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89)
089 색다른 경험
헹가래당하기 싫어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보니, 최유리와 문화생활 하기로 약속한 24일이 찾아왔다.
3시 15분 영화 예매한 것을 보니, 영화 보고 밥 먹고. 코스가 딱 그려지네. 밥 먹은 다음에는? 성급한 생각은 말자.
혁신도시 구경 좀 하고자 일찌감치 공장을 벗어났다.
평일이라 일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도 혁신도시 번화가는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은 불교 신자라더니만, 크리스마스 이브만큼은 십자가로 대동단결이네.
“오빠!”
정말 오빠란 단어를 만든 사람은 영원히 추앙받아야 한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그 말. 오! 빠!
“일찍 왔네? 근데 넌 크리스마스 이브도 없구나?”
“네? 아! 옷 때문에 그래요? 보자마자 이렇게 갈구기 있어요? 하하. 내가 편하고 봐야죠. 멋 부려 봐야 불편하기만 해요. 힐 신으면 다음 날 종아리 붓고 엄청 고생이에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리 털털한 냄새를 진하게 풍기다니.
오피스룩이 주는 설렘을 안겨 줄 생각 따위는 없단 말이냐! 겨울이니 40데니아까지는 흐뭇하게 받아 주려 했는데, 청바지에 패딩이라니.
청바지 핏이 주는 아름다움도 물론 좋다. 유행한다는 롱패딩이 아니라서 청바지 핏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체라인에 자신감이 있나 보군. 이리 보니 싱그러운 대학생 향기도 느껴진다. 그래도 영 아쉽다.
“저번에 봤을 때 키가 좀 크다 했더니, 다 힐이 선사해 준 선물이었네?”
“푸하하. 161이면 딱 적당한 키 아니에요? 오빠는 80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맞아요?”
“80이면 호빗이고. 179야. 어렸을 때 우유 조금만 더 마셨어도 180은 되는 건데, 너무 아쉬워.”
“요즘은 구두도 안에 깔창 들어간 것 많아요.”
“우리 외모 품평은 이 정도로 하고, 팝콘이나 사러 갑시다.”
오후 시간대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영화관이 북적북적하다.
나주 유일의 영화관이라 오일장이 열린 느낌이다.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나주 바닥에 소문 다 나겠다 싶다. 역시나.
“사장님!”
대한전력 송정길 과장을 하필이면 여기서 만날 줄이야.
“아이고, 과장님. 이 평일에 어쩐 일이십니까?”
“간만에 기분 내려고 오늘 연차 내고 영화 보러 왔죠. 애들 있으면 데이트도 제대로 못해요. 아, 여보. 인사드려. 왜 저번에 얘기한 것 기억나? 우리 처장님 본부장 승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
“아! 안녕하세요. 이 사람 와이프예요.”
“네, 안녕하세요.”
어색하고 불편한 인사. 시간대 보니까 같은 영화 보러 가는 건 아닌지 원.
“사장님 데이트하시는데 저희가 방해하면 안 되죠. 모른 척할 테니까 데이트 잘하세요.”
알은척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이라니. 이 업계도 좁지만, 이 나주 바닥도 참 좁다. 한 발짝 뒤에서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던 최유리가 선뜻 다가온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코를 강타했다. 향수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다. 마릴린 먼로가 향수가 잠옷이라고 한 이유가 다 있단 말이지.
“오빠는 유명 인사라 그런지 아는 사람이 많네요?”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디 맘 편히 다닐 수가 없네. 저분은 대한전력 직원인데,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야.”
“아하. 변압기 회사라더니, 대한전력하고 거래하는구나? 큰 회사면 갑질하고 그러지 않아요?”
갑질. 1년 전에야 그런 비슷한 것이 있긴 했지. 근데 지금은 대한전력만큼 고마운 회사가 없다야.
“그래도 공기업이라 덜한 편이지. 대한전력 덕분에 회사가 커지고 있으니까 나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야. 근데 주전부리는? 난 카라멜 팝콘!”
“네, 그걸로 하죠. 오늘 제가 다 쏘기로 했으니까 가만히 앉아 계세요.”
“유리 씨. 팝콘은 제가 사는 걸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머? 항마력이 달리네요. 제가 졌습니다.”
항마력은 또 뭐냐? 이따 화장실 가면서 검색해 봐야겠네. 매일같이 새로운 단어들이 쏟아지니, 잠시만 방심하면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야. 일만 하고 살면 이리된다니까.
