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28)
228 좀비
풍성한 성과급으로 유례없이 따뜻한 연말이 찾아왔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렇게 한 해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어차피 매일같이 뜨고 지는 해이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괜히 일하기 싫어지는 날이다. 종무식 끝나면 퇴근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내 어찌 모르리오.
내년엔 올해보다 더 빡세게 일하자는 엄포와 올드한 구호 제창으로 종무식을 마쳤다. 구구절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참았다. 사장은 말이 없어야 해.
종무식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구내식당에서 향긋한 고기 육수 냄새가 흘러나왔다. 일찍 끝내더라도 밥은 든든히 먹여야지. 영양사에게 특별히 요청한 왕갈비탕을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비워 버린 것으로 올해 회사 업무를 종료했다.
“사장님, 저희 먼저 퇴근할게요!”
“네. 연말 잘 보내고, 내년에 만나요.”
김지연 대리를 우두머리로 한 사무실 직원들이 화장을 고치고 퇴근 채비를 했다. 다 같이 카라멜 마끼아또라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꽃단장한 민희가 환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저희 이쁜 카페 가기로 했는데, 사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예의상 한 소리에 내가 간다고 하면, 눈치 없다고 욕할 거 아냐?”
“헤헤. 어떻게 아셨어요? 사장님하고는 다음에 놀아 드릴게요.”
밝고 명랑한 민희가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김 대리 팔짱을 끼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다들 연말을 즐기러 나갔지만, 난 오늘도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저녁에 송년회를 겸한 삼총사 모임이 있다. 한가로이 집에서 미드나 보고 있을 순 없지.
시간 좀 때우려고 퇴근하려는 공장장 발목을 잡았다. 악덕 사장이니 퇴근 못하게 수다나 좀 떨자고.
“공장장님!”
현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체크하고 기강 잡기 바빴던 공장장도 딱 히 할일이 없어 보인다.
“어, 사장님 왔어? 얼굴 보니까 붙잡을 모양이네? 허허. 빨리 도망갈 걸 그랬네그려.”
“하하. 저랑 수다 좀 떨다 가세요.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커피 좋지. 커피는 사장이 타야 제맛이지.”
종이컵에 믹스 넣고 봉지 잘 접어서 야무지게 탄 커피 두 잔을 대령했다. 마이 뜨거워예.
“올해도 다 갔구만. 사장님이나 나나 올해 참 열심히 살았어. 그치?”
“열심히 산만큼 보답이 있으니까 더 보람되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 그렇지. 대한전력 놈들이 물량 쏟아 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더라니까. 이제는 내가 할 일이 없어 죽겠어.”
금전적인 의미의 보답을 얘기했더니, 공장장은 생산량 확대라는 보답으로 받아들였다. 자나 깨나 회사 생각만 하는 악질 직원. 나 같은 악덕 사장에게 딱 어울리는 직원이다.
연말부터 물량을 쏟아 내는 대한전력은 역시나 한 납기에 5천 대 가까운 주문 공세를 퍼부었다. 작년 같았으면 욕지거리를 날리면서 죽었다는 함성을 전방에 5초간 발사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 회사는 든든한 바위가 되었다. 달걀 몇 개가 날아온들 깨질 바위가 아니다. 직원들은 신이 난 채로 변압기를 쭉쭉 뽑아냈다. 생산 걱정은 화장터로 간 지 오래다.
“아드님 보러 인천 올라가야 하는데 제가 붙잡고 있는 건 아니죠?”
“전화 통화나 하면 됐지. 내가 가 봐야 며느리만 불편해. 아들놈 얘기하니까 생각나네. 얼마 전에 말이야, 아들 녀석한테 급하게 전화가 왔어.”
공장장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낼 심산이다. 수다 떨 생각으로 현장 사무실에 왔으니, 어디 한번 들어 보자.
“왜요? 무슨 일 있었대요?”
“아니, 이번에 이사를 가는데,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안 내줘서 아주 급박했나 봐. 이삿짐 다 싸서 이사 갈 집 갔는데 잔금을 못 치르니 얼마나 환장하고 팔짝 뛸 노릇이야?”
“전세야 말 그대로 보증금이니까 만기돼서 나가면 당연히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법이야 그렇지. 근데 뭐 사람 일이 법대로 되나. 세입자 구해야 보증금 주겠다고 버티면 답이 없어. 그래서 아침부터 전화 와서 당장 급한데 1억만 어떻게 구해 줄 수 있냐고 그러더라고.”
