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95)
095 초코슈페너
광주에 도착해 최유리가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는 로펌 앞에 차를 세워 놓았다.
좋은 감정을 가진 이와 만남 앞에서 여전히 새 과제 생각에 빠져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일중독이야, 일중독.
정신 차리자고 자세를 고쳐 앉는데, 차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뭐야? 주차 단속인가?
“오빠!”
“어, 유리! 방가방가.”
“푸하하. 방가방가,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오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곱절로 반사!”
“오빠, 오늘 컨셉은 복고예요?”
오늘 컨셉은 사업에 전념하는 사업가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말만 해요.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무거나?”
“에이 진짜. 이런 남자 제일 짜증 난다고 하는데. 사장님! 마이너스되겠습니다.”
“난 매운 것만 아니면 좋아. 저번에 낙지볶음 너무 매웠어.”
“그럼 해물칼국수 어때요?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무등산 자락인데, 거기 맛집 많아요. 거기로 가요.”
한식 취향은 확고하네. 뭐가 됐든 안 맵고 맛있으면 된다. 특히 군침 돌게 만드는 반찬과 그 위에 깨가 뿌려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오늘 어디 갔다 왔어요? 타지 냄새가 나는데요.”
“우리 최 여사 개코네.”
“역시 오늘 컨셉 복고가 맞네요.”
경산에 갔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이 업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불량이래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데요? 불량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해요? 계약을 맺었으면 계약서에 나온 대로 해야죠.”
“그 말이 맞아. 맞는데, 현실은 또 그렇지 않더라고. 대한전력이 워낙 파워가 세다 보니까, 그 밑에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빌빌기는 거지.”
“경제외적 강제 같은 건가?”
“그런 식이지. 대한전력이랑 계약 맺으면 1년 배부르게 살고, 계약 못 따면 재하청으로 겨우겨우 산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벌벌 떨 수밖에 없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래요? 동양우유가 갑질로 호되게 당했으면 교훈을 얻어야지. 아직 멀었네요.”
“대한전력도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지역본부야 고인물들이 많아서 바뀌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대한전력 많이 좋아졌지. 거마비 바라는 시험관도 표면상으로는 전혀 없고, 계약도 대부분 전자 입찰로 바뀌었으니 비리가 들어갈 틈이 비좁아지긴 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그러면 그 공사업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공사는 해야 하니까 대한전력한테 변압기 바꿔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지. 공사업체가 대한전력이랑 끈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니면 아마 식은 땀 좀 흘렸을 거야.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이 연줄이잖아. 왜 법조계도 그런 일 많잖아?”
“맞아요. 제가 있는 로펌에도 지검장까지 하고 나온 파트너 한 분 있는데, 평소에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내내 놀다가 전화 몇 통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 달에 몇 천만 원씩 받아 가요. 장난 아니죠?”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조업과 법조계 얘기로 말이 꼬리를 물며 한참이 이어졌다.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서로 말 한마디 한마디 분석하면서 머릿속에서 순서도 그릴 필요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밥 다 먹었으면 커피나 마시러 갈까?”
“그럴 줄 알고 제가 예쁜 데 알아 놨죠. 여기서 가까워요. 가면 깜짝 놀랄 거예요.”
서로 대화가 고팠던 모양이다. 바쁜 일상에서 이런 휴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겠지.
“여기서 1분 거리니까 차 놔두고 걸어가요.”
최유리 말로는 광주에서 무등산 가는 길이 크게 두 갈래인데, 하나는 증심사 가는 길로 주로 보리밥 먹으러 갈 때 간다고 한다. 저녁을 먹었던 해물칼국수집이 자리한 이 길은 산장 가는 길인데,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란다.
“예전에 여기에 지산유원지라고 있었거든요. 거기 케이블카가 진짜 대박이에요.”
“어? 설마 인터넷에서 떠돌던 그 사진 말이야? 잠깐만, 검색 좀 해 보고.”
인터넷에서 봤던 충격적인 사진을 급하게 검색해서 유리에게 보여 줬다.
“푸하하. 이거 맞아요. 저 애기 때라 기억은 안 나는데, 우리 집에도 저 사진 있어요. 아마 광주 사람들 집에는 이 사진 하나씩은 다 있을 거예요.”
광주 사람들 정말 무시무시하다. 케이블카라기보다 그냥 케이블에 대충 만든 철구조물이 매달린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안전장치라곤 헐렁한 벨트 하나뿐. 이 무지막지한 것에 젖먹이 애를 안고 탈 생각을 하다니.
