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7)
227 여포의 꿈
크리스마스이브는 낮보다 밤이 더 따뜻한 날이다. 촛불을 많이 켜서 그런가? 촛불 켜고 이벤트하다가 모텔 불냈다는 뉴스가 매년 빠지지 않는데, 올해도 기사가 나올지 궁금하다.
따뜻한 이 밤에 ‘나 혼자 사는’ 준희 누나 집에 방문했다. 문이 열렸다는 삐리릭 소리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때요? 별반 다를 것 없죠?”
“이 동네 아파트는 구조가 다 똑같나 봐요. 우리 집이랑 똑같네요.”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좋은 향이 있다는 것만 다르네. 나도 집에 디퓨저 좀 갖다 놔야겠다.
“편하게 앉아 계세요. 뭐 별거 없긴 해도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요. 아, 집 구경하셔도 돼요.”
“안방도 구경해도 돼요?”
“푸하하. 침대 말고 뭐 없어요. 무슨 여자 기숙사 구경하러 온 사람 같네요?”
남자라면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지! 인터넷에서 떠도는 막장 원룸 사진이 정말인가 확인하고도 싶고 말이야.
집 구경은 크게 재미있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쁘다면서 집을 깔끔하게 유지했군.
아파트는 30평 대가 기본이라고 하지만, 청소하다 보면 집이 너무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청소가 얼마나 귀찮은 행위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청소를 소홀히 하면 정체불명의 털들이 난무하는 소름 돋는 집이 된다.
“혹시 저 올 줄 알고 대청소한 건 아니죠?”
“하하. 저 그 정도로 음흉하지 않아요.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왔는데 어지럽혀 있으면 더 피곤하지 않아요? 집이 깨끗해야 마음이 편해져요.”
“언제 우리 집에 와서 청소 좀 해 주세요.”
“초대는 기꺼이 받아 줄게요. 청소는 못 들은 걸로 하고요.”
집 구경한다면서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 서재로 추정되는 방에 들어갔다. 역시나 서재군.
책 참 좋아하는 사람 같다. 자기계발서, 힐링이라며 하나 마나 한 잡소리 적어 놓은 책은 보이지 않는다. 영어로 쓰인 책, 유명한 고전들 등 대학 시절 날 힘들게 했던 책이 눈에 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답네.
서재를 나와 부엌에서 뭔가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누나에게 풍부한 마음의 양식을 칭찬했다.
“책 많이 읽나 봐요? 어쩐지 외모에서 고귀함이 막 품어져 나온다 싶더니, 책의 힘이었군요.”
“하하. 지금은 뭐 장식용이죠. 예전엔 많이 읽었는데, 일 시작하고 나서는 손이 잘 안 가더라고요.”
“맞아요. 요즘은 책 한 권 읽기 쉽지 않아요. 집중해서 책 좀 읽을라치면 회사 생각은 떠나질 않고, 전화며 문자며 어휴.”
“사장 노릇 쉽지 않죠? 자, 다 됐습니다. 앉으세요.”
주황빛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아일랜드 식탁에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날렵하고 예쁜 와인 병. 꿈? 우리나라 와인인가?
“이건 우리나라 와인인가 봐요?”
“저도 와인은 잘 몰라요. 거래처에서 선물로 줬는데, 여포의 꿈이라고 영동? 거기서 나오는 와인 중에서는 최고라고 그러더라고요. 초선의 꿈도 있어요. 이거 다 마시면 그것도 꺼내 올게요.”
작명 센스 쌈빡하군. 동탁의 꿈도 있지 않을까 찾아보고 싶네.
와인 처음 마셨을 때가 기억난다. 과일촌 포도주스까지는 아니어도 과일 소주 같은 달달함을 기대하고는 벌컥벌컥 마셨다가 고생했던 기억.
술은 술일 뿐이다. 맥주는 흑맥주고, 와인은 드라이가 진짜라고들 하지만, 밥 먹고 나면 커피, 고기 먹을 땐 사이다가 최고다.
“서재 보니까 미셀 푸코 책도 있던데요? 광기의 역사.”
“푸하하. 부끄럽네요. 포스트모더니즘 한창 유행할 때 읽으려고 샀는데, 몇 장 보다가 말았어요. 졸려서 못 읽겠더라고요.”
“저랑 똑같네요. 전 냄비 받침으로 쓰고 있어요. 두툼해서 라면 먹을 때 목 많이 안 숙여도 되고 좋더라고요.”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던 누나가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정수 씨랑은 공통점이 꽤 많은 것 같아요.”
“눈빛이 너무 매혹적이라서 못 쳐다보겠습니다.”
“하하. 집 초대해 줬다고 아부하는 거예요?”
