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36)
136 체험과 변화
내 나이 서른셋. 이 나이 먹도록 비행기는 딱 두 번 타 봤다. 고등학교 때 제주도 수학여행으로 갈 때와 올 때.
수학여행도 못 갈 뻔했다. 아빠가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3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부담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 나라님도 구제 못하는 가난. 담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비행기는 나와 관련 없는 운송 수단이었다. 당연히 여권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랬던 내가! 여권을 만들기 위해 나주시청을 간다! 이번에 중국 갈 때 최소한 비즈니스석 정도는 타 주겠다!
떨리는 손으로 여권 신청 서류를 작성했다. 호기롭게 10년짜리로 신청했다. 그동안 못 탔던 비행기 질리게 탈 테다. 넉넉하게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하니 출장 전엔 충분히 나오겠군.
여권 신청을 끝내고 차를 시청 근방에 있는 여행사로 돌렸다. 로타리클럽 회원이 운영하는 곳이니 상부상조해야지.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지 사장, 어서 와.”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 지 사장이 직원 여행도 안 보내 줘서 힘들지 아주. 하하.”
내가 여행사 모집책도 아닌데, 멘트하고는. 로타리클럽 봉사 활동도 자주 나오고 좋은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가까이하기 좀 꺼려지는 사람이긴 하다. 뭐 그래도 같은 회원끼리 돕고 살아야지.
“제가 직원들한테 여기랑 파트너십 맺었으니까 잘해 줄 거라고 홍보해 놨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직원들 해외여행도 보내 줄 생각이니까 잘 좀 해 주세요.”
“고마워, 고마워. 그냥 한 소리도 꼭 저렇게 받아 준다니까.”
여행사 사장 얼굴이 5월 장미꽃 피듯 환해진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은근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 칭찬해 주며 변압기 팔아 주니 말이다.
저 사람을 비롯해서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꾸준히 입소문을 내 준 덕에 나주 인근 공장으로 나가는 변압기가 하나둘 늘고 있다. 운송비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짭짤하다. 나주에 퍼지는 나에 대한 좋은 소문은 덤이고.
“그나저나 바쁜 사람이 무슨 일이야?”
“네, 중국 출장 가는데 비자 대행 좀 의뢰하려구요.”
“이야, 이제 사업이 세계로 뻗어 나는 거야? 하하. 당장이라도 해 줘야지. 내가 최대한 빨리 나오게 해 줄게. 일단 신청서 쓰고, 여권이랑 증명사진은 가져왔지?”
여권! 부끄럽다. 비자 만들려면 여권이 있어야 하는구나. 처음으로 해외 나간다는 기분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오두방정을 떨었네.
“이런, 제가 해외는 처음이라 그걸 몰랐네요. 민망하네요.”
“여권도 없어? 아니, 돈 잘 버는 양반이 해외여행도 안 가 보고 뭐 했어? 아휴, 우리 지 사장, 일만 하면서 살았구만?”
“하하.”
민망해서 그냥 웃음만 나왔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단히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을 실수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휴,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지 사장 바쁜 것이야 이 동네 사람이 다 아는데, 바쁘게 살면 해외 못 나갈 수 있지 뭐. 여기까지 왔으니까 차나 한잔하고 가.”
종이컵에 진하게 탄 맥심 한 잔이 놓여졌다. 이 정도 농도라면 담배 한 대와 찰떡궁합이다.
“지 사장. 나도 사업해 보니까 돈 벌어도 쓸 시간이 없더라니까. 물론 펑펑 쓸 정도로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형님은 여기저기 많이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진짜 억지로라도 짬 내서 해외 한 번씩 나가는 거야. 그렇게라도 나가니까 좋더라고. 세계테마기행 열심히 본들 직접 눈으로 보면서 체험하는 것만 못하지.”
“회사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유가 없긴 했습니다. 이제 해외여행도 자주 다녀 봐야죠.”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나 같은 구멍가게 사장이 할 얘기는 아닌데, 견문을 넓혀야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대학 때 들었던 한국사 교양 수업이 생각난다. 지지리 재미없는 예송 논쟁을 설명하던 교수가 윤선도를 언급하며 흥분했던 모습이 생생하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살면서 섬 전체를 하나의 정원으로 삼았다는 설명이었다. 졸음과 싸우며 한 귀로 흘리다가 잠이 번뜩 깼다. 보길도 전체를 개인 정원으로 삼은 윤선도의 스케일 큰 체험이 그를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신선했다.
