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4)
224 저 녀석
“어? 사장님, 여기 계셨네요?”
담배도 다 피웠고, 얘기도 다 했고, 날도 춥고, 회식 장소로 내려가려는데, 유민희가 옥상에 등장했다. 왜 내 눈앞에 나타나! 왜 네가 자꾸 나타나!
“어, 민희 누나! 누나 담배도 안 피우면서 왜 왔어요?”
민희의 등장에 홍철이도 놀란 표정이다. 직원이 직원 보는 것이 뭐 놀랄 일이냐마는 이 추운 날 비흡연자가 굳이 옥상까지 올라온 것은 생뚱맞은 등장이긴 하지.
민희가 늘 그렇듯 웃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사장님 찾고 다녔지. 홍철이 넌 사장님이랑 무슨 작당모의 하는 거야?”
“누나 그거 알아요? 한 부장님, 내년에 결혼할 것 같대요!”
“진짜? 네가 먼저 아니었어?”
“그러게요. 그 뭐냐, 무슨 고양이? 그거 아닙니까, 진짜?”
“고양이? 혹시 속담 얘기하는 거야?”
“맞아요. 그거그거.”
저 녀석들 대화를 듣고 있자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홍철이의 얼빵함과 그걸 찰떡같이 알아먹는 민희. 20대 초반의 대화가 저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젊은 생기가 느껴져 부럽기도 한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여기 왜 온 것이야?
“나 왜 찾았어? 빨리 내려오래?”
“아니요. 그냥 뭐. 안 보이시길래요.”
머뭇거리는 것이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할지 빤히 읽히지만, 직원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 주는 것이 사장의 역할이니 뭐.
“그래, 홍철아. 너 먼저 내려가. 난 민희랑 얘기 좀 하다 내려갈게.”
“네, 사장님.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누나 갈게요.”
홍철이는 대리고 민희는 평사원이지만, 한 살 누나라고 깍듯이 대하는 홍철이를 보자니, 기숙사 대장다운 품격이 느껴진다. 조직에선 직위가 깡패라고 해도 이 사회는 나이가 더 우선인 것을 알고 있구나. 칭찬 좀 해 줘야겠다.
“홍철아, 근데 너 바지가 너무 끼는 거 아니냐? 작작 좀 먹어라. 바지 뜯어지겠다야.”
“푸하하. 홍철아. 너 엉덩이 장난 아니다야.”
칭찬에 홍철이가 엉덩이에 잔뜩 먹혀 버린 바지를 꺼내면서 2차전 하러 내려갔다. 옥상 흡연구역에는 나와 민희 둘만 남았다.
“뭐 할 얘기 있어?”
“아뇨. 뭐 사장님 안 보이시길래 담배 피우러 나가셨나 해서 올라와 봤어요.”
“빤한 소리 그 정도로 하고 할 말이나 해 봐. 또 뭔데?”
“헤헤. 사장님 내일 혹시 뭐 하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영화 안 보실래요?”
“내가 너랑 영화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나에 대한 민희의 감정이야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감정이 나에게 넘어오지 않도록 막을 수는 있다. 일절 여지를 안 주면 그만이지. 그런다고 저 녀석이 물러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장님은 이럴 땐 진짜 옛날 사람 같다니까요. 영화를 뭐 꼭 무슨 사이여야 보나요? 직원끼리도 볼 수 있는 거죠.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사장도 직원이라고.”
“아니, 오늘부터 직원은 직원이고, 사장은 사장이라고 생각하려고.”
“푸하하. 진짜,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주세요. 미스터라고 얼마 전에 개봉한 건데 반응이 괜찮아요. 외부자들 보셨죠? 그런 풍이라고 하던데요.”
“그거 봤어.”
네가 보자고 하는 영화는 이미 다 봤고, 밥 먹자고 하면 배가 너무 불러서 안 되겠어.
“그럼 스타워즈 앤솔로지 1편 나왔는데, 그거 보실래요?”
“그것도 봤지. 난 본 영화는 다시 안 봐.”
민희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뭐지? 저 웃음의 의미는?
“이럴 줄 알았어. 그 영화 아직 개봉도 안 했거든요? 쳇. 너무하시네. 제가 그래도 양심상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건드렸는데,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영화 한 편 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각본이 잘 짜인 술책에는 당할 수밖에 없다. 저 녀석 은근 고단수네. 직원과 같이 영화 보는 것에 과한 의미 부여하지 말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
“하여간 진짜. 알았다. 미스터? 그거 보자. 근데 넌 누구 닮아서 그리 집요하냐?”