실로 오랜만에 영화관 의자에 앉아 본다. 일이 바쁘기도 했고, 귀찮아서 컴퓨터로 보고 말았는데, 감개무량이다.
먼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최유리가 어수선하게 움직인다.
가방에서 뭐가 떨어졌는지 부스럭거리는 바람에 살짝 신체 접촉이 있었다. 조심성 없는 행동에 내 촉감이 감개무량이다. 여자로 느껴지긴 하나 보다.
영화는 아주 좋았다. 이만한 퀄리티면 천만 명이 봐도 수긍할 영화다. 말 같지도 않은 천만 영화도 많은데, 이 영화면 그 정도는 봐 줘야지.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이 나왔다. 이거였군. 이 장면에서 저렇게 능청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로맨스 형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아주 뇌리에 확 박히네.
“영화 어땠어? 난 덕분에 간만에 재밌게 봤네.”
“재밌다고 하더니, 역시 입소문은 거짓말을 안 해요.”
“로맨스 형이 옥상에서 한 손으로 라면 먹는 장면 있잖아? 나도 모르게 앞 사람 머리카락을 입에 넣을 뻔했어.”
키가 몇인지 불가사의인 로맨스 형은 다른 건 몰라도 연기만큼은 도저히 깔 수가 없다.
“진짜 연기 장난 아니죠? 이거 다음 달에 오리지널이라고 감독판으로 또 나온대요.”
“그래?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있다가 볼 걸 그랬네.”
“그때 또 보면 되죠. 일단 밥 먹으러 가요. 사람 많아서 늦게 가면 자리 없어요.”
영화관 들어오기 전보다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졌다. 입주 시작한 아파트가 늘어나다 보니 거주 인구가 많아지긴 했다.
나주 처음 내려왔을 때만 해도 해 지면 인적 찾기가 힘들 정도로 조용한 도시였는데, 그새 많이 컸네.
“오빠. 낙지볶음 괜찮죠? 매운 것이 당겨서요.”
“낙지볶음? 그래, 뭐 크리스마스 이브랑 아주 잘 어울리네.”
“푸하하. 저 느끼한 것 잘 못 먹어요. 그래서 저번에 파스타 먹을 때도 김치삼겹살로 시켰잖아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와 낙지볶음 먹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긴 하네. 털털한 것은 좋은데, 그래도 초반부터 너무 털 흩날리며 달리는 것 아니야?
나도 느글거리는 것 안 좋아하긴 하다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면 BGM으로 빌리 홀리데이 목소리 나 팻 매스니의 기타 연주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뭐 크리스마스가 별것 있나요? 나이 먹으니까 그냥 그래요. 참, 오빠 교회 다니세요?”
“아니, 성당 다니는데, 지금은 집에서 기도하고 있어.”
“오빠도 냉담이구나? 전 세실리아예요.”
종교 문제로 서로 기분 나빠할 일은 없겠네. 싸울 일도 아닌데, 신앙 문제가 불거지면 답이 없다. 이건 합격.
“찬미예수. 반갑습니다, 자매님. 지정수 안드레아입니다.”
“찬미예수 오랜만에 듣네요. 중학교 때 이후로 계속 냉담이라서 어색해요.”
“너도 성당 다닐 때 헌금 백 원씩 했어?”
“어떻게 알았어요? 엄마가 헌금 내라고 천 원 주면 과자 사 먹고 백 원만 냈는데.”
공통점이 계속 발견된다. 이러다 잘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예전 같았으면 이미 머릿속에서 자녀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바쁜데 연애가 가능할까?
그나저나 낙지볶음이라, 매운 것은 쥐약인데, 역시나 냄새부터 땀나게 만든다. 대목은 대목인지라 철판낙지볶음집도 바글바글하다. 그래서 매운 냄새가 더 진동한다.
“와! 맛있겠다. 이번 주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매운 것이 엄청 당겼거든요.”
“인턴하는데 누가 갈궈?”
“장난 아니에요. 인턴 때 잘 보이면, 졸업하고 바로 채용되는 케이스가 있어요. 로펌에서 일도 많이 시키긴 하는데, 인턴끼리 경쟁이 엄청나요.”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오네.”
“왜 그런 애들 있잖아요? 호박씨 까다가 힘 있는 사람 앞에서 아부하는 애들. 꼴 보기 싫어 죽겠어요.”
“변호사로 바로 나가는 것 말고, 판사나 검사 지원하면 되는 것 아냐?”
