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5)
225 우디 앨런
“사장님! 진짜 김천 가실 거예요?”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금요일. 폭풍 전야답게 거리는 한산하다. 여유롭게 조조 영화 한 판 때리고 나온 젊은 두 남녀가 점심 메뉴를 놓고 심각한 표정들이다.
난 딜레마에 빠졌다. 일 열심히 하는 직원인 유민희에게 맛있는 것 사 줄 용의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 시그널을 줄까 걱정된다. 그렇다고 장난처럼 던진 김천은 아닌 것 같고.
민희는 야누스 같은 표정이다. 김천은 너무하지 않냐는 표정과 단칸방에서 라면을 먹어도 행복할 것이란 표정.
뭐가 됐건 줄임말은 적응이 안 된다. 역시 무조건 젊다는 것이 좋은 게 아냐.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좋지. 근데 대체 이게 뭐라고 내가 이 고민을 하는지 원. 빨리 대충 먹고 집에 가서 미드나 보자.
“김천은 좀 에바고, 어제 과식했으니까 가볍게 피자나 한 판 하자고. 어때?”
“푸흡. 가볍게 피자 좋죠! 씬피자 말고 두툼한 치즈바이트로 해요!”
20대 젊은 감각이라 그런지 받아치는 것도 훌륭하다. 근데 팔짱을 왜 끼는 건데! 틈만 나면 팔짱 끼며 달려드는 민희를 내치는 것도 지칠 지경이다. 그래, 팔 하나 내주마.
길 건너에 보이는 프랜차이즈 피자점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이파리 올려놓은 걸 피자랍시고 내놓는 가게보다 무난한 프랜차이즈가 낫다. 샐러드바를 보니 또 흥분할 것 같다. 정말 이렇게 먹다 보면 공장 노가다 근육으로 가득한 이 몸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장님! 왜 입맛이 없으세요? 어제 술도 안 드셨잖아요?”
소심하게 먹고 있으니 민희가 가만두질 않는다. 이 과한 관심.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모르겠다.
“연말이라 매일 과식이야. 먹는 것 조절해야지, 안 그럼 굴러다니게 생겼어.”
“지금 사장님 몸 보고 그런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정작 걱정해야 할 저는 이렇게 먹고 있다고요!”
“넌 그렇게 먹어도 되는 것 아니냐? 칼로리 걱정하면서 먹을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하하하. 칭찬하시는 거죠? 여기저기 많이 숨겨 놨는데 다행히 안 들켰네요. 헤헤.”
나도 모르게 어디다 숨겨 놨냐고 세세하게 물어볼 뻔했다. 성인지 감수성. 난 아직 멀었어.
“열심히 일하면 쭉쭉 빠져. 우리 회사 어르신들 봐 봐. 그렇게 먹는데도 살찐 사람 한 명도 없잖아. 너도 일단 막 먹고 일로 다이어트 해. 난 대충 일하니까 살살 먹어야겠어.”
“누가 봐도 군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장님이 그런 소리 하면, 살찐 사람들 억울해서 복장 터져요.”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복장은 내가 터질 것 같어.”
“네? 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민희 표정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싹이 자라나지 않게 해 줄 타이밍이야.
“왜겠어? 너 때문이지. 팬심이라고 하길래 그러다 말겠지 하는데, 어째 더하는 것 같아? 이러다 보면 뭐 잘되겠지 하는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일 없어.”
민희가 또 시작이라는 표정이다. 끝을 안 봤으니, 자꾸 시작만 할 수밖에. 확실하게 맘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줘야지.
안 그럼 내가 잡아먹히게 생겼다. 민희도 매력이 가득한 녀석이다.
특유의 밝고 명랑한 성격이 일단 가산점 두둑하게 받고 들어간다. 웃을 때 반달이 되는 눈을 보고 있자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그 전에 두툼한 벽을 쳐야지. 난 서경덕이니까.
“제가요. 사장님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그것뿐이에요. 뭐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솔직히 바라는 것 있긴 한데요. 헤헤. 뭐가 됐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매번 그렇게 매몰차게 그러세요?”
“내가 뭐 오래 살아 본 것은 아닌데, 겪어 보니까 그런 게 있더라고. 마음속에만 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자나? 그럼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더 매몰되는 거야. 일종의 확증편향 같은 것이랄까? 내뱉었으니까 후퇴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
“푸하하. 맞아요. 어떻게 아셨대요? 사장님은 역시 예리하셔. 저 이제 후퇴 못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헤헤.”
