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81)
281 인사
“설계 잘 나왔어요?”
전력용 변압기 설계가 나온 날, 설계 공신들에게 두둑한 현금 다발을 쥐여 주며 회식 보내고, 난 준희 누나를 만나러 갔다.
아무리 바빠도 금요일엔 꼭 저녁 같이 먹자는 약속을 했다.
더없이 좋은 약속이다. 양질의 고칼로리 음식을 섭취해 충전한 체력을 토요일까지 쏟아 내고, 일요일에 재충전해서 월요일에 출근. 아주 딱이다.
“설계 잘 나왔으니 이렇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고기 먹고 있죠. 하하.”
강한 화력에 겉만 바짝 익힌 살치살 두 점을 한 입에 넣으며 질문에 답했다. 살치살 살살 녹는다.
“설계상으로 손실이 얼마나 나와요?”
고기 굽고 먹느라 정신없는데, 누나가 페어리루 같은 표정으로 자꾸 질문을 던진다. 궁금한 것이 많을 때 나오는 저 표정. 녹는 건 살치살뿐이 아니다.
“331킬로와트예요. 장난 아니죠? 설계대로만 시제품 나와 주면 탄탄대로일 것 같아요.”
“331요? 우와. 유에스산전 것도 350 밑으로 안 내려가는데, 설계 제대로 뽑혔나 봐요?”
“솔직히 저도 전력용 쪽은 잘 모르잖아요. 들어 보니까 자재만 비싼 거 쓰면 손실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가성비 따진답시고 손실 좀 높아도 넘어가 줬으니까 고효율을 안 만들었던 거죠.”
이 바닥 글로벌 1위인 지멘스가 만든 154kV 변압기 손실이 250kW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만드는 변압기는 500kW도 가뿐히 넘을 정도로 성능이 구리다. 최근에야 350kW까지 손실을 낮춘 전력용 변압기가 나왔지만, 여전히 격차가 크다.
격차의 원인은 돈이다. 우리나라 변압기 가격은 해외 제품보다 1억 원 이상 싸다. 대한전력이 싸게 만들어 달라고 하니 별수 있나.
적자 한번 나면 혈세 낭비니 뭐니 난리치니, 대한전력도 싼 걸 찾는다. 국내 산업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겠다, 전력손실 많아지면 전기요금 올릴 명분도 생기니 뭐. 담당 직원들은 대기업 영업맨들로부터 접대도 두둑하게 받고.
“대한전력에서 엄청 좋아하겠네요! 단가 맞추면서 손실까지 낮춰 버렸으니.”
“생산원가가 낮으니 가능했지, 안 그랬으면 그 정도까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였다. 대한전력이 요구하는 단가에 손실을 대폭 낮추자는 것.
비싸고 좋다는 자재 다 때려 부으면 손실을 낮출 수 있다. 문제는 높아지는 원가인데, 우리 회사엔 신기 들린 설비가 있다! 기존 업체 대비 자재비 비중이 확 높아져도 마진은 오히려 더 나은 걸로 나왔다.
기술이란 간절히 원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이지. 후훗.
“그럼 올해 안엔 유자격자 받을 수 있어요?”
“실사는 다 끝났고, 이제 시제품 만들어서 전기연구원에 보내면 되니까, 빠르면 올해 안엔 끝날 것 같아요.”
“하하. 미리 축하해요.”
누나의 건배 제의가 이어졌다. 원샷하고 나니 몸이 뜨거워지면서 도파민 분비가 왕성해지는 느낌이다. 오늘 다 죽었어!
사업 얘기는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할 것 같은데, 누나가 여전히 놓질 않는다.
연인이 됐어도 말로 나누는 대화는 여전하다. 하루 종일 회사에만 붙어 있는 일중독들이라 제 버릇을 개한테 줘도 개가 먹질 않는다.
이러다 몸으로 나누는 대화에서도 ‘임펄스 발사! 오실로스코프!’, ‘아, 임피던스! 트랜스퍼!’ 이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개발도 중요하지만, 결국 입찰 못 따면 꽝이잖아요. 네 업체 단합이 장난 아닐 텐데, 어떨 것 같아요?”
“업체 네 곳이 그동안 담합하면서 나눠 먹었으니까, 우리 회사가 끼어들면 압박 장난 아니겠죠. 근데 누나도 알잖아요?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내가 싸움을 피할 사람이 아닌 거.”
“정수 씨가 잘할 거라고 믿으면서도, 대기업들이 좀 악랄해야죠. 걔네들 하청 받았던 업체들치고 한숨 안 쉰 곳이 없다니까요.”
