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94)
194 문명사회
“하나, 둘, 셋!”
“화이팅!”
기가 막힌 바다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 찍는 것을 끝으로 1박 2일의 창립기념일 행사가 끝이 났다.
4억 원이란 거액이 날아갔지만, 아까울 것 하나도 없다. 돈을 못 벌어도 직원들을 위해 그 정도는 거뜬히 쓸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올해 돈을 끝내주게 벌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매출 계획이 올해에만 몇 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계산기 두들겨 보면 올해 매출 2,500억 돌파는 확실하다.
영업 이익은 천억을 가뿐히 넘어설 것이다. 무지막지한 이윤.
문자님이 안겨 준 신기 어린 설비들이 아니었다면, 이 미친 마진은 절대 불가능이다.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우리 회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잘 보호해야 한다.
지분 구조야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 업계 현실이다. 이런 알짜 회사를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게 재벌들 생리 아니겠는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 재벌이 그렇다. 특허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설비를 어떻게든 훔쳐 갈 것이고, 우리 회사를 부숴 버리도록 별짓을 다 할 것이다. 나는 프라임일렉트릭 그룹의 사장이자 수호자가 돼야 한다.
거창하고 거룩한 마음가짐을 안고 나주로 돌아왔다. 금요일 오후, 집은 더없이 조용하다. 하안거에 들어가도 될 만큼 정적이 흐르는 이 시간.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순간이다.
역시나 전화기가 날 사색에서 빠지지 않도록 잡아끌어 낸다. 가끔은 핸드폰을 부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문명의 공해와도 같은 존재.
두 건의 깨톡.
-모처럼 시간 났는데 저녁 먹을까?
-7시 호수공원 잊지 말아요.
최유리와 박준희 사장의 연락이다. 긁어 버린 복권이냐, 긁지 않은 복권이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유리를 선택했다. 이제는 어정쩡한 관계를 이어 나갈 명분이 없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기에, 감정 소진을 마무리하고 싶다.
가벼운 복장으로 차를 몰고 광주로 향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겹치며 도로에 차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집에서 갖지 못한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연애 상담가로 변신한 문자님이라면 한 우물만 파라고 하지 않을까? 내가 다리 8개 달린 문어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저울질하며 손익 계산할 때는 아니니 말이다. 다리 다 자르고 사업에 전념해야 할 때이다.
우리 회사가 떼돈을 벌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매년 안정적인 수익에 만족하며 멈춰도 충분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다른 관수 시장인 조달청 관급공사도 뛰어들어야 하고, 대한철도공사 철도용 변압기 시장도 나를 기다린다. 수출도 중국에서 끝낼 것이 아니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변압기 시장의 메카인 미국 전력용 시장도 구경만 할 수 없다.
사색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으니, 유리와 만나기로 한 전대 후문에 도착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전남대를 전대라고 부른다. 그럼 전북대는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보면, 전북대는 북대란다. 전북 사람들은 왜 전남대만 전대고, 전북대는 북대냐고 항변한다.
몇 년 전부터는 전북 사람들이 전북대를 전대로 부르는 운동을 한다고 하더라. 국립대인 경북대와 사립대인 경남대는 신경전이 없는데, 같은 국립대인 전남대와 전북대의 신경전은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오빠! 오랜만이야. 그래도 얼굴은 안 까먹었어.”
방학했다고 한 번 보고 그 뒤로 통 못 봤으니, 근 한 달 만이네.
“방학했다고 살 것 같다면서 뭐가 그리 바쁘길래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좀 바빴어.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밀린 것도 좀 하고.”
바쁘다면서 여행을 가? 자유로운 영혼일세. 나한테만 바쁜 것이었나? 좀 그러네.
“오빠, 삐쳤어? 에이, 너무 그러지 마. 나도 사회생활 하는데 만날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정수 학생 삐치지 마세요.”
