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44
143
추궁하는 게 분명한 말투에 마커스가 대놓고 근심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없이 문제의 꽃다발을 에녹의 품에 팍, 하고 안겨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그것으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간다.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에녹을 등진 마커스가 세라를 향해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방금 전보다 원한이 깊어진 눈동자에는 저 은혜도 모르는 놈한테 반드시 본때를 보여 달라는 짙은 열망이 서려 있었다.
“……아. 네.”
세라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하며 떠나갔다.
에녹은 마커스가 떠나든지 말든지 제 품으로 돌아온 꽃다발을 불가해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세라는 그 멍청한 꼴을 무시하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문짝만 한 몸이 입구를 떡 틀어막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어야만 했다.
“좀 비켜 줄래?”
“꽃이 마음에 안 들었어?”
서로를 향한 물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둘 다 남의 말을 순순히 듣는 성격은 아니어서,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빼낸 에녹이 세라의 귀에 깊게 꽂아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청보랏빛의 꽃이 탐스러운 곱슬머리와 소름 끼치도록 잘 어울렸다.
사르륵, 흘러내린 머리칼까지 예쁘게 뒤로 넘겨 정리해 준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진지하게 읊조렸다.
아닌데, 잘 어울리는데.
“…….”
세라는 이쯤에서 마커스가 들고 다니던 그 꽃다발이 제 몫임을 깨달았다.
뒤늦게 물건을 살피는 시선에 처음부터 한 다발이 되기 위해 조화롭게 정리된 꽃들과 리본,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따위가 들어왔다.
짙은 색의 꽃잎이 제법 눈에 익었다. 이름도 모르는 꽃이 분명한데,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 기억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신경 쓰이는 기시감을 뒤로 미뤄 둔 세라는 곧 에녹이 시들어 쓰레기가 될 물건을 제게 건네는 이유를 알았다. 얼굴만 마주치면 쫓아내기 바쁘니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 보고자 이러는 거다. 상당히 일차원적이면서 뻔한 수작이지만 에녹에게는 뻔하지 않은 일이라는 게 아이러니였다.
그는 꽃을 받는 사람이지, 그것을 바치며 매달리는 역할이 아니었다. 언제나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며 모두를 내려다보는 사람이지.
그에게 꽃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의 애인들이 또 얼마나 난리를 부릴지 눈에 훤했다. 앞으로 세라가 감당할 질투 어린 시선들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골치였지만, 모순적이게도 마음속 한구석에 꽁꽁 묶여 있던 매듭이 어느 정도 풀어진 듯한 양가감정이 들었다.
“…….”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밖에서 기다렸어.”
그 복잡한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에녹이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해 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꼴이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뭐 대단한 인내심이라도 발휘한 양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 빈집털이 안 해 줘서 고오맙다.”
황송하다며 비꼬아 준 세라가 에녹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비워 놓은 집은 온통 썰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둘러 난방 기기를 켜고,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은 세라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녹이 은근슬쩍 가져다 둔 의자였다.
쪼르르 따라온 에녹이 당연하다는 듯이 세라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가느다란 허벅지 위에 제 턱을 올려 둔 그가 말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아직도 화났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눈이 평생 그 각도만 연구해 온 사람처럼 탁월했다.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 한층 강해졌다.
“왜 화났는지 가르쳐 주면 안 돼?”
그렇게 물어보는 에녹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난번의 강경한 대응이 도움이 된 걸까. 하루 만에 다시 만난 에녹은 확실히 순순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개로 따지자면 그녀의 앞에 배를 훤히 까고 누워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격이었다.
“응?”
세라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올려 둔 에녹이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며 간청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은근슬쩍 신발을 벗기고 드러난 발을 마사지하듯 조몰락거렸다.
“…….”
세라는 그 손길을 떨쳐 내지 않았다. 그건 에스텔라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으니 에녹은 더욱 성심성의껏 발을 주물러 주었다. 에스텔라에서 노예 행세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크흠.”
그즈음 세라의 마음은 거의 말랑해졌다.
귓가에 꽂힌 꽃향기가 싱그러웠고, 더불어 마커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아무리 미워도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박탈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걸 보면 그 말이 제법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녀의 회로가 영구히 고쳐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세라는 결국 에녹의 치유력에 빌붙어 살아야 했다. 언제까지고 냉전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언젠가 마음을 풀어야 한다면 바로 지금, 못 이기는 척 풀어 주는 게 가장 그림이 예쁠 것 같았다.
앞으로 쓸데없이 질질 흘리고 다니지 말라고 하면 저도 알아듣겠지.
