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51)
151 우유 유통 기한
자정이 임박해서 나주에 도착했다.
나주 내려오는 우등버스에서 한참을 잤는데도 여전히 피곤하다. 여행이건 출장이건 장거리를 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다.
회사로 복귀해 3일 동안 미세먼지를 뒤집어쓴 차를 이끌고 민희를 집에 데려다주고, 스위트 홈에 도착하니, 이제야 일상으로 복귀했음을 체감했다.
야밤에 짐을 풀어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 붙잡고 집 구석구석 순찰하고 나니, 난데없이 라면이 당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갔다가 고스란히 다시 가져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후각이 춤바람 났다. 김치 어디 있어!
면과 김치의 환상적인 조합. 이것을 매조지하는 매콤하고 개운한 국물. 기름진 음식에 붙어 쌓인 중국 미세먼지가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기운 차렸으니 이 야심한 밤에 생각나는 이에게 연락이나 해 보자.
-통화 가능?
문자 보내기 무섭게 유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짜식, 후훗.
“안 자고 있었어?”
“출장 갔다가 이제 왔나 봐? 힘들었겠네. 그래도 여행 간 것 같고 좋았지?”
질문을 질문으로 답한다. 그만큼 기다렸다는 뜻이겠지?
“2박 3일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 돌아오는 내내 잤는데도 피곤하네.”
“피곤하면 그냥 자지, 왜 연락했어?”
“연락 기다려 놓고, 너무 맘에 없는 소리 하는 것 아냐?”
“걱정해 줘도 저런다니까.”
목소리가 진심인 것 같다. 쿨한 녀석 같으니. 안 만난 지 한참인데도 보고 싶다느니, 그리웠다느니 하는 감정이 별로 안 느껴지네. 독하게 공부하겠다고 한 것이 진심이었나 보다.
“내일 데이트나 하자고 연락했는데, 잠이나 잘 걸 그랬나?”
“하여간 못 말려. 내일 뭐 하고 싶은데? 아! 내일 패밀리랜드 갈까?”
“패밀리랜드?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
“놀이공원! 전라도에서 제일 좋은 테마파크인데, 너무 모르는 것 아냐?”
“놀이공원 좋네! 가자!”
모든 학부모들이 싫어한다는 주말 놀이공원 가기. 사람 바글바글하겠지만, 사람 많은 것에는 이미 3일 동안 어느 정도 단련돼 있다. 롤러코스터도 타고, 시원하게 정글보트도 타면서 기운 회복하고 오자.
놀이공원 가려면 일찍 자야겠군. 라면 먹고 자면 아침에 얼굴 대문짝 되니까, 우유 한 잔 마셔 주는 것이 상식이지. 다행히 유통 기한이 딱 오늘까지다. 출장이 정말 짧긴 짧았네.
초여름 따사로운 날씨가 패밀리랜드 가는 길을 축복한다. 길도 아주 좋다. 가는 길 중간에 유리네 집이 있어서 운전으로 미리 힘 뺄 우려도 없다.
“오빠! 얼굴 잊어버릴 뻔했네.”
스트라이프 티에 허벅지에 스크래치 두어 군데 난 청바지. 그리고 포니테일이라는 완벽한 조화.
“자주 봐야지. 방학 되면 좀 한가해지는 거지?”
“학기 중보다는 숨 쉴 만하지. 방학이라고 넋 놓고 있으면 처지는 것 알잖아? 다들 저만치 달려가는데 방심하면 그냥 뒤처지니깐.”
“고생하기로 맘먹었으니까, 3년만 참아. 힘들겠지만, 잘 버티면 성과가 있잖아?”
“그르게. 잘 버텨야지. 휴우. 근데 오빠는 출장 가서 성과 좀 냈어?”
“아주 운 좋게 바로 계약서까지 쓰고 왔지. 이제 수출 역군이라고 불러 줘. 이건 성과.”
면세점에서 산 향수와 핸드크림 그리고 갈색병을 건네니, 유리 얼굴에 화색이 만연한다. 갈색병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나!
“우와, 사장님! 사업 번창을 기원하겠습니다! 하하하. 잘 쓸게. 고마워!”
“넉넉잡아서 매출 300억짜리 계약 맺고 왔는데, 이 정도야. 후훗.”
아휴, 미소를 감출 수가 없네. 빨리 월요일이 와서 직원들 앞에서 잇몸 만개한 채로 이 성과를 널리 알리고 싶다.
“나도 빨리 졸업하고 사회생활 하고 싶다. 오빠 보고 있으면 일하는 것이 되게 즐거워 보여.”
“학교 다닐 때 졸업한 선배들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고?”
