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
022 피아 식별
“사장님 안녕하세요. 금성전기 박준희입니다.”
목소리가 꽤 활기차다. 회사가 잘나가서 그런지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힘이 있어서 회사가 잘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통화하기는 처음이네요. 전화 주셨는데, 잠시 자리 비운 탓에 못 받았습니다.”
“제가 전화한 것이 무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태양전기 나와서 독립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서 언제 인사 한번 드려야지 생각했는데, 좀 늦었네요.”
“아이고, 아닙니다. 어찌 알고 전화까지 해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합니다.”
“혹시 언제 시간 되시면 저녁 식사 한번 하시죠. 어떠세요?”
당당함. 그것이 회사 성장의 비결인가? 말 몇 마디 안 했는데 저녁부터 먹자고 하는 모습이 꽤 전투적이면서도 당당하다고 느껴졌다.
저 사장을 빨리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 당장이라도 만나서 뭐 하나라도 배워야 할 사람이다.
금성전기 박준희. 내 롤모델이다.
창업주인 아버지가 갑자기 쓰려져 회사가 휘청거릴 때 회사를 맡아 무시무시하게 성장시킨 사람으로 이 바닥에서 이미 전설이 됐다.
독일 유학 중에 급히 귀국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회사를 끌어갔는데, 맡은 지 5년 만에 매출을 3배나 키워 내 버린 괴물이었다.
나야 뭐 자재 업체들이 물고 오는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만화 같은 얘기에 말이 되냐고 반문했지만, 진짜였다. 100억에서 왔다 갔다 하던 매출이 작년 기준으로 314억을 찍었다.
자재 업체 결제 조건이 좋아진 데다, 직원들 월급 많이 주고 연말에 성과급 척척 주니 좋은 소문이 넘쳐 났다. 거기다가 매출도 엄청나게 키웠으니 말 다 했지.
저 사장이 회사 처음 들어와서 했던 말이 1년만 고생하면 성과를 확실히 나누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직원들은 안 그래도 여자라고 무시하는 판에 그런 소리까지 하니 세상 물정 모른다고 폄하하기 바빴다고 하더라. 하긴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객기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년 뒤에 진짜로 월급이 오르고 연말에 성과급까지 나오니, 박 사장은 부모 잘 만나서 편히 살던 애에서 성령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가 돼 버렸다. 종교적인 추앙 분위기. 아무도 퇴사할 생각조차 안 해 입사하기 어렵다는 난공불락.
나도 저런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었지. 이제는 그런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다들 박 사장을 두고 타고난 사업가라고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회사를 그렇게 크게 키워 낸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바닥은 딸 가진 사람이 참 많다. 속설로는 전기 밥을 오래 먹으면 아들 만드는 정자가 다 죽는다나 뭐라나. 전기와 가깝게 지내는 엔지니어나 검사 담당자들이 하나같이 딸딸이 아빠인 것을 보면 그럴싸한 속설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딸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사장이 꽤 있다. 여자라고 사업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남아 선호가 심한 60, 70이 넘은 사장들이 딸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아들을 낳지 못한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런 이유로 최현아는 태양전기를 먹었고, 박준희는 금성전기를 먹었다. 출발은 같았는데 경주 결과는 아주 달랐다.
최현아는 능력이 없는 데다 성질도 더러워서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 회사를 말아 드시는 중이고, 박준희는 사방에서 자자한 칭찬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크는 중이다.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 어떠십니까?”
“역제안이시네요? 저도 괜찮습니다. 지금 남동공단에 계시죠?”
“네, 맞습니다.”
“그럼 저녁 7시 송도 괜찮으신가요?”
“다리만 건너면 송도라 저야 좋죠. 사장님은 시화에서 오시려면 멀지 않으십니까?”
“송도 살아서 저도 아주 좋아요. 그럼 괜찮은 곳으로 예약하고 문자 하나 넣어 드릴게요.”
첫 통화라서 그런지 깍듯이 예의를 차린 대화였지만, 통통 튀는 말투 덕분인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경계 주의보를 해제할 때는 아니다. 박 사장도 사업하는 사람이라 아무 목적 없이 만나자고 했을 리 없다.
