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6)
226 소쇄원
12월 24일만 되면 온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교회 오빠도, 절 오빠도 신 나는 이날.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핼로윈데이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답다.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가로수에겐 미안하지만, 크리스마스엔 트리가 제격이지. 저작권 문제로 캐럴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와! 차 뽑았다더니, 이거예요?”
차 세워 놓고 진부하게 A필러에 기대 팔짱 끼고 서 있으니, 준희 누나가 예상대로 환한 미소와 놀람이 공존한 표정으로 내 차를 극찬해 준다. 차 산 지 아직 일주일이 안 지났으니, 우쭐한 마음을 이어 가자.
“어서 오세요. 오늘은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차 되게 멋있는데요? 근데 차가 너무 요란하지 않냐고 뭐라 하지 않겠어요?”
“하하. 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일 겁니다. 그래도 빨간색으로 사려다가 꾹 참고 블랙으로 했어요. 자, 일단 타시죠.”
나를 위해 오늘 시간을 내준 누나에게 성심성의껏 대접하리라. 그래 봐야 드라이브 좀 하고 시간 되면 밥 먹는 것이 다겠지만, 함께한 시간이 보람되게 느껴지도록 하리라.
“누나, 소쇄원 가 봤어요?”
“담양 소쇄원요? 거기 갈 거예요? 저야 좋죠. 거기 좋다고 해서 가 보고 싶었는데, 여기 내려온 지 1년이 다 되도록 못 가 봤어요.”
“누나도 저처럼 집돌이인가 보네요. 하하.”
“그러게요. 정말 바쁘게 보냈는데,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그냥 집에만 있었나 봐요. 저도 뭐 일만 하느라 여유가 없긴 했어요.”
생애를 통틀어 40대에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40대 때의 윤택한 삶은 30대 때 가장 바쁘게 살아야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만 하며 보내야 하는 30대. 나도 그렇지만, 누나도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제 여유 부리며 살라고.
대목과 토요일이라는 환상의 결합으로 도로가 답답하리만치 막힌다. 1시간이면 갈 거리가 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겨울엔 배터리 소모가 심하다는 얘기에 차가 가다 멈추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걱정보다는 새 차 뽑았다는 우쭐함과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기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러다 견인돼서 끌려가면 웃기긴 하겠네.
“차가 정말 조용하네요. 제 차도 수입차 못지않다고들 하던데, 그래도 이 정도로 조용하진 않아요.”
“제가 모처럼 돈 좀 썼습니다.”
“정수 씨, 올해 돈 엄청 벌었겠어요? 그쳐?”
“평생 써도 모자랄 만큼 벌었죠. 그래도 아시잖아요? 세금만 해도 엄청나요. 그리고 회사 자본금도 늘려야 하고, 뭐 돈 들어갈 데 많죠.”
“세상에 돈 버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정수 씨도 똑같네요. 하하. 월급쟁이일 때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잖아요? 돈 쌓아 놓고 살다가 나이 들어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즐기면서 사세요.”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래서 돈 시원하게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인생 즐기려고 누나랑 이렇게 드라이브도 하고요. 제가 우리 준희 어르신께 이렇게 봉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하.”
“아주 진짜! 누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마음껏 때리라고 오른쪽 어깨를 내주었다. 누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아프다기보단 짜릿함이 느껴진다. 감정 변화가 고통도 달리 받아들이게 하는 모양이군.
“참, 누나. 이번에 대한전력 지역본부 입찰은 아쉽지 않아요? 양이 꽤 돼서 마냥 포기하긴 미련이 많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아쉽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우리 회사 역량이 안 되는 걸요. 그냥 관수에 미련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인드 컨트롤 중이에요. 하하. 아마 1월에도 입찰 계속 나올 텐데, 다른 업체한테 뺏기지 말고 꼭 다 차지하세요!”
“강 사장님도 저한테 아쉬운 소리 하면서 컨소시엄하자고 할 정도라, 누나도 그러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자동권선기 10대에, 곧 있으면 부싱체결기도 납품하니까 내년엔 소화 불량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그래야죠. 그러고 보면 정수 씨네 회사는 정말 미쳤어요. 한 달에 18,000대 만든다고 했죠? 진짜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아요.”
월 천 대 생산도 힘들었던 금성전기가 최근에는 5천대까지 캐파를 늘렸다. 그만큼 인원을 늘리기도 했지만, 자동권선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나가 나에게 엄청 고마워하는 이유다. 부싱체결기도 넘기면 너무 고마워서 껴안을지도 모르겠다. 아, 껴안고 싶다.