“그렇지. 로스쿨을 학교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젊은 애들 바글바글한 곳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밖에 나가 봐. 꼰대들 드글거리지, 아휴, 몸도 마음도 늙어 버린다니까.”
“나랑 있으면 젊어지는 것 같지 않아? 하하.”
비타민 같은 녀석. 그래, 오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신 나게 놀아 봅시다.
광주도 인구 150만의 대도시이다 보니, 놀이공원 입구부터 차가 가득이다. 놀이공원은 주차하면서부터 진 빼기 딱 좋은 곳이다. 이러니 부모들이 가기 싫어하지.
“주말이라 역시 사람이 많네.”
“날 좋으니까 다들 밖으로 나와야지. 사람 없으면 놀이기구 타기 좋긴 한데, 사람 많은 것도 나름 재미있어. 북적북적하면 놀러 나온 것 같고 그러잖아?”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지. 잠깐만, 아직 내리지 말아 봐.”
사람 구경하기는 어렸을 적부터 나만의 관찰력 기르는 놀이였다. 사람들의 표정 변화와 행동을 보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모자 하나로 온갖 것을 추리하던 셜록 홈즈가 된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걸어 나오는 한 가족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 신 난 아이들, 끌려온 듯한 아빠, 신 난 아이를 진정시키다 살짝 화가 난 엄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까?
“유리야, 저기 걸어오는 가족 봐 봐.”
“애들 너무 신 났네. 애들한테는 놀이공원이랑 수영장만 한 곳이 없는 것 같아.”
“엄마랑 아빠 둘 다 모자 썼잖아? 내가 보니까 아빠는 늦잠 자다가 겨우 일어나서 대충 세수만 하고 모자 쓰고 나온 것 같아. 엄마는 나름 멋 부린 것이고. 근데 엄마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빠가 오는 내내 궁시렁거린 것 같지 않아? 저러다 폭발하겠지?”
“하하. 이젠 소설까지 쓰십니까?”
“여기 지나갈 때까지 저 엄마 폭발한다에 점심 내기 어때?”
“내기 좋지. 그럼 난 조용히 지나간다에 걸겠어.”
맞은편에 차를 주차시킨 가족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잘 안 들리지만 아빠가 중얼중얼 궁시렁거린다. 옳지!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일찍 자라고 했어, 안 했어! 간만에 애들이랑 놀러 나와서까지 그렇게 짜증 나는 표정을 지어야 해?”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화풀이야? 내가 뭐라고 했어?”
“나올 때부터 계속 똥 씹은 표정이잖아!”
“또 시작이네 진짜. 시우, 시현이 눈치 본다. 조용히 가자잉.”
“뭐가 또 시작인데? 최시우! 너 도로에서 조심하라고 했어, 안 했어! 사고 나 봐야 정신 차릴래!”
음하하. 나는야 셜록 홈즈.
“봤지? 점심 맛있는 걸로 먹자?”
“소설가가 아니라 점쟁이였네. 근데 저 아저씨는 놀러 왔으면 잘 놀 생각을 해야지, 저렇게 오만상을 쓰고 있네? 나 같아도 짜증 나겠다.”
“밖에 나가서 돈 버는 것도 힘들고, 집에서 애 보는 것도 힘들고, 다들 삶이 팍팍해서 그러겠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하지만, 틀린 말이다.
가정불화의 첫 번째 원인은 돈이다. 먹고사는 데 여유가 있으면 왜 싸우겠어? 사야 할 것,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돈 걱정부터 하는 자신을 보면 짜증부터 나겠지. 우리 직원들이 나한테 열광하는 것도 돈을 넉넉하게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저번에 직원 가족들까지 불러 통돼지바비큐 해치웠을 때 여실히 느꼈다. 야들야들 잘 익은 고기 한 점 먹을라 치면 가족들 와서 인사하는 통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래도 잘 대해 줘서 고맙다는 소리만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대한전력 물량 터져 바쁠 때 아니면 6시 땡 하면 퇴근이지, 동종 업계보다 월급도 많이 줘, 돈 많이 벌면 성과급도 줘, 집도 해 줘. 우리 회사 온 뒤로 부부 싸움을 덜 한다는 얘기 들었을 때가 제일 기뻤다.
“자, 우리도 가자. 놀이기구 하나라도 더 타야지.”
놀이공원 첫 타자는 언제나 바이킹이다. 바이킹 내려올 때 안전바 잡고 엉덩이를 살짝 들면 스릴과 더러운 기분이 함께 느껴진다. 이럴 때 눈치 안 보고 소리 한 번 신 나게 지르고!
“오빠! 한 번 더 탈까? 너무 감질나는데? 이번엔 소리 안 지르고 타기 어때?”