속 편하고, 멘탈 강하고, 긍정적인 것만은 아주 맘에 든다. 잘 키우면 영업으로 한 획을 그을 인재가 될 것 같다.
“너 영어도 좀 한다고 했지?”
“네? 영어요? 난데없이 왜 그러세요? 의사소통 정도는 기본이죠!”
역시 인재가 맞군. 이런 인재가 왜 정신 못 차리고 이러고 있단 말인가!
“그래. 내년에 수출 제대로 해 보자. 중국 말고 영미권 국가도 가 보자고.”
“하하하하. 갑자기 뭐예요. 저 후퇴 못한다니까 도망가시는 거예요? 아, 웃겨.”
“내가 도망가는 것이 낫겠다야. 너도 괜히 고집 부리지 말고 맘 빨리 접어. 내년에 해외 출장 많이 보내 줄게.”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면 됩니다. 사장님이 자꾸 그러니까 더 오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어이쿠야. 그럼 내가 오히려 매달리고 치대고 질척거려 줄까?”
당돌하고 발랄한 모습만 보였던 민희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늘 웃기만 하던 애가 저런 표정을 지으니 신선하기도 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제가 뭐 이런다고 해서 사장님이랑 잘될 것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근데 뭐 어때요? 그냥 맘 편하게 팬심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제 감정이 이런데, 그걸 억지로 감추면서 저 혼자 속상해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린 것이군. 앞으로 친근하게 대해 줄게. 시간 나면 영화도 종종 보고. 그러면 된 거지? 대신 선은 넘지 말고.”
“와, 진짜. 저 인기 많거든요? 남자들 쳐 내기 바빴는데, 사장님 때문에 명성에 금이 가네요. 유민희, 진짜 많이 망가졌다. 아오.”
진지한 표정도 잠시였다. 이내 웃는 얼굴로 돌아와 분한 척 연기를 한다.
천성이 밝은 녀석이구나.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시 달리는 성격과 높은 자존감. 부모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아서 그게 부럽다.
“내가 왜 이러는지 얘기하자면, 결국 너만 욕먹게 되니까 그러는 거야.”
“왜요? 제가 왜 욕을 먹어요?”
“꼰대 같은 소리일 수 있는데, 사회생활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특히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정말 많지.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하고 다니겠어?”
“글쎄요. 직원이 사장님이랑 친하게 잘 지낸다고 하겠죠?”
“네버. 그렇게 좋게 볼 사람 거의 없어. 사장 돈 많은 거 알고 꼬리친다고 얘기할걸? 그럴 사람들 넘쳐 나. 아름다운 사랑 얘기도 우디 앨런의 막장 스토리로 바꾸는 게 사람 입이야. 그래서 말은 내뱉는 것도 신중해야 하지만, 들을 때도 조심해야 해.”
민희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다.
“우디 앨런? 어, 어디서 들어 봤는데? 아, 누구였지?”
느끼는 바가 있었다는 말은 취소다.
“영화 좋아한다더니 다 뻥이었구만?”
“아! 이제 생각났어요. 미드나잇 인 파리! 그거 찍은 감독 맞죠? 저 그게 재밌게 봤어요. 순간 깜빡한 거예요. 저 진짜 영화광이라니깐요. 근데 그 사람이 왜요? 누구처럼 불륜이라도 했어요?”
영화광이 맞는지 의심쩍다. 뭐 믿어 주지.
“뭐가 됐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너랑 내가 얽히다 보면 좋게 볼 사람이 없을 거야. 지금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주변을 의식 안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되기 마련이더라고.”
“아휴, 그렇게 주변 시선까지 의식하며 살려면 너무 피곤하지 않아요? 뭐 남한테 피해 주면 안 되겠지만, 하나뿐인 인생 사는데 하고 싶은 거 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내가 외국 안 살아 봐서 외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되더라. 말 퍼지는 것도 빠르고 소문도 많고. 괜히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사장님. 제가 소문 안 나게 잘할게요. 어때요? 솔깃하죠?”
저 능글맞은 표정을 보니까 화도 못 내겠다. 이 사회가 저 해맑은 녀석을 계속 해맑게 해 줘야 할 텐데…….
“선 넘지 말라고 했지? 너랑 나는 사장과 직원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선만 잘 지켜. 오케이?”
“알고 있어요. 저도 제 나름대로 잘 제어하고 있으니까 너무 대놓고 그러지 마세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처럼 안 되잖아요?”