“이 유명한 사진이 여기서 있던 일이라니 대단하네. 지금도 이래?”
“에이, 지금은 당연히 천지개벽했죠. 지산유원지는 없어졌는데, 케이블카는 계속 운행하고 있어요. 나중에 봄 되면 타러 가요.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봄이 돼도 계속 보자는 말과 여운이 있는 말이 한데 섞여서 나오니, 어찌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계속 만나 보잔 뜻이야, 뭐야?
“다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요.”
“여기가 유명하다는 커피숍이야? 그냥 좀 크다 뿐이지 평범해 보이는데?”
“에이 진짜. 일단 들어가 봐요.”
평일 늦은 시간인데도 주차된 차가 엄청나다. 주문하는 곳은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를 정도로, 커피숍 내부가 으리으리하다.
4층까지 있다고? 여기 사장도 돈 꽤 만지던 사람인가 보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커피숍이 명소로 꼽힌 이유가 딱 보인다. 광주 시내가 보이는 딱 트인 전망도 죽이지만, 사생활이 완전 보호되는 밀폐형 ㄷ 자형 의자로 옆에서 뭐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든 것이 핵심 같다. 의자가 아니라 아예 벽을 만들어 버렸구나.
“이 자리는 완전 경쟁 치열해요. 오늘은 진짜 운이 좋았네요. 여기 앉아 있어요. 제가 음료 받아 올게요. 오빠, 단 것 좋아하죠?”
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야경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눈이 내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인지 나무와 지붕에 자리 잡은 눈이 달빛을 반사하며 형설지공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시 불빛으로 별을 보기 힘들지만, 그 빛이 만들어 내는 야경은 별이 주는 낭만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돈 벌어서 이런 곳에 좋은 커피숍 하나 차리고 풍악을 읊으면서 살면 딱 좋겠네. 그러려면 일단 폴리머부싱부터. 부산을 빨리 가야 할 텐데 말이야.
“사장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이게 초코슈페너라고 여기서 제일 유명한 건데 마셔 봐요. 핫초코 같은 건데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 잘 마실게.”
달다. 너무 달다. 위장에 들어간 해물과 칼국수 면발이 당을 만나 신명나게 춤을 추는 느낌이다. 난 그냥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가 좋은데.
“어때요? 진짜 맛있죠? 스트레스 받을 때 저녁 아주 맵게 먹고, 여기 와서 이거 마시면 기분이 완전 좋아져요.”
“음, 달달하니 좋네.”
“진짜 오늘 계속 복고 컨셉으로 가실 겁니까, 사장님.”
정말 달다니까! 이거 먹고 담배 피우면 입 냄새 최악일 것 같다.
“오빠.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줘요. 폴리머부싱이 그래서 뭔데요?”
“그 얘기는 군대에서 축구하는 얘기나 똑같은 건데, 괜찮겠어?”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제가 모르는 분야 얘기 듣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밥 먹으면서 얼핏 얘기했는데, 그렇게 흥미롭다니. 오늘은 경청 컨셉으로 잡은 것이야?
“전기가 변압기에 들어가려면 부싱을 통해야 하는데, 전기가 밖으로 빠지면 안 되잖아? 그래서 부싱을 절연체로 감싸는데, 그걸 애자라고 해. 애자는 도기로 만드는데, 도기 알지? 도자기 할 때 도기.”
“그러니까 부싱이 전기 통하는 길인데, 주위에 방음벽처럼 감싸는 거구나?”
“응. 맞아. 역시 똑똑한 사람은 이해력이 남달라. 도기가 싸고 좋은데 잘 깨져. 깨지면 그냥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야. 도기가 깨지면 그냥 돈 날아가는 거지. 변압기 다 만들었는데, 부싱 깨지면 뜯어서 다시 조립해야 하고, 아주 골치가 아퍼.”
“전기가 안 빠지게만 만들면 되니까 굳이 잘 깨지는 도기로 할 필요가 없다 이거네요?”
“유리 학생 오늘 상점 30점.”
“우하하.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소리가 고막을 강하게 강타했다.
덕준이가 그랬다. 남자가 여자를 보는 관점은 나이대별로 달라진다더라. 30대부터 페티시에 빠지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한다고.
변태가 아닌지 괴로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귀가 움찔했던 것일까? 에잇, 잡생각 그만.