공장 차려서 이제 막 매출 나오기 시작한 초짜한테 뭐 뜯어먹을 것은 없을 테고, 이유가 뭘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다 보니, 6시가 넘어 버렸다. 남동공단의 지옥 같은 퇴근길을 뚫고 송도로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인천의 지긋지긋한 교통 체증. 빨리 나주로 가고 싶다.
* * *
“안녕하세요. 박준희입니다.”
박준희 사장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서로 인사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인데,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 힘이 느껴진다. 성공한 사업가의 아우라인가?
더 관심을 끈 것은 박 사장의 외모이다. 약간 처진 눈초리에 눈에 별이라도 집어넣었는지 초롱초롱하다. 볼록한 이마와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인지 얼굴에 총기가 가득하고, 한없이 선해 보인다.
이 외모와 선한 인상, 사업하는 데 상당한 메리트일 것 같다. 당장 나부터 외모에 취해 정신 못 차릴 것 같지 않나.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지정수입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당황하셨죠? 태양전기 계실 때부터 일 열심히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와서 어떤 분이신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얼굴 뵈니까 좋네요. 여기 앉으세요.”
악수 좀 더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여자 손을 잡아서 그런지 보드랍고 참 좋다.
악수를 하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이나마 느낄 수 있다. 악수 하나에도 진심을 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의례적으로 하고 마는 사람도 있다. 악수에서 절박함이 담기기도 하고, 자신감이 품어져 나오기도 한다.
박 사장과 악수. 아직은 잘 모르겠다. 딱 애매한 느낌이다. 본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대화가 쉽지 않겠군.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이쪽 사장님들 문법으로 받아들이실 필요 없어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젊은 사장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거든요. 제가 회장을 맡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쪽이 연령대들이 높잖아요? 몇 안 되는 젊은 분들끼리 친목을 다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사장님도 같이하시면 어떨까 싶었고, 겸사겸사 창업 축하 인사도 할 겸 연락드렸습니다.”
사장들 문법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정말 젊은 사장들끼리 친목 다지겠다고 나를 불렀다? 친목 모임 회장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쉽사리 경계를 낮추기 어렵다. 더 지켜봐야겠군.
“변압기 업계에서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연예인을 뵙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연예인 해도 될 얼굴이긴 하다. 집안 자체가 인물이 좋다고 하더니 역시 피는 속일 수 없군.
“아휴, 연예인이라뇨. 상대방 잘 띄워 주시는 것이 사업 아주 잘하실 것 같네요. 그래서 요즘 민수 시장에서 독보적이시군요. 돌풍이 아주 매섭더라고요.”
민수 시장 뺏어먹지 말라는 뜻인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문이 열렸다.
“사장님,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네, 갖다 주세요. 사장님, 제가 맘대로 시켰는데 괜찮죠?”
궁금한데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한참 남은 것 같다. 대체 내가 뭐라고 불러서 회를 사 준단 말인가? 가볍게 시작하자.
“사장님 평판이 워낙 좋아서 어떤 분이신가 궁금하긴 했습니다.”
“아휴, 이 바닥 아시잖아요.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아다닌 거. 회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욕먹는데 무슨 평판이 좋아요.”
“사장님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몇 달 해 보셨으니까 아실 것 같은데요? 사장은 그냥 욕받이예요.”
어림없는 소리! 욕받이 하는 사장은 극히 드물다. 욕먹을 일은 직원들한테 돌리는 것이 이 바닥 생리 아니었던가? 잘되면 사장 덕, 안 되면 직원 탓이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마인드가 좋군.
대화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편해지고 있다. 김 상무 말로는 박 사장 한 번 움직이면 거래처 주문을 싹 쓸어 간다고 하더니, 대화 스킬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박준희 사장. 여러모로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최현아도 보통내기는 아니었지. 다른 의미로…….