“알지, 아주 잘 알지. 너 마음 다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잘 이겨 내 봐.”
“근데요, 사장님. 저 상점 받은 거 어디에 쓸 수 있어요?”
해맑고 멘탈 강한 녀석.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나란 놈이 저 녀석 마음에 잠시 들어앉았지만, 금방 빠져나갈 것 같다. 뭐가 됐건 영업 잘할 멘탈인 것은 확실하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과식 안 하려고 했는데, 또 많이 먹었네. 젠장.”
“상점 어디에 쓸 수 있냐니깐요? 얘기 안 해 주시면 제 맘대로 쓸 거예요!”
5만 원도 안 하는 점심 값 가뿐히 계산하고 나왔다. 세금 많이 내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세금 낼 돈으로 팍팍 써야겠다. 고작 5만 원. 세 발의 피 정도네.
밖에 나오자마자 민희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다. 팔 한 번 내줬다고 자기 팔이라도 된 것처럼 구네.
“민희야. 너 캐러반과 낙타 얘기 아니?”
“몰라요. 그게 뭔데요?”
“상인이 낙타 타고 가다가 밤에 잘려고 텐트를 쳤어. 근데 낙타가 춥다고 코만 텐트에 넣으면 안 되냐고 한 거야. 상인이 그러라고 했지. 낙타가 그걸로 만족했겠어? 앞다리도 넣고 뒷다리도 넣고. 결국 텐트를 차지해 버린 거지.”
“무슨 그런 낙타가 다 있어요? 웃긴다 진짜. 근데 사장님은 별의별 얘기를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저 박식한 사람 되게 좋아하는데. 헤헤.”
어떻게든 뻐꾸기를 날리는 것 정도는 익스큐즈하기로 했다. 내가 어찌 언론의 자유를 막겠는가.
“네가 낙타란 얘기야. 이게 아주 팔짱은 기본이네? 추우면 주머니에 손 넣고 걸어라.”
“에이, 팔짱 끼는 게 뭐 어때서요? 여자끼리도 흔하게 하는 거예요.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아니에요?”
“낙타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차나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사장님! 어제 드라이브시켜 주시기로 했잖아요! 드라이브에 상점 1점 쓸게요.”
“너도 참 존경스럽다. 그래, 뭐 차 뽑고 제대로 밟지도 못했는데, 함 달려 보자.”
신 난 민희를 차에 태우고 무작정 달렸다. 시내에서는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이, 시외에서는 죽이는 퍼포먼스에 나도 덩달아 신 나 버렸다. 페라리보다 뛰어나다는 제로백을 시험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꺄오! 사장님, 차가요, 바닥에 깔려서 가는 것 같아요! 와! 소리도 안 나고.”
“영광인 줄 알어. 이렇게 제대로 타 본 것은 네가 처음이야.”
“유후. 상점 쓰길 잘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자주 태워 주세요!”
“자, 이제 드라이브 다 했으니까 집에 가야겠지?”
시무룩한 척 연기하는 민희를 데려다주고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상점 타령하면서 과한 요구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선을 잘 지켜 줬다. 대견한 녀석.
집에 들어오니 피로가 확 몰려온다.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한 느낌. 딱 오늘이 그렇다. 기 빨린 기분 말이다.
그래도 빨린 기만큼 젊은 기운으로 채워진 느낌도 있다. 확실히 24살 젊은 애와 있으니 생기가 돌기도 한다. 직원이 아니었다면 잘 놀았을 것도 같은데…… 하긴 뭐 직원이 아니면 만날 일도 없었겠지.
내일은 준희 누나와 데이트하기로 했다. 여자 만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최유리한테서 시간 되면 보자는 연락이 왔는데, 굳은 의지로 무시했다. 마음 정리했는데 욕정만으로 만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이성 만나는 것도 좋긴 한데,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서 미드 보는 재미도 놓치고 싶지 않다. 새로 런칭한 미드가 쏟아지는데 보지도 못하고 넘겨야 한다니!
가끔은 20대 때의 삶이 그리워진다. 방탕하고 폐인 같기도 했지만, 없는 살림에 하고 싶은 거 하면서도 걱정 없이 보냈던 그 시절.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역할이 많아진다. 당연한 것이면서 한편으로 아쉽다.
그럴수록 회사를 더 키워야겠다는 열망이 커진다. 돈 많이 벌어서 20대 때처럼 팔자 좋게 살자는 열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