“앞으로 제가 많이 도와 드릴 테니까 돈만 준비해 두세요. 하하하.”
“하하. 비싸도 좋으니, 좋은 설비 있으면 팔아만 주세요.”
“제가 누나한테는 특별가에 공급하겠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개발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휴, 말도 마세요. 패드는 정수 씨가 자료 일찍 보내 줘서 금방 될 것 같은데, 아몰퍼스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설계하는 이사님도 머리를 쥐어짜는데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실력으로 뒤처지지 않는 금성전기조차 고효율 아몰퍼스 변압기 개발이 쉽지 않다고 하니, 내년 입찰에서 내 독무대가 예상된다. 다 해 봐야 600억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뭐가 걸리는 건가요? 들어 보니까 외함이 너무 타이트해서 중신이 안 들어가고, 그거 겨우 맞추면 온도랑 소음이 문제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중신이야 어떻게든 맞추면 되는데, 특히 소음이 제일 문제예요. 소음은 만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기껏 설계 뽑아서 시제품 만들었는데, 소음이 걸리면 새로 다시 해야 하니까, 우리 이사님도 골치가 아픈 모양이에요.”
“제가 힌트 하나 드릴게요. 소음 잡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답이 나올 거예요.”
“오호라. 단순하게 생각하라? 맘 같아서는 설계자문이라도 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자존심 상해서 안 되겠어요. 하하. 아직 시간 충분히 있으니까 우리 힘으로 해 봐야죠.”
“그럴 것 같아서 별 얘기 안 한 거예요. 저야 도와주면 좋지만, 누나 좋다고 물고기 잡아 줄 순 없잖아요.”
“하하. 고마워요. 저 좋아해 줘서.”
분위기 따뜻하다. 베트남전 파병 나간 군인이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지지고 볶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준희중독.
기나긴 차량 행렬을 뚫고 담양 소쇄원에 도착했다. 고요함 가득한 대나무 숲을 산책하며 선조들이 느꼈을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차장부터 만원이다. 영화관, 식당, 어디든 사람이 많은데, 여기까지 이리 많이 찾아올 줄이야. 우리나라 진짜 사람 많다.
“유유자적을 느끼고 싶어서 왔는데, 그러기는 글렀네요. 하하.”
“괜찮아요. 사람 많은 것도 그것 나름의 운치가 있잖아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마자 대나무 숲길이 나왔다. 한겨울에도 꼿꼿함과 푸르름을 간직한 대나무. 이걸 만든 양산보는 기억하지 못해도 소쇄원이 유명한 것은 이 한결같은 대나무 때문일 것이다.
누나가 대나무가 전해 주는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고 싶은지 양팔을 살짝 벌리며 걷기 시작했다. 손이 시릴 텐데? 그렇다면 손을 따뜻하게 해 줘야지.
손잡고 걷는 것은 의외로 불편하다. 근데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겠지.
누나의 손도 자연스럽게 내 손에 포개졌다.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물어본다면 글쎄라고 대답하겠지만, 적어도 서로 손잡고 걷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자 아기자기한 느낌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산의 앙상함 속에서도 건물들은 자연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 국회의사당이나 대한방송 건물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불편함이 전혀 없다.
“건물들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져요. 여름이나 가을에 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건물만 보면 좀 초라하긴 한데, 자연스러워서 마음이 편해지네요.”
“정수 씨는 자금성 안 가 봤죠?”
“아시잖아요. 중국은 저번 출장이 처음인 거.”
“하하. 그러네요. 자금성 보면 너무 웅장해서 압도되거든요. 중국이니까 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한데, 그런 거 보다가 소쇄원처럼 아기자기한 거 보면 실망할 법도 하잖아요? 근데 오히려 여기가 더 좋게 느껴져요.”
“음, 자연을 이기려고 하는 것과 동화되려는 것의 차이 같은 건가요?”
다음엔 보길도를 가 보고 싶다. 자연에 동화되면서도 자연 그 자체를 윤선도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어 버린 그 스케일을 느끼고 싶다. 일종의 정신승리겠지만, 정신승리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다.
“정수 씨, 시냇물 소리 들어 보세요. 저런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들어요.”
“누나도 어렸을 때 저런 데서 가재 잡고 개구리 잡고 그랬어요?”
“아휴, 진짜! 그 정도로 나이 먹지 않았거든요? 이제 앞으로 누나라고 하지 마요. 누가 보면 제가 엄청 나이 먹은 것 같잖아요.”