유리가 엉덩이를 툭툭 치며 달래 주는 연기를 펼치는데, 그냥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냥 툭툭 치는 것이 아니라 진득하게 쓰다듬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몸보신하러 무조건 옳은 소고기나 먹자.
“됐고, 고기나 먹으러 가자.”
“고기 좋지요. 오빠, 오늘 힘 좀 쓰겠는데?”
저 여우. 남자 심리를 너무 잘 안단 말이야.
뜨겁게 달궈진 불판 위에 꽃이 활짝 핀 등심 한 덩어리를 올려놓으니 시원한 소리와 함께 감히 참기 어려운 고기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배고파서 예민하게 굴었던 것인가? 일단 먹고 보자.
“2학기 들어갔겠네?”
“어. 나 저번 학기 때 유급될 뻔했잖아. 아무래도 나랑 안 맞나 봐. 진짜 죽어라 했는데도 안 되네. 머리가 멍청한가.”
“절반은 넘겼는데, 잘 참고 이겨 내야지.”
“그래야지 하면서도, 결과가 안 좋으니까 자꾸 침울해지네.”
“노력을 이기는 것이 재능이고, 재능을 이기는 것이 운빨이라고 해도, 결국 오래가는 것은 노력이 아닐까?”
스텟이 운빨에 몰빵된 내가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만, 위로 역할을 맡았으면 무슨 말을 해서라도 역할에 충실해야지.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고기 탄다. 빨리 먹어.”
대화는 다시 일상의 이모저모로 옮겨 갔다. 평소처럼 하하호호 웃으며, 고기를 먹으며,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시며 말이다.
커피숍으로 옮긴 자리에서 할 말을 해야겠다.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얻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고.
“유리야. 난 몇 순위야?”
“순위? 뭐야 뜬금없게.”
황당한 표정을 짓는 유리지만, 눈치 빠른 이답게 이내 분위기를 맞춰 간다.
“매번 연락하면 바쁘다고 해서 그런 거지?”
“그것보다는 계속 이렇게 어정쩡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왜 어정쩡해? 내가 오빠 구속한 것도 아니잖아. 오빠 여자 생겼어?”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냉기가 서릴 정도다. 쿨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여자 생긴 것은 아니고, 생길까 말까 과정이야. 머지않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겠다 싶어서.”
“푸하하. 생길까 말까는 또 뭐야. 은근히 레트로 감성이 있다니깐. 여자 생겼으면 만나면 되지, 뭘 선을 그으려고 해?”
“너야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뭐 어때? 결혼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아무래도 쿨 강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본심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X세대, N세대가 유행할 때 4차원인 척 행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게 핫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랄까?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넌 연애라고 하는 구속력 있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아. 모든 구속이 다 나쁜 것은 아니야.”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오빤 모범생 콤플렉스라고 들어 봤어?”
느낌이 확 온다. 학창 시절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도 잘 듣는 모범생이지만, 가끔씩 거리낌 없이 일탈하는 애들 말이다.
“나 장녀잖아. 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기대감이 많을 것 아냐? 그렇게 모범생처럼 살았는데, 한 번뿐인 내 인생에 무슨 득이 될까 싶더라고.”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 기대를 받으며 산 것이 한편으론 부럽긴 하네.”
“겪어 봐. 그게 얼마나 압박이고 스트레스인데! 솔직히 로스쿨도, 물론 내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긴 했지만, 엄마 아빠 체면 때문에 간 것도 없진 않아. 그래서 요즘 좀 힘들더라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성적은 계속 바닥이고.”
그래서 연애와 결혼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건가?
“너 저번에 나한테 그랬지? 꿈을 이루기 전까지 이렇게 지내자고 했잖아.”
“그건 지금도 변함없어. 서로 얽매이는 것 없이 시간 맞으면 만나고, 좋지 않아?”
“너 만나서 안 좋았다는 소리는 해 본 적이 없어. 나도 좋았으니까 계속 연락하고 만났지.”