체험을 넘어선 사고가 어렵다는 것이 그 교수의 조언이었다. 지난 삶의 체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체험을 넘어서야 한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해외에 자주 나가서 견문을 넓혀야겠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나갈 생각이니까 형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그럼! 우리 지 사장이 나주 와서 좋은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뭐 어려운 것이라고. 어제 강 교수가 근처 왔다가 들렀어. 자네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원. 나도 소문 많이 내 줄게. 하하.”
이 동네의 정보 확산의 메커니즘을 확인하는 자리다. 형태는 입소문이지만, 속도는 곧 상용화된다는 5G급이다. 5G 통신사급 속도를 자랑하는 로타리클럽. 월 회비 5만 원이 아깝지 않다.
“좋은 일은 남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이 동네는 소문이 너무 빠릅니다. 하하.”
“나중에 시의원이라도 나가 봐. 지 사장이라면 백 프로 득표야.”
“우리 지구에서 국회의원 냈으면 됐죠. 전 사업에만 전념하렵니다. 그나저나 형님, 이번에 선거 운동 힘드셨죠?”
저번 총선 때 최대근 사장 당선을 위해 로타리클럽 회원 몇 명이 열성적으로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중 한 명이 여행사 사장이었다.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남의 일에 팔 걷고 뛰어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방 소도시 공동체의 끈끈함이 이런 것이겠지.
“힘들었고말고. 그래도 대근이 형님이, 아니지. 우리 최 의원님이 나한테뿐만 아니라 이 동네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뉴스 보니까 산자위로 들어갔더라구요. 다른 형님들 얘기 들어 보니까 지역구 예산 챙기기 좋은 국토위 들어갔으면 하던데,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의원님은 어디서든 우리 지역 잘되라고 힘쓸 사람이니까 잘하겠지. 산자위로 들어갔으니까 지 사장은 도움 좀 받겠네? 종종 안부 전화라도 하면서 자꾸 어필을 해야 해! 그래야 힘 좀 써 주지.”
“에이, 전 그런 거 일절 기대도 안 합니다.”
산자위의 핵심 피감기관이 대한전력이라 살짝 기대도 된다. 최대근 의원이 우리 회사에 도움 주는 의정 활동을 하면 좋지만, 그렇게 해 달라고 굽실거릴 이유는 없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래도 인연이 있으니까 재미 보면 좋은 것 아니야? 의원님 덕분에 회사 잘되면 한턱 내라고. 하하.”
좋게 보면 공동체의 끈끈함이지만, 나쁘게 보면 오지랖이다.
내가 내 힘으로 회사 잘 꾸려 가고 있는데,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네. 커피도 다 마셨겠다, 이쯤에서 일어나자. 더 얘기하다간 선을 넘을 것 같은 느낌이다.
“형님,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벌써 가려고? 그려, 뭐 바쁜 사람이니까. 여권 나오면 바로 찾아와.”
여행사를 나와 담배 하나 꺼내 물었다. 맥심 진하게 마셨으니 이거 하나 피우고 나면 입 냄새 장난 아니겠군.
흔히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만, 좋은 모습을 보일 때만 좋은 사람이다.
깊이 엮이면 안 좋은 모습 보이는 사람도 많다. 그런 모습 보고 나서 실망해 봐야 나만 손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겪어 보니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더라.
회사로 복귀하니 덕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평소엔 거래처 돈다고 바쁜 척하더니, 저 자식, 저거.
“사장님, 비자 만드셨어? 비자 만들기 쉽지?”
이 자식! 알고 있었으면 얘기를 해 줬어야지.
“그럼! 이 나쁜 놈의 새끼야, 신청서 쓰니까 바로 나오드라.”
“아아아!”
덕준이에게 헤드락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회사 키운다고 바삐 사느라 덕준이 목덜미를 감아 주는 일에 소홀했군.
“아따 마, 비행기 탈 때 신발 벗고 타라고 했으면 암바라도 걸었겠네.”