“헤헤. 제가 보자고 한 거니까, 제가 혁신도시점으로 예약할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맞다. 매번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으니 엄하게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이성에게 인기 많을 녀석이 왜 나한테 이러는지 원.
“아니야. 내가 그냥 광주로 갈게. 조조로 보고 점심 먹고 후딱 가자고. 저녁 되면 사람 많아져서 차 막혀.”
“진짜 저한테만 너무 까칠하게 대하시는 것 아니에요? 이러면 팬심이 흔들려요.”
그거 듣던 중 바라는 바로군. 팬심이 웬 말이냐! 환각에서 빨리 깨어나렴.
“앞으로 더 까칠하게 대할 테니까 제발 기대해 주라.”
“쳇.”
민희가 귀여움을 만방에 과시라도 하겠다는 듯이 흥치뿡 표정을 짓는다. 난 경전을 구하러 서역으로 떠나는 삼장법사요, 박연폭포 앞에서 시조를 읊는 서경덕이다. 흔들리지 않을 테다.
“근데 사장님 혹시 그 박 사장님이랑 사귀기로 하신 거예요? 썸 수준이 아닌 것 같던데요?”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사생활이니까 그런 거 묻지 마.”
“다행이다.”
민희가 혼잣말인 듯 내뱉었지만, 혼잣말치곤 너무 크게 얘기한다. 이거 들으라고 하는 소리네?
“뭐가 다행이야, 인마.”
“아니에요. 헤헤. 사장님도 연애하셔야죠. 팬으로서 응원하겠습니다!”
“진심이 안 느껴져.”
“헤헤. 사장님 이제 내려가요. 추워요.”
잠깐 방심한 탓에 민희의 깊숙한 팔짱 기습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확실하게, 단호하게 얘기를 해 놔야겠다. 일단 팔짱부터 풀어내고.
“민희야. 너 괜히 헛물켜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영 프로야. 난 직원이랑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런 감정도 안 들어. 오케이?”
“그냥 팬심이라니깐요. 아름이도 사장님 멋있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냥 팬클럽이라고 생각하세요.”
박아름 대리까지 거론하며 아닌 척하지만, 반간계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지.
“나중에 내가 여자라도 생기면 그 감정이 증오로 바뀔까 무섭다야. 일찌감치 마음 정리하고 회사에서는 일에만 매진하자고. 오케이?”
“하, 진짜. 저 구질구질한 사람 아니거든요? 안 그럴 거니까 걱정 마세요. 저처럼 이렇게 젊고 이쁜 애가 좋다고 그러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푸하하.”
“난 분명히 얘기했다.”
“아 쫌! 알았다니까요.”
멘탈 좋은 거는 인정한다. 그 좋은 멘탈로 내년에 수출이나 열심히 해 보자고.
한편으론 옥상에서 담배 피우던 애가 홍철이었던 것이 다행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기 좋아하는 덕준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도미시다 다께오의 ‘여인의 추억’ 완결 냈을지도 모른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말자고.
한차례 더 감행된 민희의 팔짱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 내며 폭식 참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돌아왔다. 처참함이 가득했다.
얼마나 먹어 댔는지 어자원 고갈이 걱정될 정도다. 회식장소는 10시 반까지였지만, 결국 10시가 못 되어 파장이 됐다. 더 이상 먹을 여력도 없었고, 제공할 음식도 바닥이 났다.
단체라고 할인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웃돈을 조금 얹어 줘야 할 것 같다. 엄청난 먹성에 씨푸드 뷔페 사장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자, 자, 갈 사람은 얼른 가고, 2차 갈 사람은 빨리 붙어. 한시가 아까워!”
술에 관해서만큼은 오늘만 사는 이상철 이사가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빨리 정리하고 2차 갈 생각에 의욕이 솟구치는 모습이다.
엉겁결에 회식에 참석한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은 이미 자신을 내려놓은 듯 이 밤을 달릴 기세다.
“김 사장님. 제가 숙소 잡아 놨으니까 여기서 편히 즐기세요.”
“아휴, 감사합니다. 신세 진 김에 맘 편히 신세 지겠습니다. 사장님은 2차 안 가십니까?”
“저기 따라갔다가는 맨정신으로 못 돌아올 것 같습니다. 새 차 받았는데 첫날부터 대리 부르면 되겠습니까? 하하.”
