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20)
120 이글거림
회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수다를 떠는 것은 봄과 함께 찾아온 3월의 여유가 주는 선물이다.
쏟아지는 일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던 직원들 표정이 이제는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라고 얘기하고 있다.
나는 나대로 여유 부리면서도 밀린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이번엔 또 다른 동업자인 우리 상무와 수다를 떨 시간이다.
상무 방은 다산콜센터가 따로 없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전화로 해결하니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 온다. 전화는 뻔하다. ‘급한데 빨리 해 줄 수 있냐’와 ‘많이 샀으니까 좀 싸게 해 줘’, 이 두 문장.
전화가 끝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상무님! 이제 관수 널널해졌습니다. 다시 시동 걸어야죠!”
“관수 발주량 보니까 그래야 할 것 같더라고. 슬슬 한 부장 데리고 거래처 돌면서 달려야지!”
상무가 리드미컬하게 받아치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원래 자신감이 넘치긴 했지만, 최근 들어 더 넘치는 모습이다.
“얘기 들으셨겠지만, 올해는 민수에서도 승부를 볼 생각이에요. 민수에서도 매출 크게 늘려 보자구요.”
“그래야지! 관수만큼은 못하겠지만 민수도 제 몫을 해야지. 한 부장이 벼르고 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난 한 부장 확실히 가르쳐 놓고, 폴리머부싱이나 팔러 다녀야겠어. 하하.”
상무도 사장이 된다는 기대감에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러냐며 사장 제의를 마다했었지만, 사장 의자에 앉을 기분이 싫진 않을 것이다.
사장이라고 해도 대우는 상무와 다르지 않다. 그래도 사장이라는 명칭이 주는 기쁨은 상무 따위에 비할 바가 못 되지. 마냥 좋을 것이다. 상무님도 한번 겪어 보셔. 사장 자리가 마냥 좋은 자리만은 아닙디다.
“상무님, 이제 사장 달고 나면 차 한 대 좋은 놈으로 뽑으시죠?”
“하하. 에이, 내가 그럴 수 있나. 우리 사장님보다 좋은 차 타면 욕먹지. 아직 차 쌩쌩한데 좀만 더 타고 생각해 볼게. 사장님이나 차 바꿔. 사장이 좀 좋은 차 타고 다녀야 직원들도 어깨를 펴고 다니는 거야.”
“차가 뭐 차죠. 저는 차 욕심이 없어서 지금 걸로도 만족합니다.”
뚜벅이 생활을 오래해서 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좋은 차를 봐도 그냥 무덤덤하더라.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집돌이라서 그런가?
“부싱 공장이 다음 달엔 착공 들어가니까 완공되는 6월까지는 양산 준비 다 끝내 두셔야 합니다. 뭐 어련히 잘하시겠지만요. 하하. 본사 납품이 가장 중요하지만, 판매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준비 단단히 하셔야 할 거예요.”
“그제 안성파워 최 이사 왔었잖아? 대충 얘기해 보니까 부싱 규격이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 우리가 다 맞춰 주기로 했으니까 잘 만들어 줘야지. 최 부장한테 규격 얘기해 놨으니까 설계 잘 뽑아 놓을 거야.”
“잘하셨습니다. 근데 안성파워 단가는 어때요?”
“부지런히 견적 뽑아 봐야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서로 기분 안 나쁠 수준으로 결정해야겠지 뭐. 우리야 많이 받으면 좋지만, 사는 쪽은 그게 아니잖아? 하하.”
이제 사장이 될 우리 상무. 막힘없이 술술이다. 20년 넘는 짬밥과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상무를 듬직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시간 날 때마다 태인산업 가서 윤 사장님이랑 거기 직원들하고 친분도 쌓아 두세요. 앞으로 서로 지지고 볶을 사이 아닙니까?”
“잘 알겠습니다, 사장님. 안 그래도 부산 가서 태인산업 직원들하고 술도 한잔해야지. 조합 회원사들이랑 미팅 다 끝냈고, 공장 완공되면 바로 납품 들어가야지.”
“아시겠지만, 생산이 잘되려면 자재 업무가 진짜 중요해요.”
