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66)
266 바티칸
넉 달 넘게 끌어오던 중전기조합의 개지랄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회사 일에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나 버린 사랑니처럼 신경이 계속 쓰였다. 처음에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랬고, 나중에는 어떻게 잡아 족치나 생각하느라 그랬다.
오밤중에 갑자기 찾아오는 편두통 같은 존재가 사라지니 내게 강 같은 평화, 바다 같은 사랑이 넘친다. 8월에 있을 대한전력 입찰이 아주 기대된다.
이 기분 이어받아 광주까지 출타했는데, 다시 회사로 들어가기 싫다. 광주 올라온 김에 은혜나 갚고 가야겠다.
“네. 회장님!”
“너 회사냐?”
“아니. 전주 갔다가 내려가려고 이제 막 출발했는데? 왜?”
“잘됐네. 나 지금 광주에 있거든. 여기서 저녁이나 먹고 가자. 오 기자 불러서.”
“그거 좋지. 사 주는 밥은 언제든 콜이야. 가만있자. 6시쯤 도착이니까 시간도 딱이네!”
덕준이와 약속을 잡았다. 나에게 큰 은혜를 베푼 자들이다. 덕준이는 전국을 쏘다니며 여러 증거를 수집해 왔고, 오 기자는 여론을 제대로 흔들어 줬다. 내가 은혜 갚은 까치가 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분주해졌다. 고급진 레스토랑 찾아서 급히 예약하고는, 변압기 60대 하역했던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선물 정도는 에피타이저로 제격이지.
백화점 1층 명품 매장에서 지갑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월릿 2개를 집었다. 이번엔 변압기 3대 날아갔다.
자꾸 사 버릇 하니까 돈 쓰는 것에 제법 덤덤해졌다. 이런 게 돈 쓰는 맛인가 싶다. 달달한 것이 사카린 잔뜩 넣고 삶은 찰옥수수 맛이네.
백화점 인근에 자리한 식당으로 일찌감치 찾아갔다.
테이블 3개가 다인 작은 식당이었다. 요즘은 소규모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더라.
이름부터가 이탈리안 가정식 레스토랑이다. 핀란드수육덮밥이나 런던국밥 같은 이질적인 느낌이 난다.
메뉴가 코스요리 하나인데, 이름이 맘에 든다. 바티칸 정식이라…… 이탈리안 가정식이라면서 1인당 가격은 88,000원이고, 코스 이름은 바티칸이다. 이런 아방가르드한 감성 아주 좋아.
얼마 지나지 않아 덕준이 커플이 도착했다. 월급쟁이의 고단함이 온몸에 묻어 나왔지만, 얼굴만큼은 아주 밝다.
“어서 오세요.”
“정수 오빠, 여기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진짜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오윤경 기자가 사진 엄청 찍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음식 사진 찍으면서 앵글에 슬쩍 지갑 잡히게 하면 딱이겠군.
“오늘 윤경이 허락 없이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사진 찍기 전에 먹으면 큰일 나는 거야.”
덕준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매를 부르는 소리를 내던졌다.
“아, 진짜!”
덕준이의 어깨뼈가 어긋나면서 만찬이 시작됐다.
가정식을 강조해서인지 먹을 때마다 우아함을 떨어야 하는 불편함이 없다. 젓가락과 김치 달라고 하면 줄 것 같은 분위기. 비싼 만큼 편하게 먹자고.
“윤경 씨. 이번에 고생 많았어요.”
“뭘요. 기자가 기사 쓴 것이 뭐 대단한 건가요.”
“윤경 씨가 여론을 만들어 주지 않았으면 엉덩이 무거운 검찰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거예요. 윤경 씨 덕분에 검찰이 사건 엄청 키우고 있어요.”
“생각지도 못하게 반응이 좋아서 좀 뿌듯하긴 한데, 수사 방향이 좀 아쉽더라구요. 중소기업 폐해 쪽에 초점을 맞췄는데, 막상 검찰 수사는 비자금으로 가는 게요.”
덕준이가 한마디 보탰다.
“그래도 그놈들 줄줄이 구속됐잖아. 그게 보통 일이야? 열심히 했고, 그만큼 성과도 잘 나왔어.”
오 기자는 제 할 일을 다 했다. 그것도 기대 이상으로. 10만 원도 안 하는 이 코스요리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지.
테이블 밑에서 쇼핑백을 집어 덕준이에게 건넸다.
“이건 뭐냐? 빨래거리라도 담은 거야?”
“잔말 말고 열어 봐.”
이윽고 덕준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오 기자는 더 화들짝 놀랐다.