“콜! 무슨 내기 할까? 진 사람이 여우 머리띠 하기?”
“콜! 난 내기하면 절대 안 져!”
객기가 수명 단축을 불러온다. 소리 질러야 할 타이밍인데 꾹 참으려니 죽겠다. 유리도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버티더니, 결국 못 참고 스크림을 내질렀다. 내기에서는 이겼지만, 이런 무식한 짓은 하지 말자.
“아이 진짜 짜증 나!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참아?”
“일단 콜라나 마시러 가자.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유리와 웃고 떠들면서, 놀이기구 타며 소리 지르고, 군것질하면서 광합성을 하니 기분이 좋다. 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노는 것이 제일 재밌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주차장에서 만났던 가족과 다시 마주칠 때마다 표정변화를 살피는 것도 재밌네. 아까와 다르게 웃음이 만발한다. 놀이기구가 저 가족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구나.
“오빠가 아까 얘기해서 그런지 저 가족들 자꾸 눈에 띄는 것 같네?”
“그르게. 계속 보이네. 그래도 아까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그러더니, 표정 좋아진 것 좀 봐.”
“하하. 오빠 지금 어떤 표정인지 모르지? 여기서 제일 신 난 것 같아.”
여우 머리띠를 한 유리를 보고 있자니 꼬리가 달렸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청바지 속에 숨겨 있으려나?
“내가 꼬리 잘 숨겨 놨어. 이따 찾아봐. 하하.”
유리의 도발에 해면체가 꿈틀거리는 기분이다. 이 기분 그대로 롤러코스터로 직행이다.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지 해가 꽤 길어졌다. 해가 시계 쳐다보며 퇴근만 기다릴 때쯤 되니 발바닥에 바늘을 심어 놓은 듯하다. 체력 최고로 좋았을 10대, 20대 때 이렇게 놀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휴, 난 이제 힘들어서 못 있겠다. 꼬리 확인할 체력은 남겨 놔야 하는데…….”
“우리 사장님 짐승인 것은 여전하시네요? 푸하하. 말 나온 김에 짐승들 보러 동물원으로 가자.”
놀이공원이 심술궂은 중고딩 세계라면, 동물원은 동심의 세계이다. 고향을 떠나 갇혀 지내야 하는 동물이 불쌍했지만, TV나 책에서나 보던 코끼리, 기린, 하마를 볼 때는 마냥 순수한 어린이가 된 기분이다.
해가 뉘엿할 때가 돼서야 동심 가득한 모험이 끝이 났다. 이젠 더 이상 못 걷겠다.
“오늘 제대로 잘 놀았네. 안 힘들어?”
“공부도 체력이 받쳐 줘야 하는 건데, 체력이 저질이 됐네. 오빠는 30댄데 쓰러지기 직전 아니야? 하하.”
“힘 남겨 뒀으니까 걱정 마셔. 저녁은 맛있는 걸로 먹자.”
영특한 유리가 바로 행간을 읽어 내고 묘한 눈빛으로 째려본다. 짐승 보는 눈인가?
“중국 수출 시작했으면 이제 중국 자주 가겠네?”
“갈 일이 많아지겠지? 그래도 가급적이면 직원들 보내려고. 일 안 하는 사장이 좋은 사장이라잖아.”
“뭐 사장이 제일 바쁜 것 아냐?”
“바쁜 척하는 거겠지. 크고 중요한 일만 신경 쓰고 어지간한 것들은 직원들한테 맡겨야지. 그래야 나도 편하고, 직원들도 눈치 안 보고 일할 수 있잖아?”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스테이크를 날름 썰어 입에 집어넣으며, 나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했다.
이렇게 1~2년만 더 고생하면 내 삶도 한량처럼 편안함에 이를 것이다. 직원들 믿고 실컷 놀자.
“오빠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 같아. 난 오빠 같은 사람이 부럽더라.”
“아이고.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전에 회사 다닐 때는 미칠 것 같아서 정신과 상담 받을 생각까지 했어. 회사 차리고 나서 일이 잘 풀려서 지금처럼 룰루랄라 사는 거지 뭐.”
문자님이 계시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 있겠나!
문자님께 의지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혼연일체가 된 것 같다. 문자님이 주시는 영양분 잘 받아먹으면서 회사 무럭무럭 키우는 것이야!
“나도 고생하는 거 잘 버티면 오빠처럼 룰루랄라 하겠지?”
“그럼. 내가 힘내라고 위로해 주잖아. 그럼 위로 받으러 갈까?”
유통 기한 하루 지난 우유 마저 마셔야 하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냉장고에 있었으니 이틀 지나도 괜찮겠지 뭐. 지금 우유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