“그럼, 그럼. 안 그래도 윤 사장님이랑 얘기해서 직원도 늘려야지. 윤 사장님이 뭐 상무 되겠다고 해도 사장 대우는 해 줘야지. 그나저나 설비나 빨리 만들어 주셔! 아니지. 내가 유 이사를 들들 볶아야겠구만.”
운 좋게도 내 예상이 맞았다. 마냥 욕심 없어 보였던 상무 눈에도 욕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넘치는 자신감이 월급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사장 임명이 상무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을 이끌어 낸 것 같아서 흐뭇하다.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내가 잘못 봤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도 됐다. 정말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을 가능성 말이다. 역시 난 인복이 있는 사람이야.
“상무님!”
“응?”
“김희철 사장님!”
“응? 왜 그래?”
“화이팅입니다!”
“하하. 싱겁기는.”
나도 파이팅 할 테다. 내 욕망을 잠재우지 않겠다.
나 역시 이글거리며 사무실로 복귀하려는데, 저기 구석에 쭈그려 담배 피우는 덕준이가 보인다.
며칠 전 그 모습과는 아주 달라진 얼굴이다. 며칠 전엔 ‘뭐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씻고 영화나 보러 가자’며 개운하게 한 대 빠는 표정이다.
“아이고, 한 부장님. 아주 얼굴이 폈네?”
“이야. 이제 좀 살 것 같다야. 일루 와서 담배나 피워.”
아침에 변기와 만나기 전 맥심과 함께 피우는 담배도 꿀이지만, 고되고 길었던 일을 마치고 피우는 담배야말로 진짜 아카시아꿀 맛이다.
“3월 발주 들었지? 거봐. 내 말대로 3월부터는 살 만해진다니까?”
“아까 아름이가 얘기해 주는데 좋아서 껴안을 뻔했다니까.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더라. 나 진짜 저번 달 내내 잡부 노릇한 거 알고 있지? 이놈들이 처음에는 한 부장님, 한 부장님 하더니 나중에는 막 부려 먹더라니까.”
“얼마나 좋은 회사냐? 평사원이 부장 부려 먹고. 고생했다야. 고생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영업으로 달려야지?”
“하여간 노는 꼴을 못 봐요. 뉘에뉘에, 중소기업 사장님. 영업 직원이나 빨리 뽑아 주시죠. 이번 달부터 아주 달릴 테니까 길만 잘 닦아 주쇼.”
저렇게 투정을 해도 하라는 것은 아주 잘해 내는 덕준이다. 그럴 의지와 능력을 갖췄지만, 친구랍시고 한두 마디 물고 늘어지는 것도 덕준이다.
“좋아, 아주 좋아. 근데 금성전기 거래처는 건드리지 말고. 둘이 힘 합쳐서 시장 정화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뭐? 오호라. 그건 좋네. 큰 회사랑 싸워 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지.”
“금성전기 영업 담당이랑 친하게 지내. 나이가 좀 있긴 한데, 사람이 괜찮다고 하더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덕준이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만있으면 한덕준이가 아니지.
“근데 그 연예인랑 그 약속만 한 거야? 뭐 다른 약속은 안 했어? 아름다운 미래라든지, 가족계획이라든지.”
“또 시작이군. 그래,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기로 했다. 됐냐? 난 사무실 들어간다. 쉬엄쉬엄하면서 일 해.”
앞으로는 덕준이와 이런 잡소리를 포함한 온갖 소리를 나눌 시간이 줄어들 것 같다. 못내 아쉽다.
서로 담배 피우면서 아무 말이나 막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큰 낙이었는데…… 덕준이의 성장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내 말동무라는 빈자리는 쉽게 채워질 것 같지 않다. 감내해야지 뭐.
아쉬움 가득한 채로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계단을 밟고 올라서던 허벅지가 찌릿하면서 떨려 왔다. 누가 핸드폰 진동 소리를 내었는가!
“네, 부사장님!”
“사장님, 그간 많이 바쁘셨죠?”
대한전력 이춘배 부사장 전화다. 이제 거대 공기업 부사장 정도와 통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회사가 커질수록 상대방의 급이 달라진다. 그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그러나 회사의 격이 높아졌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다.
