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90)
090 반전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했지만, 대화가 잘 통해서인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만남이 이어졌다.
서로 할 얘기가 많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좋은 시그널이 분명하다. 다만 이 관계를 어디까지 발전시켜야 할지는 미지수이다.
급할 것 없다. 일단 말은 잘 통하는 것 같으니, 천천히 알아 가다 보면 결정의 순간이 오겠지.
“오빠는 집이 어디예요?”
“왜 집을 물어보는 거야? 라면 먹고 가려고? 하하.”
최유리가 짐승 바라보듯 쳐다본다. 경멸의 눈빛은 아니다. 위험할 수 있는 멘트에 이런 반응이라니, 뭔가 불끈하는 느낌이다.
“나주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회사에서 먹고 자다가, 최근에 아파트 하나 구했어. 2주 뒤에 이사 가.”
“회사에서 숙식했다구요? 처량하게 왜 그랬어요? 더 나이 들었으면 홀아비 냄새 날 뻔했네요.”
서로 알 듯 말 듯 은은한 드립이 들어가도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나 아직 총각이거든요? 뭐 회사 일도 많아서 그러긴 했는데, 이제 한숨 돌렸으니까 사람답게 살아야지.”
워낙 단칸방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불편한 걸 모르긴 했는데, 총각 홀아비 냄새 안 나려면 이제 사장실 수면방은 벗어나야지.
“오늘은 차 안 가지고 왔어?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오빠 술 마셨잖아요?”
“당연히 대리 불러야지. 나주 바닥 좁아서 오래 안 걸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뒷좌석에 앉아 대리 기사가 끄는 차를 타고 가는데, 최유리가 피곤한 척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댄다. 이거 이러려고 술 마신 것이야? 그래 봐야 2잔이지만.
정수리에서 샴푸 냄새와 매운 낙지볶음 냄새가 느껴진다. 킁킁. 미안하지만, 다음에는 매운 것 먹으러 가지 말자. 속이 쓰리다야.
자는 척을 하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버티다, 술김에 최유리 손에 손을 올렸다.
악수할 때마다 흔하게 잡는 손이지만, 이럴 때는 손잡는 것도 참 쉽지 않다. 우린 생각이 너무 많아.
손을 잡는데 가만있어 준다. 아니, 오히려 잘 잡을 수 있게 손을 펴 준다. 이 녀석 안 그런 척하더니 은근 여우기가 있네. 곰보단 여우가 낫지. 자는 척하는 여우 같으니.
그냥 손이지만,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괜스레 설레게 한다. 이 정도 단계에서는 손만으로도 심장 박동을 마구 뛰게 할 수 있지 않나.
손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에서는 편의점 뛰어다니며 물건 구하러 다니고 있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이리 무섭다.
이왕 술기운 빌렸으니, 지금 자세에서 고개만 돌리면 서로 입김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대로 자녀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정신 차리자. 여기는 아우토반이 아니니 과속해서는 안 된다. 어이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20분이 걸려 최유리 본가에 도착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술 마신 상태에서 20대 여인이 어깨에 기댄 상황은 내 분신에게 고통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살짝 얼얼한데?
“전 여기서 바로 들어가면 돼요. 바로 차 돌려서 가시면 돼요. 이따 도착하면 연락해요.”
도착하면 연락해라라. 첫 만남 때는 없었던 멘트다. 아니야. 괜히 의미 부여하며 설레발 드링킹하지 말자. 그냥 하는 말에 의미 부여해서 밀어붙였다가 큰코다친 적이 한두 번이었나.
또 20분을 달려 내 전 재산이 들어간 공장에 도착했다. 연말이니 기분 좀 내라고 대리 기사에게 신사임당 하나를 줬다. 돈 없어서 택시 타는 것조차 망설였던 시절에 비하면 나도 참 많이 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몇 시간 동안 참았던 대견한 나를 위해 바로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이렇게 오래 안 펴 보긴 처음이네.
체내에 니코틴이 들어가면서 안정감을 찾아온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그리 놔두지 않는다. 공장이 시끌시끌하다. 이 자식들 또 싸우는구만. 여자 만나서 시간 잘 보내고 왔건만, 이 반전 같은 상황은 또 뭐람?
