희석된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 50퍼센트의 지분이 10퍼센트 이하로 축소되는 일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는 투자 계약을 맺을 당시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신주 발행에 대한 제한과 우선 인수권을 갖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헐값에 신주를 발행해 지분율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수십 개의 스타트업들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 곳을 하나 뽑으라면 놀랍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페이스잇이다.
페이스잇은 우리에게 받은 투자금으로 서버를 구축하고 제작사들과 제휴를 맺었다. 이용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데이터가 쌓이며 추천 알고리즘은 더욱 정교해졌다.
더 이상 보고 싶은 포르노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질 필요 없이 페이스잇에 들어가 좋아하는 배우와 취향을 입력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불과 1년 사이 페이스잇은 세계 포르노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다. 구블을 비롯한 포털사이트에 포르노를 검색하면, 바로 페이스잇 사이트가 뜰 정도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눈여겨본 미국의 유명 컨텐츠 업체는 인수를 제안했다. 제시금액은 무려 4억 달러.
페이스잇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몇 개월 후 10퍼센트의 신주를 발행해 매각하는 형태로 사모펀드에서 9500만 달러를 투자 받았다. 그쪽에서 페이스잇의 가치가 9억5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지분은 48퍼센트에서 43.2퍼센트로 줄어들었지만, 대신 지분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
비슷한 일이 수십 개의 스타트업에서 차례대로 벌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투자를 희망했고, 어떤 곳에서는 인수를 희망했다.
아마 투자자들도 황당했을 것이다.
괜찮아 보이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려고 보면,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 이미 상당수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IB, 헤지펀드, PEF, 국부펀드, 대기업 할 것 없이 OTK컴퍼니의 사명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 우리가 투자한 기업들의 가치를 다 합치면 대략 100억 달러 정도로 평가 된다.
6000억이 무려 11조 원이 된 것이다.
물론 비상장기업들은 가치측정이 쉽지 않은 만큼, 어디까지나 추정치가 그렇다는 거다.
* * *
체이스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OTK컴퍼니를 움직이는 두 거물이 제시카의 동생과 그 친구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난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재작년에 한국 시장에서 옵션 투자로 6억 달러를 벌었을 때만 해도 좀 놀라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극히 위험한 투자 방식이었고, 누구에게나 한 번쯤 따르는 행운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OTK컴퍼니의 행보를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
습니다.”
그는 숏 포지션보다는 저가매수 후 장기보유라는 롱 포지션의 투자방식을 선호한다. 때문에 우리가 저평가된 스타트업의 지분을 발 빠르게 매수한 점을 높게 평가하는 듯했다.
보통 스타트업 투자는 10개 중 중 한두 개만 성공해도 대박으로 친다. 그러나 우리는 10개 중 아홉 개를 성공시켰다. 나머지 하나도 아직 두각을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누군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워렌 보트가 50년 동안 꾸준히 수익을 내고, 조지 소로스가 외환시장에서 전설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해서 누구도 그들에게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시장을 보는 시각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뿐이지.
때문에 체이스는 순수하게 나의 재능에 대해 감탄했다. 칭찬을 계속 듣다보니 조금 양심이 좀 찔리는 기분이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골든게이트의 체이스 사우스웰을 직접 만났다고 하면, 모두가 부러워할 겁니다.”
아시아의 전설적인 투자자와 만날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에 상엽 선배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안타깝게도 업무 때문에 바빠서 같이 못 왔지만.
“제가 다니는 대학교의 학과장이 열렬한 팬입니다. 학부생들은 물론 동아리 사람들도요.”
내 말에 체이스는 기뻐했다.
“정말입니까? 그럼 진후의 학교에 가서 사인회라도 해야겠군요.”
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주최해보겠습니다.”
“허허, 덕분에 휴가 내고 한국에 놀러갈 핑계가 생겼네요.”
우리는 두 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자 금융에 대한 주제보다는 그냥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택규는 최근 어떤 영화가 재밌고 어떤 게임이 유행하는지 떠들었고, 체이스는 교수로 일하는 아들부부와 쌍둥이 손녀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가한 우리와는 달리 그는 스케줄이 많았다.
체이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후 행보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골든게이트는 앞으로도 OTK컴퍼니와 함께 하기를 희망합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제시카가 골든게이트와 OTK컴퍼니를 이어주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녀는 양쪽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사장의 칭찬에 현주 누나는 어색한 헛기침을 했고, 택규는 ‘누나가 참 소중하지. 그럼그럼’ 하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미팅 끝난 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다.
“아마 올해 안에 서로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소식인가요?”
내 물음에 그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