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39
138
무의식적으로 깨우친 처음에 등골을 타고 솜털이 바짝 섰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고, 저도 모르게 놀란 것처럼 고개가 반쯤 베개에서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렸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동요해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
잠이 확 달아난 세라가 기민한 눈으로 에녹을 살폈다.
여태 저 입에서 자신을 부르는 말이라곤 야, 너, 노예야. 로 통일되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제 와 이름으로 부르나 싶어서.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데.”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봐 주는 게 좋은지, 에녹이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세라에게 더 바짝 붙었다.
“조금 더 자자.”
그녀의 베개로 머리를 옮겨 간 에녹이 스르륵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정말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속눈썹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는 벌린 채다.
에녹을 향한 세라의 의구심이 한층 짙어졌다.
얘가 웬일로 건전하게 ‘잠만’ 자지?
평소였으면 다시 자더라도 벌써 세라의 허벅지 사이에 제 손을 끼워 넣는다거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는 등 귀찮게 치댔을 텐데……. 아니, 그것보다.
“또 어디로 들어온 거야…….”
툭, 편하게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은 세라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순순히 물러나더라니, 그녀가 방심하고 잠든 사이에 도둑고양이처럼 제 옆을 파고들 줄은 몰랐다.
심지어 기분도 제법 좋아 보인다.
도대체 왜지.
어제 마지막에 그런 꼴로 쫓겨났으니 다음번에 만나면 뒤끝이 장난 없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 일로 마음이 상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이 만남이 달갑지 않은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나, 세라뿐이었다.
“내가 한 번만 더 오면-.”
음산하게 목소리를 깐 그녀의 손이 소리 없이 베개 밑으로 미끄러졌다.
그 밑에서 폭신한 솜뭉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시퍼런 낫이 나타났다.
“잘라 버린댔지!”
번뜩, 눈을 빛낸 세라가 감히 제 영토에 발을 들인 불청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
에녹은 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물끄러미.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이 정도 눈빛을 보내면 한 번쯤은 신경이 쓰여서라도 돌아볼 만한데, 야속한 임은 그에게 관심 한 자락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쉬울지언정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건, 바꿔 말해 지독할 정도로 이쪽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녹 또한 딱히 세라가 자신을 알아봐 주고, 말을 걸어 주길 바라서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 관한 깊은 고민이 있을 뿐.
“쟤 좀 이상해.”
한참을 고뇌하던 에녹이 비로소 첫마디를 떼었다.
들으라는 듯한 말투에 옆에 있던 마커스가 마지못해 그를 상대해 주었다.
“……네가 더 이상해.”
“요즘 나한테 너무 차가워졌어.”
헛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으나, 에녹은 그 속에 숨은 의미일랑 전혀 알 바 아니라는 듯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마커스는 침착하게 에녹이 부정하고 있는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세라는 원래 너한테 차가웠어.”
“알아.”
아는데도 새삼스럽게 더 차가워진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을, 에녹 혼자서만 몰랐다.
“이젠 노예도 아니니까 굳이 널 참아 줄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나 보지. 근데-.”
귀찮다는 듯이 대꾸해 주던 마커스가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말끝을 끌었다.
“그런 생각은 회의 끝나고 혼자 하면 안 돼?”
그의 시선이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을 눈짓했다.
회의 중에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며 누군가는 핀잔을 줄줄 알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에녹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몹시 흥미진진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시작된 길드 회의는 기타 자질구레한 보고가 전부 끝나고, 드디어 마지막 안건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 마지막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오늘은 원래라면 참석할 리 없던 인원이 한 명 더 회의에 참석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가시 공략대에 들어오고 싶다고?”
“응.”
정식 길드원이 되자마자 돌연 가시 공략대에 신청을 해 버린 세라였다.
“콕 집어 중앙 가시 공략대를?”
“응.”
심지어 가장 위험한 중앙 가시 공략대에.
아이고 세라야.
마커스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세라를 데리고 나가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자살행위인지 일장 연설이라도 하고 싶었다.
거기가 어떤 곳인데.