“아오. 넌 이코노미야. 난 내 돈 보태서 비즈니스 탈라니까 좁은 좌석에서 편안한 비행 즐기라고.”
“있는 것들이 더한다더니만. 그나저나 그 수입상 있잖아, 김 사장이 내일 여기 온다네?”
덕준이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비행기 얘기를 시작으로 입가에 흰 거품이 붙을 때까지 떠들 놈인데, 딱 끊고 일 얘기로 넘어가네. 뜻을 세우는 나이인 30대에 들어서니 바뀌기도 하는구나.
“잡담이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운데? 근데 그 사장은 왜 온다는 거야?”
“변압기 수출 얘기했더니 찾아오겠다고 그러네?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하더라고. 직접 한번 가 보려고 했는데, 오겠다고 하니 나야 뭐 땡큐지.”
“그 사람 되게 적극적이네?”
“에이전트 케이 그 사람도 있지만, 루트가 다양하면 우리야 좋은 것 아니겠어? 내가 바람 좀 불어넣었지. 그래도 그 사장이 예전부터 우리랑 같이하는 걸 좋아하더라고. 우리가 돈 좀 벌게 해 주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이전트 케이 나와바리랑 같잖아.”
“그러고 보니까 김 사장 나와바리가 난퉁이라고 했지?”
“그치. 둘 다 장쑤성에서 활동하잖아. 둘 다 활용해도 좋고, 아니면 서로 비교하면서 좋은 조건인 데로 선택해도 좋고.”
20대 때의 망나니 같던 덕준이의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어졌지만, 번뜩번뜩함은 그대로네. 다행이다.
“좋네. 준비야 하면 할수록 좋지. 둘 다 잘돼서 물량 빵 터지면 더 좋고. 잘 했으니까 중국 갈 때 비즈니스석으로 가는 것 고민해 보겠다.”
간만에 수다 좀 떨 생각으로 다시 비행기 화두를 던졌는데, 덕준이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몸을 움직일 채비를 한다. 변했어, 이 자식.
“나도 그 정도 돈 있거든요? 암튼 낼 점심시간 맞춰서 오겠다고 하니까 까먹지 말고. 난 광주 갔다가 퇴근하겠음요.”
“광주? 너 오 기자 만나러 가는 거지? 이 자식 이거 대놓고 땡땡이네? 모른 척해 줄 테니까 데이트 잘 하고 와.”
“아오! 변압기 팔러 갑니다요! 영업으로 돌려서 뺑이 치게 해 놓고! 내가 민수 매출을 얼마나 늘리고 있는데!”
대학 다닐 때 그렇게 땡땡이 좋아하던 놈이 나이 먹고 열심이네.
민수 매출이 예상보다 빠르게 늘고 있어서 여친 만나러 간다고 해도 기꺼이 양팔 벌려 환영해 주려고 했더니만. 역시 영업 체질이야.
다음 날 점심 시간 즈음 해서 덕준이의 꼬드김에 넘어간 손님이 찾아왔다. 절연지 수입으로 연을 맺었고, 아몰퍼스메탈 수입까지 책임져 주는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하무역 김상진입니다. 제가 진작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정수입니다. 이렇게 뵙고 인사했으니 됐죠. 죄송할 것까지 있습니까? 하하.”
덕준이 말로는 올해 40세인데, 우리 덕분에 회사가 잘 풀렸다고 한다. 우리가 자라라면 기꺼이 간 절반 정도는 빼내 줄 토끼라나 뭐라나. 포워더나 무역상이 물주 하나 잘 잡으면 지방도에서 국도로 넘어가는 것은 금방이겠지.
“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능력 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저희도 사장님 덕분에 자재 싸게 공급받고 있습니다. 서로 돈 버니 좋은 것이죠.”
“하하.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점심 어떠십니까? 제가 사장님하고 한 부장님 대접하려고 굳게 맘먹고 왔습니다.”
“저희도 그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차로 같이 가시죠. 제가 아주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점심시간 맞춰서 찾아와 밥 사 주겠다고 하니, 사람은 됐군. 배고플 때는 밥 사 주는 사람이 최고지. 당신에게 최고의 육회비빔밥을 선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