보육원 출신 애들은 회사가 집이나 마찬가지이다. 몇 명 애들은 밖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월세를 일부 지원해 주긴 했지만, 대부분은 회사 기숙사를 자기 집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
원래 집이 없었으니 딱히 갈 곳도 없는 아이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젊은 애들끼리 모여 있으니, 종종 싸움도 일어난다. 군대야 계급이 깡패인 데다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참고 버티는 것이지만, 회사가 군대는 아니니 별것 아닌 걸로도 참 많이 싸운다.
현장에서야 베테랑들이 확 휘어잡고 있어서 일에는 지장이 없지만, 자꾸 싸우다 보면 정 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대한전력 납품 시작한 이후로 일이 힘들어져서 그런지, 요 근래 더 많이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자식들 술을 즐겁게 처마셔야지. 꼭 저래 싸운단 말이야. 지금까지야 모른 척 넘어갔지만,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니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게 만들어 줘야겠어!
“이놈들아! 지금이 몇 시냐!”
돌진하려는 놈, 말리려는 놈, 방관하는 놈. 온갖 군상들이 몰려 있는 격투기장으로 달려갔다. 흥분한 짐승의 냄새가 독하게 나는구만. 달콤한 여인의 향기를 맡던 코가 당황할 지경이다.
“사장님! 야야. 얼른 쟤네들 좀 말려. 사장님 오셨잖아!”
“왜 그래? 뭐 때문에 이브 날 소리 지르고 있어? 즐겁게 놀라고 휴게실 꾸며 줬더니, 이것들이 옥타곤을 만들어 놨네.”
흥분한 짐승이라도 사장 앞에서는 순한 양이다. 직원들에게 윽박지르거나 권위주의적으로 대하지 않았지만, 사장에게 깍듯한 것을 보면 내 권위가 확고한 것 같아 흐뭇하게 만들어 준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애들이 술 마시다가 감정이 격해졌는지 이렇게 됐네요. 바로 정리할게요.”
보육원 출신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나름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이홍철이 대표로 나섰다. 보육원 나오고 나서 4년간 알바를 전전하며 힘들게 살았기에 회사 생활에 대단히 만족하며 지내는 녀석이다. 맏형답게 아이들을 잘 통솔하고 있긴 한데, 46명이나 되는 애들을 제어하기는 쉽지 않겠지.
“그래서 욱진이랑 태영이 너넨 왜 싸운 거야? 내가 주먹보다는 말로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냐? 욱진이 얘기해 봐. 흥분 좀 가라앉히고, 인마.”
딱 보니까 서로 다른 보육원 출신 애들끼리 싸움이 났다.
보호종료 아동이라고 하는 보육원 퇴소자를 직원으로 채용하고자 할 때 제일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46명 중에서 백지원 출신이 24명으로 가장 많지만, 다른 보육원에서 온 애들도 22명이나 되니, 저들 간에 은근히 파벌이 형성됐을 것이다.
“아니요. 그냥 술 마시면서 놀고 있는데, 저 새끼가 말끝마다 욕을 하길래 적당히 좀 하라고 그랬더니, 저한테 개지랄하잖아요.”
“뭐, 이 새끼야?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씨발 놈이 회사 먼저 들어왔다고 존나 거들먹거리고. 너 이 새끼야. 넌 밖에서 나 만났으면 뒤졌어.”
얘기하다가 서로 흥분하는 이 뻔한 패턴. 어차피 자기들 유리하게 얘기할 것이 뻔한데, 자초지종을 듣지 말 것을 그랬다.
괜히 내 몸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내가 격의 없이 대한다고 해도, 사장 앞에서 개새끼 소새끼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그만해! 이 자식들이 정신줄을 놨나. 내가 너네들 친구로 보여? 내가 흥분 가라앉히라고 했지? 사장이 얘기하면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어디서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태영이 넌 입이 없어?”
“죄송합니다.”
대장 홍철이가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인다. 그래, 뭐 네 잘못은 아니지. 너도 동생들 추스른다고 고생이 많다. 그래도 주먹보다는 말로 타일러라. 여기는 야인시대 세트장이 아니야.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애들한테 좋게 얘기하겠습니다. 애들 관리 잘하겠습니다.”
“홍철아, 네 잘못 아니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는 것이 맞지만, 내가 봤을 때 서로 감정만 상하는 것 같은데? 싸우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 같아.”