집 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듣기는 했다. 전세 사기로 평생 모은 돈 다 날리는 위급함은 아니더라도, 당장 급한 마음에 칠십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손 벌리는 장성한 자식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공장장님 돈 많으시니까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겠네요?”
“하하하.”
자식을 위기에서 구원해 준 부모의 표정이 저럴까? 공장장이 환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기분 좋으셨나 봅니다?”
“아이, 당연하지. 뭐 맘이야 자식 놈이 그런 일 겪지 말라고 번듯한 집 한 채 사서 편하게 살았으면 싶지만, 그거야 그놈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래도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자식 놈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야? 하하하.”
“아드님도 공장장님 덕분에 이사 잘 마쳐서 좋았겠습니다. 그래서 보증금은 돌려받았대요?”
“일단 내용증명 보내 놨고, 기다렸다가 안 돌려주면 소송 거는 수밖에 없지. 진짜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딱 그 말이 맞아. 집 몇 채씩 가지고 있는 놈이 1억이 없다고 그 난리를 쳐? 못된 놈들.”
99를 가졌어도 1을 더 가서 100을 채우려는 것이 가진 자의 본능이라고 하지 않나. 전국을 불타오르게 했던 촛불집회로 대통령도 끌어내렸으니, 앞으로 세상은 좀 나아지겠지.
“그래도 공장장님이 그만한 돈이 있으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제가 앞으로 돈 더 채워 드리겠습니다.”
아들이 겪은 절박함에 공감하며 분노를 터트리던 공장장이 금세 환한 미소로 돌아왔다. 돈의 노예만 되지 않는다는 전제로,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내년에도 빡세게 부려 먹겠다는 소리구만. 이제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야겠어. 변압기 만드는 것엔 이골이 났다 싶었는데, 한 달에 몇천 대씩 만드니까 이거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맞습니다. 몸 관리 잘하셔야 해요. 돈도 좋지만, 건강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요새 뭐 별일 없죠?”
순탄한 회사 일에 뭐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예의상 한번 물어봤다. 대한전력이 물량을 퍼부어도 끄떡없는 회사. 그런 회사 만드는 데 딱 1년이 걸렸다.
“우리 회사야 별일 없지. 근데 요새 아시아전기가 좀 시끌시끌한 모양이더라고.”
“아시아전기요? 전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뭐 무슨 일 있답니까?”
지난 입찰에서 중전기조합에서 빠져나와 개별 입찰로 뛰어들었던 아시아전기.
입찰 성공으로 230억가량을 먹었던 회사다. 규모도 있는 회사라 많이 먹었다고 체할 곳도 아닌데, 시끄럽다고 하니 궁금함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거기가 김포에다가 공장 아주 크게 지었잖아? 수출도 하고 이것저것 하겠다고 투자를 꽤 한 모양인데, 잘 안 되나 봐. 입찰도 개별로 뛰어든 것이 대출 때문에 그랬다고 했었지 않나?”
“그랬죠. 대출 무리하게 받아 놔서 매출 키워야 한다고 그랬었죠. 조합으로 받으면 회사 망한다고.”
“그게 발목을 잡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우리 회사는 진짜 고비를 잘 넘긴 거야. 그렇지?”
공장장이 전한 소문은 아시아전기가 대한전력 물량질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봐야 한 달에 2~3천 대 남짓일 텐데, 고작 그걸로 시끄러울 정도라니.
“아시아전기면 충분히 물량 뽑아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이네요?”
“뭐, 나도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고 건너 건너 들은 얘기라 확실치는 않은데, 불량도 나오고 직원들끼리 쌈도 나고 이래저래 시끄러운가 봐.”
좀 전까지 환한 얼굴이었던 공장장이 다시 어둠이 드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걱정이 많을 때 나오는 그 표정 말이다.
“걱정되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시아전기가 무너져도 우리에게 별 영향은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원래 걱정을 사서 하지 않나? 아시아전기 윤 사장이 입찰 때문에 중전기조합이랑 갈라졌어도, 원래 최웅민 이사장 그놈하고 형, 동생 하면서 지냈던 사람이라고. 최웅민이가 윤 사장하고 힘 합치면 어찌 되겠나?”