“짖으면 짖으라고 내버려 둬야죠. 어차피 우리나라야 대한전력만 상대하면 되니까. 나중에 수출할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 고기나 먹죠.”
대화에 집중하느라 고기 몇 점이 안까지 진하게 익어 버렸다. 이건 소고기에 대한 모독이다. 일 얘기만 하면 집중해 버리니 원. 이제 일 얘기 그만!
“누나, 이번 입찰은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되겠죠?”
나도 병이다. 화타가 와도 못 고칠 일중독 병.
“그럼요. 강 사장님이 중전기조합 남은 두 업체 찾아가서 잘 얘기했대요. 입찰 하나 주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죠.”
“그러겠다고 했나 보죠?”
“입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들인데 말 잘 들을 수밖에 없죠. 중부조합과도 교통정리 잘했고, 맘 편히 앉아서 입찰 결과만 받아 보면 될 거예요.”
좋다, 좋아. 그런데 기분이 영 걸쩍지근하다. 사업 얘기도 좋고, 다 좋은데 꽁냥꽁냥한 기분이 안 느껴진다.
이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그 전에야 서로 존대해 주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왠지 거리가 느껴지게 만든다. 이미 쿠폰 숱하게 찍을 정도로 정열적인 사이가 됐지만, 서로의 대화는 결혼정보회사 가입해 처음 만난 사이 같다고 할까?
그래. 일단 말을 까자. 서로 방구만 안 텄지, 알 만큼 아는 사이인데 뭐.
이럴 땐 우리말의 존비어 체계가 참 못마땅하다. 사회 전체가 경직되는 것 같다. 1월생과 12월생은 친구지만, 12월생과 이듬해 1월생은 양천제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벽이 쳐진 이상한 계급 문화. 차차 좋아지겠지 뭐.
“또 망상에 빠졌어요? 하하.”
잠깐의 침묵을 못 참고 누나가 말 한 바가지를 끼얹었다. 망상에 빠지는 버릇도 고쳐야 해.
“누나네 회사는 188억 정도 받겠네?”
“낙찰률 따지면 185억 정도 받겠죠. 근데 말끝이 좀 이상하네요?”
“185억이라, 좋네. 관수에 관심 없다더니 매년 가져가는 액수가 계속 늘어나는데?”
누나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저런 표정에 내가 도파민 과다 분비로 힘들어지는 거야.
“정수 씨, 근데 자꾸 누나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나올 거야? 궁디 때찌한다아.”
어머. 궁디 때지라니! 괜한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하하. 사귀는 사이인데 문득 거래처 사장님이랑 얘기하는 건가 싶어서. 우리 이제 방구도 트고 말도 편하게 하자.”
“누나라고 부르지 말든가!”
누나가 연기력 제로의 출중함으로 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와 정수 씨. 우리말 특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호칭도 중요하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도 이름을 불러 줘야 꽃이 되는 것처럼, 너와 내가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호칭이 필요하다.
“누나. 누나는 내가 뭐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준희 씨는 오글거려서 안 되겠고, 그냥 준희야라고 하면 한 대 맞을 것 같고.”
“으음. 자기? 하니? 달링?”
아직 콩깍지가 벗겨질 때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걸쭉한 덕담 한마디 나갈 뻔했다. 저런 가증스러운 여인 같으니.
“누나. 우리 밥 먹으러 와서 이러지 말자.”
“푸하하. 좀 그랬지? 뭐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네. 호칭이 뭐라고 이렇게 고민을 한담.”
호칭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누나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 이제 좀 연애하는 것 같네. 역시 속쓰림엔 개비스…… 아니, 걸쩍지근할 때는 서로 편하게 말하는 게 좋지.
“그래, 뭐. 그냥 내키는 대로 부르면 되지. 야, 니라고만 하지 말고.”
“그래, 우리 지 사장님. 아니다, 지 회장님. 하하.”
“얼씨구. 박 여사님, 이러실 겁니까?”
고기도 맛있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참 좋다. 좋으면서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가슴속 저 깊이 자리한 채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누나의 나이. 우리는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만, 주변에서는 가만두질 않는다.
나보다는 누나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더 거셀 것이다. 더 나이 들면 애 못 낳는다는 어마어마한 족쇄. 여자가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무슨 오지랖이 그리 많은지 원.
“누나.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응? 우리 엄마, 아빠? 정수 씨랑 사귀는 거?”
“응. 인사하러 안 오냐고 뭐라고 안 하나 싶어서.”
누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 기운이 느껴졌다. 압박이 많았던 모양이군.