온 세상을 꿰뚫은 검은 가시 중에 가장 커다란 가시이자, 대륙을 좀먹고 있는 원흉이자, 시그너스 길드가 설립된 이유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가시 하나 무너뜨려 보겠다고 목숨을 바쳤나.
그 찬란한 희생 덕에 중앙 가시는 이제 붕괴 직전 단계에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심심찮게 사상자가 나올 만큼 위험하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 곳에 자원해서 들어가겠다니. 마커스는 순간 세라가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단순히 중앙 가시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심지어 그 제안을 받아 줘야 하는 상대가 기드온이었다.
지독한 면역자 혐오를 앓고 있는 그 기드온 말이다.
“……지금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세라의 굳건한 의지를 확인한 기드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되물었다.
비꼬는 기색이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진심으로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뉘앙스에서는 이미 거절의 의사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기드온. 길드원이라면 누구나 공략대에 자원할 수 있잖아.”
덮어놓고 안 된다고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누군가 길드 규율을 읊으며 거절에 대한 명분을 흐려 놓았다. 흥미롭게 사태를 관망하던 주근깨 소녀, 베니였다.
“물론, 규율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기드온은 겸허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중앙 가시는 일정 기준을 통과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안타깝게도 베니의 지원 사격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규율에서 중앙 가지 공략대만큼은 예외라는 사실을 짚어 준 기드온이 말없이 베니를 쳐다보았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는 눈짓이었다.
“그건, 그렇지.”
급조한 조건은 아니었는지 베니가 찔끔한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기준이 뭔데?”
세라는 서슴없이 그 기준에 관해 물었다. 언제부턴가 말투는 자연스럽게 반말이었다. 예전이야 노예니까 말이라도 높여 준 거지. 정식 길드원이 된 지금은 꿀릴 것 없었다. 어차피 존댓말로 공손하게 이야기했어도 세라를 싫어했을 것이기에 기드온 또한 그녀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형 가시 토벌.”
“그거라면 나도 경험이 있어.”
다행히, 기드온이 제시하는 기준은 그렇게까지 낯선 내용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알타이르 길드 건으로 들어갔던 곳이 대형 가시였잖아.”
세라는 자신만만하게 제게도 자격이 있노라 단언했다.
물론 핵이야 에녹이 부쉈지만, 어차피 대형 가시의 핵은 성검으로만 부술 수 있다고 했으니 핵을 찾아낼 때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날의 일등 공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라였다.
“딱 한 번뿐이었지. 그것도 스노우와 함께.”
그 결과가 그녀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니라는 걸 엄하게 지적한 기드온이 그 남자와 함께라면 누구라도 대형 가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빈정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세라가 그 자리에 운 좋게 있었을 뿐, 대부분은 스노우가 해결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중앙 가시의 내부는 현재 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언제, 누가,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기에, 최소한 신뢰할 수 있는 자들로 부대를 꾸리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런데?”
“그런 곳에 너처럼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면역자를 어떻게 믿고 데려가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새삼스레 줄줄 늘어놓은 기드온이 대놓고 깔보는 식으로 세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와, 저건 좀.”
함께 듣는 게 미안할 정도로 적나라한 폄하 발언에 다른 이들이 서로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기드온.”
불안하게 얼어붙은 공기를 가로지른 건 에녹의 경고였다.
지엄한 길드장의 얼굴로 돌아온 그가 무례한 발언을 일삼는 기드온을 향해 한마디 해 주려다가.
“대장은 빠져요.”
“그래. 편안히 대화 나눠.”
세라의 한마디에 곧장 표정을 풀고 순순히 물러났다.
“……와.”
“와, 저것도 좀.”
길드원들이 카리스마 따윈 개나 줘 버린 에녹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신이 날 믿지 못하는 건 내가 면역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그사이 에녹을 조용히 시킨 세라가 따박따박 기드온의 의견에 반론을 제시했다.
“그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면역자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명확하게 알면 믿기 싫어도 믿고 싶어지지 않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줘.”
그게 의외로 기드온의 흥미를 끌었는지 원하는 요구를 주장할 때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모든 불신은 무지에서부터 비롯된다. 기드온이 여전히 세라를 불신하는 이유는 그녀가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면역자와 같은 공기를 맡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는 세라가 나타나면 소리 소문 없이 자리를 뜨기 급급했으니까.