누나는 자신이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흔히 화장실 거울 보고 잘생겼다고 판단하는 그런 거 말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말이다. 주변에서 가만 놔두질 않았을 것 같은데, 왜 아직까지 혼자일까?
“누나는 연애한 지 얼마나 됐어요?”
“책 얘기하다가 난데없네요. 하하. 글쎄요.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도 안 나는데요? 유학 갔을 때부터였으니까…… 어휴, 너무 오래됐네요.”
“누가 보면 수녀원 들어간 줄 알겠네요. 왜 그리 남자를 멀리했어요?”
“하하. 제가 전에 얘기했잖아요. 저 눈 엄청 높아요. 어지간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저는 어때요? 눈에 좀 들어오는 것 같아요?”
“글쎄요. 아주 살짝? 푸하하.”
와인 살짝 입만 댔을 뿐인데, 서로 좋다고 하하호호 이러고 있다. 크리스마스는 술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밤이니 뭐.
그동안 단둘이 만난 적이 많았지만, 집에서 만나기는 처음이다.
집이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솔직함이 무기라는 누나답게 대화는 술술 풀려 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다.
많은 대화를 했지만, 역시나 돌고 돌아 사업 얘기로 빠졌다. 둘 다 어쩔 수 없는 사장이다.
“정수 씨는 내년에도 많이 바쁘겠네요? 내년엔 얼마나 더 성장할 것 같아요?”
“늘 바빠야죠. 제 목표가 뭔지 아세요?”
“이 바닥 탑은 찍었으니까, 빅5에 들어가는 거?”
“역시 누나는 저를 잘 아네요. 10년 내에 남우전기 따라잡는 거예요. 빅5가 아니라 빅4가 될 거예요.”
“와우! 남우전기요? 저기 매출이 1조 가까이 될 텐데요? 정말 가능하겠어요?”
누나의 놀란 표정에서 가능할 것이란 믿음도 느껴진다. 고작 매출 2천억짜리 회사가 1조짜리로 크겠다는 포부가 허황된 꿈이 아닐 것이란 지지의 뜻이랄까?
“해 봐야죠. 솔직히 회사가 너무 빠르게 커서 불안한 면도 있는데, 지금까지 잘 이겨 내 왔으니까 앞으로도 잘되겠다 생각하며 달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것 같은데, 정수 씨라면 왠지 해낼 것 같아요.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 같은데, 알면 알수록 전혀 안 평범해요.”
내년 성장의 꿈을 가감 없이 설명해 줬다. 수출도 늘리고, 초고압인 전력용 변압기도 진출하겠다는 꿈.
누나가 경쟁 회사를 이끄는 사장이 아닌 동료로서의 조언을 내밀었다.
“그래도 전력용 변압기는 만만치 않을 거예요. 준비 많이 해야 해요. 우리 회사가 재작년에 하청 받아서 6천 키로짜리 하나 만든 적이 있는데, 어휴, 손해 많이 봤어요.”
“설계, 조립, 뭐 하나 쉬운 것이 아니긴 하죠. 일단 차근차근 설비부터 준비하려고요.”
“정수 씨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되겠죠. 하하.”
누나가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정말 못 쳐다보겠다. 영롱한 눈을 보고 있자니 보름달 보고 돌변한 늑대가 될 것 같다.
“너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마세요. 저 돌변할지 몰라요.”
“하하. 언제는 말하고 돌변했어요?”
최적의 달콤함을 선사했던 입술을 다시 맛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인고해 냈다.
왜 인내하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다.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느낌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6천짜리 만들 때 뭔가 제일 문제였어요?”
다시 사업 얘기로 돌아가는 질문에 아쉬워하지 않을까 면밀히 관찰했다. 저 눈빛은 돌변하지 않아서 대견하다는 의미인가? 사업 얘기가 재미있다는 의미인가?
“뭐, 다 문제였죠. 제일 문제가 계약이었어요. 알다시피 꾼들 있잖아요? 대기업 다니면서 입찰 따 오고 우리 같은 회사 찾아와서 만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요. 어떤 것들은 업체가 서너 개 껴 있을 때도 있어요. 하청에 재하청, 재재하청.”
“그런데도 그걸 받았어요? 마진이 안 남았을 텐데요?”
“전력용 변압기가 엄청 남잖아요. 중간에서 그렇게 빼먹어도 계산기 두들겨 보면 남긴 남아요. 문제는 잔소리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 납기는 촉박하고 조립은 까다로운데, 서류 준비며 검수며 시간 다 잡아먹죠.”
“그래서 제때 납품했어요?”
“당연히 연체 먹었죠. 처음이라고 신경 많이 썼거든요. 물론 성능이 잘 안 나오기도 했지만, 툭하면 검수한다고 와서는 시간 뺏는데 뭐 어떻게 못하겠더라고요.”