게다가 지금이 어디 에녹과 무의미한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인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정체불명의 영혼이 안타레스교의 주도 아래 무고한 시그너스 길드원의 육체를 빼앗아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세라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안타레스교라도 그런 놈을 하나만 이 안에 들이밀지는 않았을 테니, 일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막말로 언제, 누가, 얼마나 몸을 빼앗겼을지 모르니 최악의 경우 모두를 의심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믿을 놈은 에녹뿐이다. 조금 더 쳐 줘서 마커스 정도. 이 넓은 길드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고작 그 둘이었다.
한마디로 비상사태라는 말이다.
“무릎, 다쳤네.”
그때, 에녹이 세라의 무릎에 새겨진 생채기를 발견했다. 아까 오전에 가시에서 생긴 상처였다.
“설마 가시에서 다친 거야? 여태 이걸 가만히 뒀어?”
별거 아닌 상처였는데, 에녹은 벌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중상이라도 마주한 듯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길드에 돌아오자마자 치료를 했어야지. 독기라도 스며들었다간 다리를 잘라야 할 수도 있어.”
상처가 아프지 않게 살포시 입술을 겹친 그가 여태 상처를 방치한 그녀를 엄하게 나무랐다. 본인이 굽히고 들어가는 상황인데도, 이것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는 태도였다. 쯧, 낮게 혀를 찬 그가 세라의 상처를 살살 어루만지며 뇌까렸다.
“나한테 치료받아. 이건 길드장 명령이야.”
딱 떨어지는 단단한 어투가 제법 길드장 태가 났다.
단호하게 치료를 하겠다 선언하는 눈빛에는 지난번 집에서 걸어오던 개수작의 낌새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세라는 조금 에녹을 다시 봤다.
정말로 필요한 때가 되니 장난 따윈 집어치운 표정이다.
그동안 사적으로 한심한 모습을 많이 봐서 그렇지. 이 녀석도 공적으로는 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였다.
이제 회로도 더 이상 쓰기 힘들고, 지금은 비상사태이니 길드장의 말에 따르는 게 이치에 맞았다.
“……그럴게.”
“……!”
순순한 허락이 의외로웠는지 에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었다.
“뭐 해? 치료해 줘. 얼른.”
오히려 세라가 그를 재촉했다.
“하는 김에 아끼지 말고 팍팍 넣어 줘.”
이왕 치료하는 김에 회로까지 전부 고쳐졌으면 좋겠어서, 세라는 에녹에게 치유력을 아끼지 말라 당부했다.
“……그렇게까지?”
다시 멍청한 표정이 된 에녹이 삐걱대며 세라의 치마를 조금 걷어 올렸다. 필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처 부위의 시야를 확보하려는 거겠지.
곧 청량한 기운이 넘실대며 세라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하아, 만족스러운 탄성을 내쉰 세라가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다. 상처가 전부 다 나으면, 이걸 계기로 화가 풀렸다고 말해 주고, 오스만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문제는, 진실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거다.
대뜸 안타레스가 네 길드원들의 몸속에 지옥 불에서 구르던 죄인을 집어넣었다고 말하면, 그게 바로 너냐면서 제 목을 뎅강 잘라 버릴 게 뻔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비밀을 지키면서, 오스만의 상태와 길드가 맞이한 위기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전달이 가능한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장. 내가 긴히 할 말이-.”
조심스럽게 서두를 꺼낸 세라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응? 무슨 말?”
상처와 아무 관련 없는 곳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들친 에녹이 앓는 숨을 내쉬며 보드라운 살결을 한껏 음미하고 있었다. 언제 단추를 풀었는지, 셔츠가 반도 넘게 열려 있어 그 사이로 세라의 무릎이 파고들어 탄탄한 가슴과 맞닿았다.
“……지금 뭐 해?”
아무리 봐도 불필요한 동작이었으므로, 미간을 좁힌 세라가 사연을 물었다.
에녹의 턱을 타고 미끄러진 시선이 아까부터 자꾸만 이물감이 와 닿는 발목을 향해 떨어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바지가 들릴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앞섶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에녹이 그녀의 몸에 치유력 말고 뭘 넣고 싶어 하는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쯤에서 봐줘야지. 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이…… 음란한 새끼가!”
그리하여 용서를 무른 세라가 가차 없이 에녹의 등짝을 내리갈겼다.
짝! 짝! 탄탄한 등짝이 어찌나 때리기가 좋던지, 세라의 손바닥이 아주 쩍쩍 들러붙었다. 난데없이 쏟아지는 매서운 손길에, 에녹이 가증스럽게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항의했다.