“우리 엄마야 뭐 집만 가면 녹음기 틀지. 하하. 아휴, 진짜. 아빠는 별 얘기 안 하시는데, 정수 씨가 전력용 변압기 한다고 하니까 언제 한번 보자고 하시긴 해.”
“아버지께서 여전히 필드 나가고 싶어 하시는 거 아니야? 가만 보면 누나도 참 독해. 고문 자리라도 하나 내 드리지.”
“하하. 은퇴하셨는데 뭐. 지금도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래.”
“그럼 월급을 드려야지! 가족이 더한더니 독하네. 하하.”
가족 회사이지만, 가족에게 얄짤 없는 누나. 그래서 더 좋다. 반려견도 가족이라며 회사 돈으로 사료 사다 키우는 좆소기업 사장이라면 기겁할 일일 것이다. 좆소들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러고 보니 대화가 옆길로 샜다. 전력용 변압기 얘기가 나왔는데, 딴소리나 하고 있다니! 이 치유 불능의 일중독을 어찌해야 할꼬.
“근데 누나. 아버지께서 전력용 변압기도 하셨어?”
“유에스산전이 전력용 뛰어든 지 10년밖에 안 됐거든. 처음 개발할 때 아빠가 설계 자문하셨다고 하더라고. 좀 민망하긴 한데, 변압기 설계로는 아빠가 국내 최고였어.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뭐. 하하.”
“와우! 진작 얘기 좀 해 주지!”
“에이,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뭐. 옛날 기술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도 우습잖아. 그리고 정수 씨는 스스로 잘할 것 같아서. 괜히 자존심에 상처 낼 것 같아서, 개발 다 끝나면 얘기해야지 하고 말았지.”
이런 아름다운 박 여사 같으니. 누나 입으로 흘러나오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에서 저리 배려가 뚝뚝 떨어진다. 상은 이따 주기로 하고, 우선 하던 얘기나 마저 끝내자.
“말 나온 김에 인사드리러 갈까? 생각만 해도 어색하고 식은땀이 나지만, 그래도 사람 도리는 해야지.”
“하하. 괜찮겠어? 인사하러 가는 건 일도 아닌데…….”
여운 있는 저 말은 뭐지?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닐 테지.
덕준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윤경 기사 집에 인사하고 났더니, 결혼 언제 하냐고 들들 볶았다는 얘기 말이다. 37살이 된 누나가 짊어진 여러 압박과 부담이 느껴졌다. 속 편하게 살기 참 힘든 세상이야.
“말 흐리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 하하. 후속 절차가 예상돼서 그런 거지?”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외동이라…… 지금까지야 회사 꾸려 간다는 핑계라도 있었는데, 이젠 핑곗거리도 없어졌지, 뭐.”
“누나! 호텔 하나 통째로 빌려서 프러포즈 한번 신명나게 할까? 뭐 주변 시선에 너무 부담 갖지 말자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가야지. 우리 인생을 주변 등쌀에 떠밀려서 결정하지 말아야지.”
넌지시 비춘 프러포즈 의사에 누나는 반기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이내 감췄다.
“어휴, 무슨 호텔을 빌려. 그런 거 질색이야. 근데, 정수 씨.”
“응?”
“그런 건 깜짝쇼로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러면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는데…… 하하.”
“누나.”
“응?”
“앞으로 밥 먹을 때 조심해. 밥 먹다가 반지 하나 툭 나올 수 있으니까.”
사귄 지 한 달 남짓인 주제에 이러고 있다.
어렸을 때 사귀자마자 ‘여보야’라고 부르면서 유난 떨었던 애가 생각났다. 성대한 50일 행사도 치렀고, 글로벌 축제로 치를 계획이었던 100일 행사는 결국 무산됐다. 초반부터 달리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도 나와 누나는 다르다. 지난한 밀당과 썸으로 단련된 서로에 대한 믿음. 종갓집 간장 같은 진한 베이스가 있기에 유난 좀 떨어도 된다. 이 맛에 연애질하는 것이지 뭐.
“그럼 이번 입찰 끝나고 같이 인천 올라가는 건 어때? 아니다. 누나가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언제가 괜찮을지 얘기해 줘.”
“아휴. 내가 괜히 떨리네. 앞으로 잔소리를 얼마나 할지 모르겠네. 하하.”
“나는 지금부터 바둑 좀 배워 놔야겠군.”
그렇게 고기와 냉면을 말끔히 비워 냈다. 체력을 비축했으니, 이제 좀 쓰러 가 볼까나.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