“난 이제 정식 길드원이고, 중앙 공략대에 자원할 수 있는 권리가 충분히 있어. 적어도 남들과 똑같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줘야지 않겠어?”
이 구제 불능 차별주의자야.
마지막 말을 가까스로 삼킨 세라가 도무지 기회를 주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것마저 싫다고 거절하면, 공정해야 할 책임자가 사감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워 문제를 공론화시킬 작정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군.”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기드온은 단번에 그녀의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엥?”
“문제 있나?”
“아니, 생각보다 너무 순순해서-.”
수상할 정도로 쉬운 설득에 세라가 의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기드온 또한 세라를 희한하다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 봄까지 내가 지정한 공략대에 모조리 참가해라. 네가 중앙에 들어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후에 검토해 보도록 하지.”
에누리 없이 딱 열 번만 시험해 보겠다는 말은 생각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열 번? 누군가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며 혀를 내둘렀지만, 기드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좋아.”
세라는 가시에 들어가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합의에 이르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된 공기가 마침내 유순하게 풀어졌다.
“그럼, 공정한 판단을 위해서 그 자리에 내가-.”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녹이 은근슬쩍 그 시험에 끼려 말문을 열었다.
“단, 에녹 소서가 동행하는 모든 토벌은 무효로 처리하겠다.”
그러자 기드온이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득달같이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그는 에녹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지는 것을 흐뭇하게 감상하며 마저 빈정거렸다.
“여자에 눈이 먼 길드장이 사사로이 도와줄 수도 있잖나.”
“…….”
“이의 있나?”
“아니.”
대답은 세라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야말로 에녹과 함께 들어가면 곤란한 사람이다. 저놈과 같이 있으면 흑마법에 대해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몰래 목소리도 쓰지 못하니까.
“…….”
자기만 빼고 쿵짝을 맞춰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에녹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큼, 큼!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그때, 마커스가 눈치껏 회의를 파했다.
원래부터 에녹의 눈치 따윈 보지 않았던 기드온은 산뜻하게 일어나 집을 나가 버렸고, 다른 길드원들도 저기압이 되어 버린 에녹의 타깃이 될세라 얼른 내뺐다.
“그럼 저도 이만-.”
세라도 그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집을 떠나려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세라.”
흠칫, 유난히 귀에 틀어박히는 목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던 몸이 어정쩡하게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너 팔이 왜 이래?”
세라의 어깨를 붙잡은 에녹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빙글 돌아가는 시야에 어느새 가까워진 화려한 미남의 얼굴이 가득 차 버렸다. 쿵, 그녀의 심장이 또 까닭 없이 추락했다.
“다쳤어?”
주르륵, 팔을 타고 미끄러진 손길이 조심스럽게 팔꿈치 부근에서 멈췄다.
세라의 팔을 들어 올린 에녹이 범인의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 듯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팔을 약하게 흔들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세라는 불에 덴 사람처럼 얼른 시선을 내렸다.
엉성하게 맨 붕대 사이로 희미하게 피가 비쳤다. 하필 또 붉은색이었다.
“……아까 당신이 피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침착함을 가장한 세라가 쌀쌀맞게 에녹의 손길을 떨쳐 냈다.
그녀의 상처는 아침에 기어코 제 침대에 기어들어 온 에녹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다 제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제법 길게 그어졌지만 상처가 깊지는 않아 세라도 옷을 갈아입을 때에나 발견해 급한 대로 아무거나 칭칭 감고 왔다.
“그럼 내 책임이네?”
탓하는 말에도 에녹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양 반색했다.
“내가 치료해 줄게.”
살갑게 속삭인 에녹이 세라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슬쩍 끌어당겼다.
손 전체를 잡지 않고 약지와 소지만 쥐는, 세라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 바로 그 수법이었다.
혹시 계산했나 싶을 정도로 공교로운 타이밍과 수법이었으나, 세라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한 치의 흑심도 없이 순수하기만 했다.
그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영웅이, 응접실에서도 보이는 2층의 제 방문을 가리키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 저기서 잠깐만 쉬었다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