입만 열면 상대방을 짜증 나게 하는 신묘한 스킬의 보유자. 말에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담겨 있는지 말로도 베일 정도였지. 거래처 직원들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뭐 말 다 했지. 한 거래처 사장은 다 들으라는 듯이 ‘싸가지없는 년’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박준희 사장은 확실히 다르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내년에 나주로 내려가신다면서요? 저도 내려갈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긴 한데, 나주는 어떤가요?”
“아직 허허벌판입니다. 저 처음 내려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사막인 줄 알고.”
“그 정도인가요? 하긴, 다들 내려가 봐야 헛돈만 쓸 것이라고 그랬으니……. 사장님이 처음으로 계약했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두 푼 들어가는 것이 아닐 텐데, 그런 결정 하기 쉽지 않거든요.”
네, 맞아요. 저는 그냥 문자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민수야 워낙 쟁쟁한 회사들이 많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하려면 관수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왕이면 대한전력이 밀어주겠다고 하는 나주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긴가민가했는데, 안성파워가 본사까지 이전한다고 하니까 지금 몇몇 업체들이 꽤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고민인데, 혹시나 저희도 내려간다고 하면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나주에 오시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주인은 아니지만, 환영 행사도 열어 드리지요.”
“약속으로 믿어도 되겠죠?”
쉽게 본론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먼저 먹잇감을 던져 줘야 할 것 같다. 짧은 직장 생활에서 얻은 노하우다. 실속은 없지만 그럴싸한 것을 하나 던져 주면, 상대방은 이게 웬 떡이냐며 덥석 문다. 종국에는 더 많은 것을 토해 내게 된다.
“그나저나 대한전력이 일반형 변압기를 고효율 변압기로 바꾼다고 하던데 준비는 잘되고 계신가요?”
허풍도 노하우이다. 대한전력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부들거리지만, 대한전력도 별수 없을 것이다. 원하는 스펙에 맞춰 개발을 해 버렸는데 어쩔 것이야? 대한전력이 모른 체한다면 나도 이판사판으로 덤빌 것이다.
“두성전기가 개발을 끝내긴 할 모양이네요. 계속 실패해서 올해는 안 될 것 같다고 하던데…… 뭐 그래도 거기서 어떻게 내놓을지 알아야 준비를 하니까 아직은 딱히 할 것이 없네요. 나주에서 뭐 들은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두성전기가 아닌 내가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면 화들짝 놀라겠군. 저 눈망울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긴 하다. 뭐 오늘은 거기까지 풀 필요는 없고, 피아 식별만 해 놓자고.
“저야 뭐 그냥 뜬소문을 접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정보가 중요한데, 이제 시작 단계라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네요.”
“민수 쪽에서 요즘 돌풍이시던데, 너무 겸손하시네요. 영업하시는 김희철 상무님이 워낙 베테랑이시라 저희는 요새 손가락만 빨고 있어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낌새다. 민수 건들지 말라는 뜻인가?
민수 시장에서 태양전기와 금성전기가 치열하게 싸워 댔으니 그럴 만도 하지. 금성전기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있지만, 치열한 싸움의 앙금은 오래갈 것이다.
싸움은 태양전기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됐다. 단가를 3퍼센트 낮추면서 금성전기 점유율을 빠르게 낮춰 간 것이다.
박 사장 아버지가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쓰러졌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선장실에 들어선 박준희 사장은 사장 취임과 동시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는 전설로 남았다.
전설이 된 박 사장이 나와 싸우겠다고 한다면?
나야 싸울 여력은 충분하다. 자동권선기 하나로 10퍼센트 넘게 단가를 인하할 수 있느니 말이다. 그러나 출혈은 둘째 치고 모양새도 안 좋을 것인데, 과연 옳을 일일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겠다. 좋은 회사는 아군으로 두자. 적으로 둘 생각이었으면 보자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인해 보자.
“저희야 마찌꼬바 수준입니다. 혹시 저를 경쟁자로 보시는 건가요?”
“경쟁자죠, 그것도 아주 무서운 경쟁자.”
뭐야? 그 눈빛은? 어라, 웃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