“아! 갑자기 왜 이래?”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라는 처음보다 더 강도 높은 손길로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너야말로 왜 이래? 대체 뭐가 문제야? 하루라도 그 아랫도리를 안 휘두르면 살 수가 없니? 어?”
짝! 짝! 짝! 짝!
손바닥이 다 저릿할 정도로 세게 내려친 세라가 더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에녹의 고간을 눈짓했다. 그녀를 따라 제 아랫도리 상황을 확인한 에녹이 ‘어? 이게 왜 이러지?’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해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속을 정도로 억울한 눈을 하고서는 결백을 주장했다.
“이거, 이거 그런 거 아니야. 생리적인 반응이고 난 정말로 치료를…….”
“아래를 그따위로 세워 놓고 퍽이나 치료를 하겠어요. 네가. 어? 퍽이나!”
세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참을 더 그를 두들겨 팼다.
그리고 정말 징그럽게도, 그녀가 더 강하게 때릴수록 에녹의 바지춤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더러워…….”
완전히 질린 세라가 그를 경멸했다.
“아, 그런 거 아닌데. 세라. 이거 정말 내가 원해서 세우는 게 아니라-.”
제 몸의 반응에 에녹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열심히 그런 게 아니라며 변명을 해 왔다.
그는 자신이 그 정도로 변태 새끼는 아니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겠으나, 정말 원해서 세운 게 아니라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육체가 정신을 뛰어넘어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니까.
“넌 글렀어.”
고개를 내저은 세라가 무참하게 그의 인간성에 대한 종말을 선언했다.
얘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에는 글렀다. 이미 몸부터가 짐승과 다름없는데 어떻게 고쳐 쓰겠나. 하지만 세라는 여태까지처럼 그를 무작정 쫓아내지 않았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에는 글렀어도 더 나은 길드장이 될 수는 있겠지.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에, 병원 가서, 오스만이나, 살펴봐라!”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에녹을 내려친 세라가 그를 문밖으로 쫓아냈다.
“아! 아! 오스만? 오스만을 왜……?”
이번에는 그도 조금 아팠는지 에녹이 맞은 곳을 쓸어내리며 이유를 물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낯선 이름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다.
응. 지옥에서 올라온 영혼이 개짓거리하다 걸려서 병원에 눕혀 놨어. 라는 비현실적인 설명을 삼킨 세라가 네가 알아서 하라며 무작정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잔말 말고 가기나 해! 지금 당장!”
그래도 애는 똘똘하니까 보면 뭐라도 이상한 점을 찾아내겠지.
“바로 돌아오면, 평생 개무시 당할 줄 알아!”
단단히 경고한 세라가 에녹의 면전에다 대고 쾅! 문을 닫아 버렸다.
이번에 또 쳐들어오면 그땐 진짜 끝장을 볼 작정이었는데, 다행히 에녹은 세라의 집에 다시 머리를 들이밀지 않았다.
***
에녹의 장점이 있다면 바로 눈치가 더럽게 빠르다는 거였다.
그는 세라가 세라인 걸 모르던 때에도 그녀가 하는 행동과는 달리 실제로는 남에게 쥐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세라가 뜬금없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남자의 이름을 들먹여 병문안을 가 보라고 했을 땐, 뭔가 그만한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신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중인 것 같았으니, 뭐가 됐든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일이라 여겼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그리하여 곧장 병원으로 향한 에녹은 어렵지 않게 오스만의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졸고 있는 당직 의사를 흔들어 깨운 그는 갑작스러운 길드장의 방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의사로부터 오스만의 입원 경위부터 꼬치꼬치 캐묻는 중이었다.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휴가에서 다녀온 후로 사람이 영 이상해져서, 다들 걱정하며 지켜보던 중이었는데 마침 길가에 쓰러져 있던 것을 세라와 마커스가 이리로 옮겨 왔습니다.”
졸음이 완전히 달아난 표정의 의사가 오스만의 차트를 열심히 읽어 내렸다.
“사람이 이상해졌다?”
“네. 그게-. 오스만, 이 사람이 제 아이들이라면 껌뻑 죽었는데, 휴가에서 다녀온 뒤부터는 애들도 돌보지 않고 방치를 했답니다.”
그건 사연을 모르고 들어도 어딘가 이상했다.
아이가 귀한 시대였기에, 에녹도 제 길드에 아이들이 몇인지 누가 그들을 키우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중 오스만은 극성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던 자다.
무엇보다 이 냄새.
코를 찌르는 불쾌하고 낯선 냄새가 못내 신경 쓰였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