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45)
145 수출의 탑
나를 잠시 설레게 한 노트 소리는 술이 떡이 된 덕준이의 작품이었다.
혼자 망상에 빠진 것임에도 몹시 부끄럽다. 박준희 사장과 많이 친밀해졌다고 해도, 이성을 살짝 마비시키는 술을 마셨다 한들 박 사장이 그럴 일이 없지. 우물가에서 숭늉 오지게 찾았네.
반성은 차차 하고, 일단 죽어 가는 덕준이부터 살리자. 풀린 눈을 부여잡고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인다.
“와! 술 냄새! 엄청 들이부었네!”
“진짜 죽기 직전이야. 담배 하나만 붙여 줘 봐. 지금 정신으로는 도저히 못하겠다야.”
사지에서 돌아온 덕준이를 위해 한 개비에 천 원이나 하는 뇌물 담배를 입에 물렸다.
“휴우. 좀 살 것 같네. 우웩. 이거 뭐냐? 맛이 왜 이래?”
역류하는 알코올을 의지로 막고 있던 덕준이가 중국스러운 향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넌 인마, 비싼 담배 피울 자격이 없는 거야. 가서 등이나 두들겨 주자.
“술 마시느라 고생했다야. 2차는 안 갔나베?”
“후아. 뒤질 뻔했네. 왕 사장 그놈 아주 말술이데? 페이스 맞추다가 골로 갈 뻔했다야.”
“2차는 안 갔냐니까?”
“2차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 거지. 나 이래 봬도 순정파야. 영혼이 깃들지 않은 짓은 안 해. 근데 담배 뭐냐?”
순정파 덕준이.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놈일세. 오윤경 기자랑 꼭 결혼까지 해라.
“접대 얘기는 낼 아침 먹으면서 하고. 일단은 씻고 자자. 체력을 충전해 놔야 내일 또 대장정을 나서지.”
“옛날 같았으면 안 씻고 그냥 잤을 건데, 그러면 안 되겠지? 이거 부장 노릇도 쉽지 않구만.”
먹고살기 힘들지. 나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많이 힘들었단다. 잠이나 자자. 침대에 눕자마자 기억이 안 난다.
알람도 없이 눈을 떴다. 7시에 알람 맞춰 놨는데 6시에 일어나다니!
생체 시간이 이리 무섭다. 일어날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면 잔 것 같지도 않고 찌뿌둥한데 말이야. 기절한 듯이 자고 있는 덕준이의 수면 습관이 부럽다.
부러우면 깨워야지!
“어? 어!”
발로 몇 번 차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난다.
처음 나주 내려가서 모텔에서 잤을 때만 해도 악 지르고 발광하면서 기상을 거부하던 덕준이가 단숨에 상체를 일으켜 세우다니! 역시 공장은 사람을 아침형 인간으로 만든다.
“와, 꿈도 안 꾸고 그냥 꿀잠 잤네. 독한 술 마셔서 그런지 확실히 뒤끝은 없다.”
“정신 차리고 밥 먹으러 가자. 호텔 조식은 과식이 원칙 아니냐.”
“그래그래. 비싼 돈 내고 호텔 묵었는데 조식은 먹어 줘야지. 근데 어제 일 안 궁금하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덕준이가 그 와중에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왕 사장 구워삶았나 보네.
“왜? 술상무 노릇 제대로 한 거야?”
“하하. 아주 노래 부르고 춤추고 쌩쑈를 다 했지. 내가 따거라고 부르겠다고 하니까, 아주 좋아하더라고.”
호형호제 관계를 맺고 오다니. 말이 안 통해도 몸으로 승부하는 덕준이의 주특기가 여지없이 발휘된 모양이다.
“말도 안 통하면서 잘 놀았나 보네?”
“들어온 애들이 오빠 오빠 하니까 나도 모르게 고삐가 풀리더라고.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뭐 왕 사장 표정 밝으면 좋은 거 아녀?”
“그렇지. 그거면 됐지!”
“내가 진짜 헌신적으로 놀아 드렸다야. 왕 사장이 기분 좋았던지 거기 있는 술 다 비우고 왔어! 양주만 세 병이나 나왔는데, 그걸 다 어찌 먹었나 모르겠네.”
“잘했다. 역시 넌 영업이 체질이야. 계산까지 잘하고 왔지?”
“내가 정신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계산한다고 하는데, 따거가 자기가 한다고 하더라고. 잘한 건지 모르겠네.”
왠지 느낌이 좋다. 일단 왕 종하고는 계약서 사인하고 웃으며 악수할 것 같다.