“대한전력 때문에 2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하하. 저희도 욕 많이 먹었습니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욕을 먹더라도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지요. 전력 계통 쪽이 갑자기 확 물량이 늘어날 때가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이고, 당연히 이해하지요. 대한전력 덕분에 먹고사는데 불만이 있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사장님께서 폴리머부싱을 채택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강호창 사장이 대한전력에 언급이라도 하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돌아오는군.
“네, 맞습니다. 납품하고 나서 제일 문제가 부싱 파손으로 절연유가 유출되는 것이라서, 예방 차원에서 모든 제품에 폴리머부싱을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단가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잘하셨습니다. 최근에 부싱 파손 때문에 지역본부에서 말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한시름 놔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저희도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이라 준비가 좀 걸립니다. 그래도 6월 납품분부터는 폴리머부싱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변압기혁신조합 회원사들도 다 같이 폴리머부싱을 쓰기로 했으니 앞으로 부싱 깨지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이거 사장님께 자꾸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야 대한전력도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뭔가 선물을 줄 것처럼 하면서 고맙다는 소리만 하는 것을 보니, 진짜 감사 인사만 하려고 전화한 모양이다. 살짝 아쉽긴 해도 매번 선물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장님, 제가 뭐 해 드려야 하는데, 딱히 해 드릴 것이 없네요.”
“제가 뭐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양산 마무리되시면 우리 회사 애자류 입찰도 한번 해 보시죠? 애자류 입찰이 12월에 있는 것 알고 계시죠? 입찰 규모가 400억 정도 되니까 잘만 하시면 꽤 도움이 되실 겁니다.”
내가 알기론 현수애자, 라인포스트애자, 노오손결합애자가 대한전력에 들어간다. 전봇대 보면 전선 사이로 달려 있는 커다란 애벌레 같은 물체가 그것이다. 그쪽은 대형 2개사가 물량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듣긴 했는데…….
“네,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단가야 사장님께서 어련히 잘 맞추시겠지만, 폴리머로 들어가면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폴리머로 들어갈 경우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데, 한번 잘 생각해 보시죠. 아주 애자 깨지는 것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변압기 말고도 폴리머부싱 적용을 확대해 달라? 가산점도 주겠다? 못할 이유가 없지.
좋은 것 알면서도 단가 때문에 확대가 늦어지고 있는데, 내가 도기 애자랑 차이 없는 가격에 들어가면 시장 석권은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덩치가 크지 않지만, 잘만 하면 꽤 짭짤할 간식이 될 것 같다.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사장님한테 도움 많이 받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참, 애자류도 지역배정 있는 것 알고 계시죠? 아직 나주로 내려온 업체 없으니까 올해 준비 잘해 보세요.”
400억짜리 입찰에서 20퍼센트면 80억은 먹고 들어가겠군. 아직 제대로 발을 담그지 않은 분야라 걱정이 앞서긴 하는데, 12월이면 공부하며 준비할 시간 충분하다. 태인산업도 제대로 일으켜 보자고!
봄이 오면 몸이 나른해지면서 나태해지기 마련이지만,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이 먹음직스러워 나태해질 틈이 없다. 직원들은 이제야 여유를 즐기겠지만, 난 계속 달린다.
대한전력 2월 2차 발주까지 겨우 맞추고 나니, 예상대로 공장에 평화가 찾아왔다.
설비제작부서는 여전히 단내를 품기고 있지만, 생산부서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원래 하던 물량으로 돌아왔지만, 전달에 너무 많이 만들다 보니 3월에 만들 양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여유가 생기니 직원들도 봄을 즐기기 시작했다.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연차를 내고 놀러 가는 직원들도 부쩍 늘었다. 그동안 못 쉬었고 야근 수당으로 월급 두둑이 챙겼으니, 남은 일은 신 나게 놀러 다니면서 돈 펑펑 쓰는 것뿐이지.
이런 걸 두고 승수 효과라고 하나? 여기서 번 돈으로 부지런히 놀러 다니면서 돈 많이 쓰고 다니길. 돈이 돌고 돌아야 경제도 좋아지고, 그래야 변압기 수요도 늘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