장난이 아니고 진짜로 물어본 건데…… 초딩 때 친구들이랑 동네 산에 올라가서 개구리 안 잡아 봤나? 남자와 여자의 경험 차이가 이리도 크구나.
관광이 아닌 말 그대로 산책의 느낌으로 돌 하나, 나뭇잎 하나를 만끽하며 발걸음을 느리게 움직였다. 왜 사람들이 고시 공부한다고 절간으로 가는지 알 것 같다. 여기 있으면 머릿속에 삼라만상이 잘 저장될 것 같은 기분이다.
“참, 정수 씨. 이번에 직원들 성과급 줬어요?”
누나의 질문으로 잠시간의 평온에서 벗어나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사장이 걸어야 할 가혹한 길이다. 한시라도 회사 생각을 저버릴 수 없는 신세.
“그제 연말회식 전에 시원하게 뿌리고 왔습니다. 금성전기는요?”
“우리 회사는 매출은 크게 뛰긴 했는데, 이익이 썩 좋지 않아서 많이 못 줬어요. 기본급 150프로요.”
“그래도 직원들 엄청 좋아했는데요?”
“아휴, 프라임일렉트릭만 하겠어요? 뭐 벌써 소문 다 났던데요? 억 단위로 나갔다고 하던데 진짜예요?”
“직원들 고생했으니, 그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억 단위 성과급이 사실로 확인되자, 누나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 너무 예쁘다. 새 차 탔을 때도 뿌듯했지만, 누나와 함께 걸어가는 것도 무척 뿌듯하다.
“소문이 진짜였네요? 이러다 프라임일렉트릭 채용 공고 나오면 사람 엄청 몰리는 것 아니에요? 우리 직원들 못 가게 단속 잘해야겠어요. 하하.”
“우리 회사는 일반 채용 잘 안 하잖아요. 그리고 현직자는 안 뽑으니까 걱정 마세요.”
“정수 씨는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벌기도 쉽지 않지만, 직원들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잖아요.”
“대단할 것도 없어요. 저는 직원들 엄청 굴리거든요. 그렇게 굴려서 돈 벌었으면 밥은 먹게 해 줘야죠. 전 그냥 대가를 지불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쁜 누나가 예쁜 얼굴로 쳐다본다. 하고 싶어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은 척척 해내고 있다는 부러움과 존중의 무언이 들리는 듯하다.
“자, 조금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으러 가죠. 담양 왔으니 떡갈비 먹으러 가요.”
“떡갈비 좋죠. 저녁은 제가 살게요.”
맛집이라고 찾아간 떡갈비 식당은 가정집을 개조한 허름한 곳이었다. 허름한 외형과 달리 가격은 상당하다. 1인분에 45,000원. 반찬도 화려하지 않다. 떡갈비에 금테 둘렀나 보네.
“음…… 촉촉하니 맛있네요.”
두툼한 함박스테이크 같은 떡갈비를 맛본 누나가 아주 환한 표정이 아니다.
“왠지 여운이 느껴지는 소감 같은데요?”
“하하. 맛있긴 한데, 뭐랄까, 가성비를 생각해 보면 살짝 퀘스천 마크가 붙긴 하네요. 정수 씨는 어때요?”
“떡갈비는 담양이 원조라고 해서 기대 좀 했는데, 소문난 잔치랄까요? 이 가격에 이 양이면 좀 아쉽긴 하죠.”
그래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시장기가 맹물도 꿀물도 만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누나, 잘 먹었습니다.”
“누나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거예요?”
투정 같은 말이지만, 왜 빨리 고백하지 않냐는 함의가 더 세게 다가왔다. 언제든 받아 주겠다는 의지로 느껴졌다. 오늘이 그날인가? 아직 더 뜸을 들이고 싶은데…….
“누난 저녁에 뭐 해요?”
“오늘 저녁? 글쎄요. 아마 정수 씨랑 술 한잔? 호호.”
“저야 좋죠. 그럼 일단 혁신도시로 가시죠.”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요. 선물 받은 와인 있는데, 혼자라 먹지도 못해요. 대신 처리 좀 해 줘요.”
“누나 집으로요? 늑대 한 마리 들여도 괜찮겠어요? 하하.”
“푸하하. 정수 씨를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를 잘 안다면서 이 들끓는 욕망을 모르다니! 저리 말하는데 바늘로 허벅지 찌르며 참을 수밖에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