오후에 다른 업체도 가지만, 한 업체만이라도 계약해도 대성공이다. 우리 물건 내보내서 소문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진입은 어렵지만, 진입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탄탄대로겠지!
아침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은은한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아침 안 먹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호텔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는 묘하게 식욕을 자극한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유민희가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늘 웃는 모습. 잘 웃어서 좋다야.
“사장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굿모닝이에요. 민희 넌 술 잘 마셔?”
“네? 아침부터 웬 술요? 하여간 사장님도 독특하셔. 헤헤. 뭐 술은 못 마시진 않는데, 잘 마시는 것도 아니에요.”
“한 부장이 술상무 하느라 어제 고생 많이 했어. 너도 영업이니까 잘 배워 둬. 하하.”
영문 모를 표정을 하는 민희 앞에서 덕준이를 치켜세워 줬다. 덕준이 이 자식, 감흥이 없네. 해장이나 해.
영업의 세계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남성미 가득한 영역이라, 유민희를 채용할 때 잘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하기도 했다.
뭐 술 아니면 영업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도 바뀌고 있다. 아주 맘에 드는 씩씩함을 갖추고 있으니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 가며 잘하겠지. 여자라고 못할 일이 뭐 있겠나.
직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슴에 안고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젠장.
역시 4성급이네. 부산 갔을 때 묵었던 호텔의 조식 뷔페를 생각했다가,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냥 ‘아침 식사 됩니다’ 수준이네.
박 사장도 도착해 조촐한 4인 가족 식사가 진행됐다.
“한 부장님, 어제 술 많이 드셨어요?”
“아, 네. 조금 마셨습니다.”
“오늘 계약 잘되면 다 한 부장님 덕이라고 생각할게요. 하하.”
박 사장이 맏이의 미소를 지으며 덕준이에게 안부를 건넨다. 객실에서 보였던 의기양양한 표정은 어디 가고 술 냄새만 품기는 거야?
“어제 우리 한 부장이 왕 종을 아주 즐겁게 해 줬다고 하네요. 의형제도 맺었대요.”
“어머, 정말요? 하하. 얌전하신 분이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얌전하다는 박 사장의 놀림에 민희가 놀라 눈을 땡그랗게 뜬다. 그럼, 우리 덕준이는 아주 얌전한 녀석이지.
“식사 든든히 하고 오늘도 좋은 성과 내자고요.”
박 사장의 건배사에 누구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징변압기와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진강특수변압기 가서도 성과를 일궈 내리라.
치장과 짐 정리를 끝내고 로비로 내려가니, 에이전트 케이가 대기하고 있다.
로비 소파에 앉아 팔을 쭉 뻗은 채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이는 거짓말을 못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노안 예방을 위해 오메가3와 녹황색 채소 꾸준히 챙겨 먹자.
“사장님! 잘 주무셨어요? 호텔이 썩 좋진 않았죠?”
“비즈니스 하러 왔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죠. 잠 잘 잤습니다.”
“이 호텔이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가격치곤 시설이 그나마 좋은 편이에요. 수출로 돈 많이 벌면 5성급에 묵으세요. 호호.”
묵다마다. 5성급 호텔 살 정도로 벌 테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오전에 미스터 왕 만나서 계약 마무리 짓고, 오후에는 전장으로 넘어가야죠. 어제 한 부장이 대신 갔다면서요?”
“우리 한 부장이 술상무 노릇을 아주 잘합니다. 근데 아쉽게 계산은 왕 종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오호, 한 부장이 진짜 맘에 들었나 보네요. 미스터 왕이 쉽게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하.”
죽어서도 계왕을 찾아 계왕권을 배워 올 놈이 우리 덕준이요. 박 사장 말대로 오늘 계약서 사인하면 덕준이 덕이다. 쓸모 가득한 녀석!
“오후에 갈 업체는 어떻습니까? 거기 사장은 어때요?”
“전장트슈얼삐엔야치 쳔 사장은 타고난 사업가죠. 이름이 쳔즈쉬앤이에요.”
이름 외우기도 어렵네. 쳔즈쉬앤, 버벅거리지 않게 연습해 두자.
“출신에 따라 성향이 차이 난다고 하던데요.”
“우리 사장님, 은근히 많이 아셔. 호호. 쳔 사장이 창저우 사람인데, 옛날부터 양쯔강 이남 사람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고, 황허 이북은 정치가로 대성한다고 했어요.”
“타고난 사업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남쪽 사람은 뭐랄까, 손익 계산이 분명하달까요? 나쁘게 얘기하면 빠꼼이들이죠. 어떨 때 보면 아주 지독할 정도예요. 미스터 왕도 그런 성향이 있긴 해도 잘 구슬리면 넘어가는데, 쳔 사장은 아휴. 한번 겪어 보세요.”