김 사장이 팔짱을 끼며 어색한 포옹을 시도했다. 오늘은 내 팔이 공공재라도 된 것 같다. 이 사람은 왜 또 그러나?
“사장님, 제가 사장님 존경하는 거 아시죠? 연배는 저보다 어리지만, 형님처럼 모시겠습니다. 하하.”
“하하. 왜 또 그러십니까?”
“사장님 알게 된 이후로 좋은 일만 가득합니다. 진짜 사장님 아니었으면 직원들 월급 어떻게 마련하나 그 고민만 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을 곧잘 하던 김 사장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아부 같은 말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어서 그러리라. 내 편에게는 고속도로를 내어 줄 테니 열심히만 해 주셔.
“김 사장 뭐 해? 왜 또 둘이 블루스를 추고 있어! 빨리 합류해!”
김 사장을 부르는 김 사장.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은 누가 봐도 우리 직원인 것 같고, 김희철 사장은 김상진 사장과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것 같다. 잘들 놀아서 좋다.
어느 때보다 풍성한 연말이 주는 기쁨이 이런 것이다. 기쁨 주고 사랑 주는.
기쁨과 사랑 가득히 받아 들고서 주차장에 내려왔다. 구석진 곳에 고이 모셔진 내 차를 바라보니 기쁨이 벅차오른다. 그새 소문 듣고 주차장까지 내려온 직원 몇 명이 환호성을 BGM으로 깔아 준다.
“와! 사장님 차 이거예요? 우와, 장난 아니다!”
“사장님! 이거 얼마예요? 저도 한 대 살까 봐요. 하하하하.”
그래 인마! 이거 물 건너온 거야! 돈 두둑하게 챙긴 너네도 기쁘겠지만, 나도 기쁘다. 그냥 기쁘다. 마냥 기쁘다.
그 기쁜 마음 가득한 채로 다음 날 내 새 차가 광주에 입성했다.
가격으로 치자면 눈이 휘동그레질 정도로 비싼 차는 아니지만, 남들과 다른 하늘색 번호판이 시선을 이끈다. 저게 말로만 들었던 그 차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후훗.
우쭐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경박해 보이긴 해도 딱 일주일까지만 이 기분을 만끽하자고. 그 이상 가면 추접스러울 것 같아.
누가 봐도 신 난 얼굴인 민희와 결국 영화를 봤다.
괜찮은 평, 높은 인기에 비해 영화는 그저 그랬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불필요하게 전개를 비튼 느낌이다. 갈등을 조장하려고 억지로 싸움을 붙이고 빌런을 등장시키는 미드가 생각났다. 영화가 영화다워야 영화지.
“사장님, 영화 어땠어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신 나 있는 민희가 소감을 물어 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소감을 묻고 싶다.
“재밌긴 한데, 뭔가 깔끔하다는 느낌이 안 드네.”
“그쳐? 감독이 할 얘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 좋은 배우들로 저렇게밖에 못한 것이 좀 아쉽긴 해요.”
“오호. 너 영화 좀 봤나 봐?”
“저 영화 되게 좋아하거든요! 우리 종종 영화 보러 가요.”
“됐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영화 안 좋아해. 유민희 씨.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아무래도 전략을 잘못 짠 것 같다. 민희의 감정을 억누르고자 구박을 하면 할수록 어째 더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업계 포상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나? 하여간 속을 모르겠다.
“영화는 제가 보여 드렸으니까 밥은 사장님이 사 주시는 건가요?”
“불신지옥 김밥천국에서 대충 먹고 가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제 과식해서 그런지 유독 더 시장기가 밀려온다. 위장이 얼마나 늘어난 것인지 원.
이러다 소파에 끼인 채로 앉아서 틱틱 소리 나는 리모컨 누르면서 대문짝만 한 피자 먹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가을은 말이 살찌기 좋은 계절이고, 겨울은 사람이 살찌기 좋은 계절이다.
똥 누다 살찐 허벅지를 보고 눈물을 흘린 유비의 심정이 이해된다. 여전히 바쁘고 힘들지만, 형편없었던 월급쟁이 시절에 비하면 팔자가 천지개벽했다.
유비야 달리 이룬 것도 많고, 마음도 아주 편하다. 살이 조금씩 붙어 가는 이 몸이 달라진 내 삶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회사 세울 때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살은 그만 찌자.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일단 옆에서 싱글벙글인 민희 좀 어떻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