“난 소개팅 안 나가려고 했었다고 그랬잖아? 너무 빤하잖아. 나는 예비 법조인이고, 상대는 잘나가는 사업가래. 적당한 사람 만나서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수순대로 돌아가겠구나 싶더라고. 근데 오빠 만나 보니까 빤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서로 좋은 감정 있는 것은 누차 확인한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닌데, 자꾸 핵심만 요리조리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생각은 꿈을 이룬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나도 여자 두루 만나면서 만인의 연인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유리가 허리를 숙이며 다가와 속삭인다.
“뭐 어때? 내가 비밀로 할게.”
이 요염한 것! 남자들끼리 속된 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는 이런 친구라고 얘기하고들 하는데, 정말 현실에 존재한 자란 말인가!
“에이 진짜. 진지 빨고 얘기하잖아.”
“그래서 오빠 말은 그만 만나잔 뜻이잖아? 난 그러기 싫다고. 너무 내 욕심만 부리는 것 같아?”
“쫌. 욕심 부리면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해 놓고 욕심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부담 하나도 안 주겠다고 했고, 진짜로 부담 준 적 없잖아. 다른 여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라고. 내가 뭐 구질구질하게 질척거린 것도 아니잖아?”
속삭이더니 이제는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들을까 봐 겁이 날 정도네. 여자가 매달리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남자 역할이 된 건가?
연애고자도 아니고 여자 만날 만큼은 만나 봤지만,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 여자 마음 같다. 쿨한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내가 혹시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내 자존심 좀 세워 줘야 하는 것 아니야?”
“우리가 엔조이도 아니고, 그건 아니야. 계속 이렇게 보는 건 자존심을 밟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아, 몰라.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나가자.”
절단신공. 유리가 짐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한다. 애초에 대화로 결론을 낼 생각은 아니었다.
내 스스로 결론에 도달했다. 스트레스 해소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이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남자의 본능으론 아쉽지만, 사람이 본능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속이 후련해?”
“나라고 기분이 좋겠니?”
커피숍을 나와 담배 하나 꺼내 물었다. 불을 붙였는데도 유리는 굳이 연기를 피하지도 않고 옆에 붙어 있다.
“간접 흡연 안 좋아.”
“직접 흡연보단 낫겠지. 딱 보니까 이제 앞으로 안 볼 것처럼 구는데, 이렇게라도 붙어 있어야지.”
“너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야.”
“푸하하. 몇십 년 산 부부도 서로를 모르는데, 당연한 것 아니야? 더 알고 싶으면 나 하자는 대로 하고.”
유리만의 슬픔을 감추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겉으로만 아닌 척, 쿨한 척하지만 속내도 그럴까? 아니다. 내가 관심법사도 아니고 깊이 들어가지 말자.
“앞으로 안 보진 않을 거야. 뭐 친구끼리 만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어?”
“근데 섹스는 안 하겠다고? 아쉽네. 오빠랑 되게 잘 맞았는데.”
외진 곳이긴 해도 사람 지나가는데 민망하네. 폭두고딩 타나카가 길거리에서 소리친 대사가 떠올랐다. 다른 속어를 안 쓴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그럼 오늘부터 우리 사귈까?”
“푸하하. 맘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마. 난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돼. 아니, 그냥 만나는 건 괜찮고, 서로 뒹구는 건 안 되는 거야? 밥 먹고 차 마시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
소피스트와 대화하는 착각이 든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 같은 건가? 한없이 따지고 들어가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동등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 칸토어의 논증을 알기 전엔 말이다.
“우리가 문명사회에 살잖아. 문명을 외면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난 뭐 짐승이란 소리야? 짐승은 오빠 아니야?”
“배고픈데 라면 먹고 갈까?”
“이것 봐. 문명사회 사는 짐승이라니까.”
택시비보다 모텔비가 덜 깨지겠다는 명대사를 남긴 예전 영화가 떠오른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흥분되는 느낌이 들었다는 남자 주인공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더 이상은 내 것이 아닌 그녀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기억하고 싶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새벽녘이 밝아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