“꽌시. 그러니까 쳔 사장이랑도 친밀한 사이인 것은 맞죠?”
“그럼요. 친구죠, 친구. 근데 꽌시라는 것이 남쪽 사람들한테는 범위가 넓지 않아요. 이게 설명하기 그런데, 암튼 그런 게 있어요.”
꽌시라는 것이 단순히 관계라고 번역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사람들한테 정이 뭐냐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건가?
“전장변압기 가서도 좋은 성과 낼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당연하죠! 저도 돈 많이 벌고 싶은 사람입니다. 호호. 아! 저기 박 사장님도 오셨네요. 차에 타시죠.”
30분을 달려 도착한 난징변압기는 어제와 달리 공장 특유의 북적거림이 느껴진다.
트럭에 변압기 싣느라 바삐 움직이는 지게차를 보니, 여기가 공장이 맞긴 맞네. 직원이 400명이 넘는다더니, 확실히 어제와 다른 모습이다.
왕 종이 기름기 가득한 일관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덕준이와는 두 손으로 악수하는 것을 보니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것 같다.
“사무실 가서 어제 얘기 마무리하죠. 점심 전엔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계약을 독촉하는 에이전트 케이의 말이 암시처럼 들린다. 어제 저녁 먹으면서 나눈 대화로 8부 능선을 넘었고, 마지막 껄떡 고개는 덕준이가 개인기로 돌파했다. 부디 점심 맛있는 걸로 먹자.
녹차 마시며 진행된 협상은 어제와 달리 순조로웠다. 사장끼리 모인 테이블과 덕준이가 난징변압기 직원들과 앉은 테이블로 나눠 미팅이 열린 것은 고무적이다.
덕준이는 에이전트 케이 현지 직원의 어눌한 한국어 도움을 받으며 기술 미팅에 열심이다. 그래 봐야 스펙 확인하면서 생산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조율하는 정도이지만, 그 자체가 협상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뜻일 테다.
단가 협상은 용량별로 큰 격론 없이 쭉쭉 진행됐다. 박 사장이 손해 안 보는 가격, 왕 종이 재미 보는 가격. 이러면 협상이 타결되는 것이다.
가장 난관이었던 결제 조건은 왕 종이 호탕한 웃음으로 결정이 됐다.
“미스터 왕이 저를 믿고, 사장님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하네요. 선금 50프로에 인도 후 50프로. 변압기 불량 없게 잘만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씨에씨에.”
어제 니하오를 얘기했고, 오늘 씨에씨에를 얘기했으니 아는 중국어는 다 나온 것 같다. 덕준이도 잘 확인했다는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에이전트 케이가 왕 종과 한참 얘기하더니, 그 결과를 알려 준다.
“미스터 왕이 계약 기간을 연말까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연간 계약을 얘기하는 거예요. 올해 거래가 순조롭게 되면 연말에 진짜 연간 계약 맺고 싶다는 뜻이죠. 이거 미스터 왕이 정말 큰 선물 주는 거예요. 축하드려요.”
표정 관리할 것도 없이 그냥 환하게 웃었다.
순조로운 거래라면 연체 없이 변압기 제때 보내 주는 것일 텐데, 그것은 자신 있다. 화수분이 눈앞에 놓여 있구나!
하꼬방 회사에서 잡부처럼 일했던 내가 이제 수출 역군으로 거듭나고 있다. 내 방 장식장에 수출탑 전시할 테다!
키보드 소리가 사무실에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저 소리가 멈추면 계약서 출력하는 소리가 나겠지?
“자, 계약서 나왔습니다. 제가 어제 미리 작성해 놨는데, 세부 내용만 수정해서 뽑았습니다. 꼼꼼하게 읽어 보세요.”
에이전트 케이가 계약서를 뽑아 왔다. 내용은 신의성실의 원칙 운운하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다. 계약 기간, 단가, 대금 지급 조건, 하자 처리 등 담길 것은 다 담겼다.
“좋네요. 사인하겠습니다. 첫 발주가 언제인지, 발주 물량은 얼마쯤 될지 알 수 있을까요?”
“발주는 오늘 당장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네요. 호호. 늦어도 다음 주에는 1,200대 정도 주문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물량은 사장님들께서 나누실 거죠?”
“네, 저희가 사이좋게 나누겠습니다.”
“변압기 스펙하고 외함 마크는 메일로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아무 문제 없도록 잘 만들고, 검사도 철저히 하고, 포장도 말끔히 해서 보내겠습니다.”
계약서 사인이 끝나고 나와 박 사장, 왕 종이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이 맞잡은 손, 위안화를 불러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