“저 같은 비법 출신은 엄두도 못 내요. 성적 상위권이어야 하는데, 저는 따라가기도 벅차요.”
그래, 나도 낙지볶음 따라가기 벅차다.
처음엔 먹을 만하다 싶었는데, 데미지가 쌓이니까 너무 맵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땀 흘리면서 낙지볶음 먹는 경험도 신선한데, 너무 매워.
“오빠 왜 이리 땀을 흘려요? 사우나 온 줄 알겠어요!”
“이거 먹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영장류라고 할 수 없는 거 아니야?”
“뭐예요. 전 환형동물이라도 된단 소리예요?”
그래, 척추 없는 동물처럼 뒹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야. 그렇게 흘리는 땀도 좋지. 여자로 느껴져서 그런지 이 쓸데없는 연상작용은 시도 때도 없다.
“오빠는 정말 매운 것 못 먹나 보네요. 먹기 힘들면 밥부터 볶을까요?”
“그래. 밥 볶자. 밥이 진리요 생명이다.”
“은근 개그 욕심 있네요? 그러다 아재 개그로 들어가면 못 헤어 나오니까 조심해요.”
아재 개그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재 개그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다들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괜히 안 웃긴 척하고 말이야! 이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진리요 생명인 밥이 철판 위에서 볶아졌다. 이건 먹을 만하겠지? 현란한 밥 볶는 기술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인류가 만든 최고의 단어가 들린다.
“오빠.”
이 매운 분위기에서 오빠 소리는 그야말로 청량감 가득한 일성이다.
“영화에서처럼 오빠도 사람 팔 자르고, 여자 나오는 술집에서 폭탄주 말고 그래요?”
“왜 영화 잘 봐 놓고 나한테 화살이니. 내가 그랬으면 지금쯤 내 또래 검사한테 취조받고 있겠지.”
“영화적 상상력이라고 하잖아요? 아마 저것보다 더 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우리나라를 보면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가더라구요.”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최유리가 많이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어받는다.
사회생활 하면서 부당함, 부조리 등을 겪고 나면, 지금까지 겪은 것은 오픈 베타였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청운의 꿈을 무참히 짓밟는 이 사회. 나부터라도 그렇게 살지 말자.
“나도 사업해 보니까, 그런 냄새가 나긴 해. 나같이 작은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 있으면 진짜 힘들지.”
“기자들은 귀찮게 안 해요?”
기자 하니까 눈에 거슬린 기사 쓰던 그놈이 생각나네.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총선 앞두고 개소리 하지 않을지 신경 쓰이긴 한다. 사업에 지장은 없겠지만, 시끄러워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니까.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 기자들이 신경 쓸 일은 없긴 한데,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 뭐 귀찮게 하면 다 고발해야지. 나중에 변호사 개업하면 수임 좀 맡아 줘.”
“오호. 파이팅이 넘치네요. 근데 기자는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것이 좋아요. 언론 중재 가 봐야 도움 되는 것도 없고, 재판 가면 힘들고 귀찮고.”
“재판 귀찮지. 엄청 귀찮아.”
“재판 좀 해 본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결국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생전 처음으로 경찰서, 검찰 조사실 구경시켜 주고, 재판 경험까지 안겨 준 태양전기 연놈들 생각이 나니 가만있을 수가 없더라.
그렇게 말이 길어졌다. 악연을 맺어 재판까지 갔던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고 나니 좀 후련해지긴 했다.
“세상에. 스케일이 작긴 해도 완전 영화네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뭐 정의봉에 호되게 얻어맞았으니까. 그나마 멍청했으니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엄청 고생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요. 재수 없어서 걸렸다고 오히려 더 분해할걸요?”
“그럴 것 같아. 그런다고 내가 계속 그 사람들 신경 쓸 이유도 없고, 내 일에 전념해야지. 감정만 내세워 봐야 좋을 거 없더라고.”
감정보다 이성에 무게 중심을 둬야 한다는 말에 최유리가 형식상 받은 소주잔을 들고 홀짝인다.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보네.
“맞아요. 결국 자기 일, 내 일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순간의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아요.”
“근데 술 못 마신다더니, 마셔도 괜찮아?”
“얼굴이 빨개져서 그렇지, 한두 잔은 괜찮아요. 그리고 원래 잘 모르는 남자 앞에서는 술 안 마시려고 하잖아요. 하하.”
“그래서 지금은 아는 남자가 된 거야?”
“조금?”
나쁘지 않네. 알면 알수록 특이하고 매력적인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