“너네 결혼 선물이야. 내가 윤경 씨한테 주면 혹시라도 문제 될 수 있으니까 덕준이 니가 받어. 윤경 씨 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이놈 보소. 아직 결혼식 날도 안 잡았는데 무슨 결혼 선물이야! 근데 이거 간지 좀 난다? 후후.”
“정수 오빠. 이거 웬 거예요? 좀 많이 비싸 보이는데, 이거 받아도 돼요?”
좋아하는 표정도 잠시, 오 기자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윤경 씨한테 주는 거 아니에요. 난 덕준이한테 줬어요. 하하. 밥이나 먹읍시다. 이 집 스테이크 잘하네.”
후식 사진 찍을 때 테이블 구석에 지갑이 올려져 있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선물 주는 사람이 기쁠 때는 받는 사람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할 때가 아닐까 싶다. 후훗.
배도 찼겠다, 커피나 마시면서 너와 나, 우리 얘기를 하면 되겠다 싶다. 이제 중전기조합이 어쩌고, 최웅민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그만하고 싶다.
“윤경 씨, 결혼 준비는 어떻게 잘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화제는 덕준이의 결혼이다. 가을에는 식 올리겠다는 덕준이. 희철 사장은 덕준이를 볼 때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투로 잘 생각하라며 한마디씩 던지곤 했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긴 하다.
“호호. 준비랄 것도 없어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고, 오빠가 어지간한 건 다 맞춰 주니까요.”
“후후. 내가 사전조사해 보니까 결혼 준비과정에서 제일 많이 싸운다고 하더라고. 큰일 앞두고 왜 싸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뭐 알아서 하라고 했지. 내가 이런 사람이야.”
오 기자 말에 덕준이가 세상만사에 통달한 표정을 지으며 의기양양해했다. 가정의 행복은 돈이 좌우한다더니 역시로구나.
“솔직히 집이 제일 문제잖아요? 여기가 서울에 비하면 헐값이라고는 해도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라서, 친구들도 보면 그거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데, 저희야 집 문제가 해결됐으니까요.”
말에서 여유가 넘친다. 많은 예비부부가 원한다는 ‘서울의 30평대 신축 아파트’에서 ‘서울’만 빠진 집이 있으니 그럴 것이다. 역시 돈이 해결책이로구나. 씁쓸하면서도 뿌듯한, 모순된 감정이 자리 잡았다.
“내가 처음에 윤경이 부모님 만나서 인사드리는데,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나주 촌동네에서 하꼬방 중소기업 다닌다고 말씀드렸어야지.”
“크크. 그랬지. 나주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표정이 살짝 안 좋아지시더라고. 말로는 사람이 성실하고 착하면 됐지 뭐 이러시는데.”
“우리 아들이 요즘 애들 같지 않고 착해, 뭐 이런 건가?”
덕준이와 자학 개그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데, 오 기자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해명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 이게 뭐였나면요.”
굳이 해명 안 해도 되는데 말이야.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을 사윗감으로 데려오면, 딸 가진 부모가 보일 수 있는 충분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과 사위, 며느리는 전문직이거나 대기업 다녀야 한다는 샤머니즘이 있는 세대니까.
“저희 아버지가 기자라고 하면 진짜 대단한 줄 알아요. 요즘은 널리고 널린 게 기자잖아요. 거기다 지역언론 기자면 진짜 푸대접이거든요. 그걸 모르시니까 제가 무슨 사자 직업이랑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푸하하. 제가 며칠 특강하면서 현실을 인식시켜 드렸죠.”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덕준이한테 부장 말고 의사나 판사, 검사라고 직책 달아 줄 걸 그랬습니다.”
“영업의사, 나쁘지 않네. 내일부터 명함 바꿀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돈, 권력, 명예에 따라 구분되는 계급의 벽은 여전하다. 결혼시장에서 중소기업 직원은 농어업 종사자, 대학원생과 함께 피해야 할 트로이카로 군림하고 있느니 뭐.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회사 직원만큼은 일등 신랑, 신붓감이 되도록 할 테다! 우리 직원들아! 돈 많이 줄 테니 단내 나게 일해라!
“그래서 요즘은 우리 한덕준 영업의사 바라보는 게 좀 달라졌어요?”
“그럼요! 그래서 왜 빨리 상견례 안 하냐고 압박하시긴 하죠.”
“결혼하고 나면 손주 보고 싶다고 압박하지 않을까요?”
“휴우. 압박의 연속이죠. 회사 선배도 보니까 애만 낳으면 다 돌봐 줄 것처럼 그러더니, 요새는 애 혼자면 외롭다고 동생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난리래요. 부모의 잔소리는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봐요.”