6천kVA짜리 변압기도 중소기업이 하기엔 벅차다. 그런데 난 몇만, 몇십만kVA짜리를 척척 만들어 내는 꿈을 꾸고 있다. 어지간한 빌라만 한 크기의 변압기. 그 정도는 만들어 줘야 사업 좀 하는구나 하지 않겠나!
“우리 누나 자주 만나서 자문 좀 구해야겠네요. 그 쓰라린 경험 잘 전수해 주세요.”
“언제 또 우리 누나가 됐어요? 하하.”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여포의 꿈이 사라졌다. 이제 초선의 꿈을 맛볼 차례로군.
“둘 다 스위트 와인이긴 한데, 이게 조금 더 달고 떫은 맛이 덜하다고 하더라고요. 이것까지 다 마시고 가세요.”
“아휴, 왜 자꾸 술을 먹일까요? 하하.”
달콤하긴 해도 12도짜리 술이다. 계속 마셔 대다간 위험해질 것 같다. 정신이 아니라 몸이.
“누나는 저랑 안 보기로 했으면 오늘 뭐 할 생각이었어요?”
“여기서는 정수 씨 말고는 볼 사람이 없어요. 정수 씨가 당연히 보자고 하겠지 하면서 기다렸겠죠?”
변화구치고는 꽤 빠른 속도다. 누나의 멘트가 점점 과감해지는 느낌이다.
“하하. 농담이고요. 인천 집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차 막힐 것 같아서 살짝 귀찮아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정수 씨가 데이트 신청해서 못 이기는 척 받아 줬죠 뭐.”
“못 이기는 척이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이 받은 것 같던데요?”
“하하. 인정.”
사장이 사업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못 가겠냐마는,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터전을 떠나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나 역시 타지 생활이지만, 덕준이도 있고 가족처럼 지내는 직원들이 있어서 나주에서 생활이 그나마 수월하다.
“타지 생활이 쉽지 않죠? 저야 원래 집돌이긴 해도 친구도 있어서 좀 낫긴 한데, 누나는 힘들 것 같아요.”
“정수 씨 제일 부러웠던 것이 한 부장님이었어요. 그렇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겠어요?”
“하하. 이 새끼 저 새끼 해도 친구란 존재는 힘이 되죠. 누나한테는 제가 친구가 돼 줄게요.”
“운동이나 빠지지 말고 매일 나와요. 친구해 준다면서 누나 타령 좀 그만하고요.”
투정 가득한 답을 내놨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사랑은 아니지만 우정보다는 가까운 지금의 관계, 나쁘지 않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시계 두 바늘이 처음 출발 지점에서 만났다.
“12시 넘었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정수 씨도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치열하게 살면서 회사 잘 이끌어 가 보자고요.”
“아직 해 넘어가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송구영신은 너무 이르지 않나요? 새해 인사는 다음 주에 하는 걸로 해요.”
“어잉? 이젠 데이트 신청도 다양하게 하네요? 하하. 뭐가 됐건 건배해요.”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간직한 30대들의 만남. 종이처럼 확 타오르지 않고 이제 막 불 붙은 숯처럼 은은하게 타오른다.
첫눈에 불 붙어 피크를 찍고 급락하는 것보다 이렇게 빌드업해 가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다. 사춘기 시절 옆 학교 소녀를 그리며 애탔던 기분도 생각나고 말이다.
건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고 싶지만, 내 자신이 제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이니 경건하게 보내야지.
“자는 시간이 몸에 익어 버렸는지 여지없네요. 누나도 피곤할 텐데 이쯤에서 안락한 휴식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가려고요? 집이 멀면 자고 가라고 하고 싶은데, 바로 옆이라 잡지도 못하겠네요.”
일어나서 현관으로 향하는 찰나에 들려오는 말에 귀가 번뜩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복기해 보니 순수한 의미가 더 많이 느껴졌다. 그래, 모든 말을 에로스로 해석하지 말자.
소파에 개어 던져 놓은 코트를 집어 입으려는데 누나가 품 안에 들어왔다. 뭉클한 감촉이 옷을 타고 전해졌다.
“오늘 덕분에 잘 보냈어요. 많이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누나니까 한번 안아 줘도 되죠?”
안아 준다기보다 안긴 것 같지만, 뭐 어떠랴. 따뜻한 감정만 느끼면 그만이지. 전달받은 그 감정 그대로 등을 어루만져 줬다. 이것이 크리스마스다.
찰나였지만, 억겁같이 느껴진 포옹을 끝냈다. 그것뿐이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게이지를 채웠다. 아 워너 위 슈어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