“그래서 폴리머수지로 애자를 만들어서 쓰기도 하는데, 가격이 좀 비싸. 민간기업들은 아무리 날고 기는 좋은 기술이 있다고 해도 경제성이 없으면 쳐다보지도 않거든.”
“맞아요. 플라스틱은 안 썩어서 영원히 쓰레기로 남는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그러면? 썩는 플라스틱이 있어?”
“돈이 안 되니까 플라스틱 분해하는 기술이 상용화가 안 되는 거예요. 약도 그러잖아요. 돈 될 만한 것만 약으로 나오지, 돈 안 되는 것은 개발도 안 하잖아요.”
“응용 능력까지 뛰어난데? 우리나라 법조계의 미래가 아주 밝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급 안 당하고 무사히 졸업하게 해 달라고 기도 좀 해 주세요.”
“세실리아 자매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올. 세례명 기억하고 있네요? 이 세심함. 좀 멋진데요?”
이번엔 내가 상점을 받았다.
나쁘게 보이면 조잔함이나 꼬장꼬장으로 보일 수 있다.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라는 이미지 말이다.
그런데 세심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니 저변에 좋은 감정이 깔려 있구나 싶다.
3번째 만남인데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이렇게 만나서 대화만 해도 좋은데, 굳이 관계를 얽매는 구두계약까지 맺어야 할지 말이다.
“그래서요? 그 비싼 폴리머부싱을 싸게 만들어 보겠다는 거예요?”
“응. 그럴 생각이야. 가격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당연히 폴리머부싱을 쓰는 것이 맞거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사업이지. 일단 부산 가서 업체랑 협상해 보려고.”
“오빠 진짜 사업가 같아요. 되게 멋있다. 나도 부산 가고 싶은데, 데리고 가면 안 돼요? 겨울 바다. 뭔가 느낌 있지 않아요?”
“같이 갈래? 골리앗 크레인이 컨테이너 옮기고 있고, 대형 컨테이너선 들어오는 겨울 바다 보여 줄게.”
“그렇게라도 바다 보고 싶네요. 당분간 보러 갈 시간도 없겠지만요.”
이제 로스쿨 1년 과정을 마친 유리의 영롱한 눈에 2년차, 3년차 고생길이 보인다. 덕준이에게 늘 하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고생 끝에 낙이 있으리.
“야경 바라보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져.”
“방학이 방학도 아니에요. 인턴 해야지, 쉬는 날엔 모여서 스터디며 세미나며, 하루 종일 시달려요. 앞으로 3년을 더 이 고생을 해야 해요.”
“2년이 아니고?”
“변호사 시험 합격해도 6개월 연수 받아야 해요.”
배턴이 넘어가자, 로스쿨 과정이 얼마나 사람을 죽이는지 술술 흘러나온다. 이제는 내가 경청할 때로군.
“선배들이나 동기들 보면 엉덩이 펑퍼짐한 사람들이 학점이 높아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거죠. 엉덩이가 무거워야 공부 잘한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에요.”
“너는, 으음. 학점 잘 나올 것 같은데?”
“뭐예요, 진짜. 제가 얼마나 애플힙인데요. 푸하하.”
궁금하다.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말이다.
못된 연상 작용을 애써 지우고 있는데, 유리가 당황한 듯 말을 토해 낸다.
“민망하게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무슨 생각 하길래!”
“아니, 그냥 둔부 구조와 학점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저 진짜 유급 겨우 면할 정도였어요. 전 경제 전공했거든요. 안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출발이 늦은데, 들어가자마자 들들 볶으니까 진짜 죽겠어요.”
유급이 간당간당할 학점일 정도로 엉덩이가 애플이란 소리인가. 눈 내린 흔적이 가득한 야경을 바라봐서 그런지 묘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취했나.
“아는 분이 나한테 한 얘기가 있는데, 너한테도 적용될 것 같아. 지름길을 알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 그럴 때는 큰길로 가.”
“큰길이 안 보일 수 있잖아요?”
“그럴 땐 그냥 직진하는 거야. 직진도 쉽지 않지. 그럴 때는 잠시 멈춰 서 나아갈 길을 생각해 봐. 그러면 길이 보일 거야. 나도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어.”
“쉼 없이 정진하라. 이런 거네요?”
“이해력 아주 굿이야. 유리 학생 또 상점 줘야겠네.”
므흣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유리를 바라보니 십이지장에서부터 박력이 끓어오른다. 저건 나를 갈망하는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