“그럼 한 방에 쌍둥이 낳으면 되겠네요.”
“하하…….”
이 말을 내가 아니라 덕준이가 꺼냈다면, 대차게 얻어맞았으리라.
“쌍둥이 좋지! 한번 힘 좀 써 볼까? 당연히 힘들 테니까 베이비시터 고용은 해야지. 어때? 솔깃하지?”
이럴 때만 눈치가 없는 덕준이가 굳이 한마디를 곁들였다. 오 기사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웃고 있지만, 이따 얘기 좀 하자는 표정이랄까?
하나도 힘들어서 못 키우겠다고 하는 판에 한 방에 둘이라니. 살림은 같이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육아는 엄마의 손을 더 필요로 하니 여자들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저도 혼자로 자라서 애가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근데 일과 육아를 같이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 고민이에요. 여자 선배들도 어쩔 수 없이 관둔 경우도 많아요.”
“그래. 그래서 내가 일 그만두란 소리 안 하잖아. 베이비시터 풀타임으로 쓰는 수밖에 없지. 우리 그 정도는 충분히 버니까 부담 없을 거야.”
“부담이 문제가 아니라, 오빠 같으면 애를 남의 손에 맡기고 싶어? 말이야 좋지, 막상 그게 될 것 같냐고.”
덕준이와 오 기자의 의견 대립. 우리의 일상을 얘기하자고 꺼낸 결혼 얘기에 이탈리안 가정식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 감돈다.
만나서 차 마시고, 전화로 얘기하고, 웃으며 안녕 하는 그런 사랑에서 경제적 독립과 노후를 생각하는 현실로 바뀌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닐 것이다. 연애는 꿈과 희망이지만, 결혼과 육아는 냉혹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다.
“부부 싸움은 나 없을 때 하셔. 그러고 보니까 우리 회사도 결혼하는 직원들 나올 텐데, 육아 시설도 있으면 좋겠다. 그치?”
“그거 좋지. 회사에서 애까지 봐 주면 그거만큼 좋은 일이 어딨겠어. 근데 당장 급한 건 직원들 숙소 아니냐?”
오 기자의 눈총을 피해 덕준이가 화제를 잽싸게 돌렸다. 근데 하필이면 아픈 곳을 찌르다니.
“직원 숙소요? 혁신산단에 아파트 엄청 사지 않았어요?”
“그건 기혼자들 살게 해 주는 것이고, 혼자인 애들은 기숙사 사는데, 지금 턱없이 부족하거든.”
혁신산단에 있는 아파트는 우리 회사가 다 샀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오 기자의 질문에 덕준이가 현실을 일깨워 줬다.
1인 1실로 만들었던 기숙사가 부족해 지금은 2인실, 3인실까지로 열악해졌다. 겨우 50명을 수용하고 있지만, 확 늘어난 직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돈 벌어서 공장을 넓힐 것이 아니라 기숙사를 크게 지었어야 했다.
“아, 그래요? 그럼 기숙사 못 들어간 직원들은 어떻게 사는 거예요?”
“어떻게 살긴. 영산포 읍내에 빌라들 몇 개 구해서 아쉬운 대로 살게 하고 있지. 그래도 애들이 돈 벌었다고 차 뽑고 그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공장에 컨테이너로 아파트 올릴 뻔했어.”
오 기자가 나한테 물어본 질문을 덕준이가 낚아채 대답했다.
의식주 중 식과 주는 해결해 주겠다. 회사 세우면서 맹세했던 다짐 중 하나였다.
직원들 개고생으로 회사는 커지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주거 문제는 오히려 열악해졌군. 이참에 기숙사 하나 웅장하게 지어 버릴까 보다.
“덕준아, 상업구역 분양 안 된다고 난리던데, 좀 크게 받아서 빌딩 하나 세울까? 기숙사 겸 사무실 겸 뭐 등등.”
“빌딩? 좋지. 이왕 지을 거 초고층으로 지어 버려! 서울에 사우론 있으니까 거긴 오르상크로 하면 되겠네.”
“이놈 이거 지 일 아니라고 막 지르는구만. 이번에 공장 확충하면서 자잘하게 숙소 몇 개 늘려 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단 말이지. 어때? 한번 맡아서 해 볼 텨?”
70년대 이탈리아 아트락이 흘러나오던 레스토랑에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 우리 자기. 커피 다 마셨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우리 회장님! 덕분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어휴, 며칠 안 먹어도 든든하겠어.”
그래, 이놈아. 행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