“그러니까 아시아전기가 다시 조합으로 들어가서 그 물량을 조합에 반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얘기가 돌더라고. 최웅민이가 뭐 하러 아시아전기 들락거리겠어? 뭐가 있으니까 그러겠지.”
8월 입찰 때 우리 조합이 완승을 거두면서 중전기조합을 제대로 밟아 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더니, 내년에 또 꿈틀거리겠는데? 좀비 같은 놈들.
“음…… 안 그래도 버티기 힘든 업체 서너 곳이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거기에 아시아전기가 그 물량 가지고 중전기조합에 다시 들어가면 둘 다 살아날 수도 있겠군요.”
“나도 그게 걱정이야. 진짜 나쁜 놈들은 조합 움직이는 몇 개 사일 텐데, 그놈들은 회원사들 망하면 오히려 좋아하지 않겠어? 그렇게 살아나 봐. 우리 죽이려고 혈안이 될 거 아닌가?”
조합 입찰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대한전력은 조합과 계약을 맺는 것이라, 조합 내 회원사들이 망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 회원사 몇 곳이 문을 닫으면, 나눠 먹기 양이 많아져서 살아남은 업체들은 더 나아질 수 있다.
중전기조합을 동일체로 보고 조합을 밟으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악랄한 놈들은 망한 업체들 시체 뜯어먹으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거기에 230억 물량을 확보한 아시아전기까지 다시 합쳐지면?
너무 상황을 나이브하게 봤다. 내년 입찰 때 정말 피를 부르는 혈전이 펼쳐질 수 있겠군.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으니 상황을 면밀히 지켜봐야겠다.
또다시 피곤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갔다.
“중전기조합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죠. 공장장님도 소문일지라도 소식 들리면 바로 얘기해 주세요.”
현장 사무실을 나와 마당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냈다. 불을 붙이려는 찰나에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내가 사 준 차! 덕준이로군.
“사장님! 추운데도 담배는 기어코 피우는구만?”
“빨리 와. 한 대 피우자.”
덕준이가 질색하는 표정이다. 담배에 환장하던 놈이 왜 저런 표정이지? 설마?
“나 오늘부터 금연이야. 새해 첫날부터 하자니 좀 그래서 오늘부터 끊을라고.”
“얼래? 이놈 봐라? 제정신이 아니구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뭐. 윤경이가 눈치를 줘서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엔 이제 그만 피울 때 되지 않았냐고 강하게 얘기하더라고. 좋지도 않은 거 들고 다녀서 뭐 해? 이참에 끊지 뭐.”
사랑에 빠진 덕준이가 낯설어졌다. 자취방에서 함께 만들었던 꽁초 선인장 페트병이 몇 개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덕준이가 대견하면서도 이질적이다.
“그래, 내가 진심으로 응원하마. 며칠이나 가는지 꼭 지켜보겠어. 근데, 그래서 지금 나 혼자 피우라고? 올해 마지막 날인데 혼자 쓸쓸하게?”
“그럼 오늘까지만 피울까?”
그래야 친구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우정을 확인했으니,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할 참이다.
“덕준아, 요새 중전기조합 쪽에서 들리는 얘기 없어?”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품는 덕준이가 고향의 맛이라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 요새 시끌시끌하지. 올해도 그렇게 힘들다고 죽는소리했는데, 지금 더 안 좋잖아? 내년 물량 확 줄었지, 재고 만든다고 돈 쏟아부었는데 나가리 났으니 환장하지. 구라가 아니고 진짜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해.”
“딱 타이밍 맞춰서 우리가 재고품 사 주겠다고 하니까 반응 좋을 것 같은데? 처음에야 지랄했어도 지금은 아주 구세주 보듯이 할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보자고 연락 왔다니까.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몰러. 아주 똥줄이 타다 못해 즐즐 새나 봐.”
세원변압기를 시작으로 중전기조합 업체들로부터 재고 변압기를 시원하게 사들이고 있다. 자재비만 겨우 건질 수 있는 가격이지만, 아쉬운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사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이참에 그 업체들 잘 다독거려서 우리 편으로 잘 만들어 놔. 자재라도 팔아먹게.”
“우리 회사는 이미 은인 됐어. 내가 찾아가잖아? 첨에는 믹스커피 내놓더니 지금은 홍삼꿀물 내놓는다니까. 크크.”
홍삼꿀물 얻어 마셔서 다행인데, 무안단물을 내놓는 회사도 있을 것이다. 그 회사들이 나를 죽이려 살아난 좀비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