봉숙 원장이 당당하게 얘기했듯이 백지원 애들은 확실히 순둥이들이다. 욱하는 경우는 있어도 절대 선을 넘지는 않는다.
세 번에 나눠 들어오긴 했지만, 처음 입사한 애들이 길라잡이 역할도 해 주고, 같이 어울렸던 끈끈함이 있어서 그런지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른 보육원 세 곳에서 들어온 애들이다. 그중에서도 화정보육원 애들이 좀 유별났다.
6명으로 가장 소수라서 그런지 저들끼리 똘똘 뭉쳐서 배타적인 분위기를 풍기니, 다른 애들과 충돌이 잦았다. 공교롭게 내 앞에서 욕을 퍼부은 태영이도 화정보육원 출신이다.
“태영이. 너 이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싸우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아? 내가 봤을 땐 아닌데?”
“아니요. 저것들이 자꾸 성질을 건드리잖아요. 아니, 저도 일 잘하고 있는데, 옆에 와서 조립 몇 대 못했네 어쩌네 하면, 사장님 같으면 가만있겠어요? 참는 것도 한두 번이죠.”
“또래끼리 어울리다 보면 안 싸울 수 없겠지만, 매번 그렇게 싸움으로 해결할 거야? 여긴 회사야, 회사. 너 신입 사원 교육 받을 때 뭐 했어? 공장은 위험해서 특히나 조직 위계가 확실해야 하는 곳이야. 너 위에 과장, 부장 다 놔두고 주먹으로 해결하면 그게 편할 것 같아?”
“아니, 왜 저한테만 뭐라 그러세요! 저도 많이 참고 있다구요!”
이 녀석을 잘 타일러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나까지 흥분하면 안 되지. 참는 것이 사장이니라.
“태영아. 참으라고만 한 것이 아니잖아? 너네들 이렇게 싸워 봐야 서로 감정만 나빠지고 도움이 안 되잖아? 서로 대화로 풀라고, 대화.”
“그래서 말로 하겠다고 그러는데, 저 새끼가 계속 태클 걸잖아요.”
“여기 있는 홍철이나 내가 허수야비야? 말로 안 될 것 같으면 과장, 부장, 공장장한테 얘기를 하라고. 그것도 안 되면 나한테 얘기를 하고. 그게 회사라고. 그 정도 애로 사항도 못 들어 줄 것 같아?”
“휴우.”
생산 라인의 꾸준한 가동이 중요한 공장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 직원의 절반 이상을 사회 경험조차 없는 이들로 채운 것은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이다. 내가 보육원 출신을 채용해서 여러 이득을 얻고 있긴 하지만, 회사로서는 상당한 도박을 하는 것이다.
“내가 너네들 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을 때 다른 직원들 다 좋다고 찬성한 줄 알아? 여러 반대 무릅쓰고 너네들 채용했다고. 왜인 줄 알아?”
나라가 돌봐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월급 줘 가면서 홀로서기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격해졌다.
내가 좋은 일 하겠다고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데 말이야. 허구한 날 싸우기만 하니 자괴감이 드는 기분이다.
“너네들 보육원 나와서 어떻게 사는지 아니까! 다른 데 가 봐. 이만한 월급 받을 수 있나. 누가 기숙사를 공짜로 제공해! 그것뿐이냐? 너네들 나중에 집 구할 때 보태라고 적금도 들어 주잖아! 홍철이!”
“네, 사장님.”
“넌 사회생활 좀 해 봤으니까 알 것 아냐?”
“네. 잘 알죠. 그래서 애들 힘들다고 할 때 이런 회사 없다고 달래 주고 하는데, 어휴.”
“홍철이 얘기 들었지? 내가 그만큼 너네들 신경 써 주는데, 니들은 여기서 욕질하면서 쌈박질이나 하고 말이야. 서로 격려하면서 잘 어울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싸울 때 싸우더라도 한 번씩 더 생각을 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다소 감정 섞인 일갈에 애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태영이는 여전히 감정 동요가 심한 모양이다.
태영이가 어느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저희가 거지도 아니고,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데요? 저희가 불쌍한 놈들이에요? 고아면 다 불쌍한 취급 받아야 해요?”
머리가 띵하다. 추운데 흥분해서 그런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내가 저들을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 후두부를 강타한 것 같다. 내가 이따위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