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family's escort warrior RAW novel - Chapter 191
191. 우리 당가는 노형께서 말씀하신 그런 곳이 아닙니다.2016.08.31.
“커험…….”
“큼큼.”
노천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만천화우는 당가를 대표하는 최고의 암기술.
그것을 펼쳤다면 당가 사람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만천화우를 썼는데도 죽였다?”
이제껏 부드럽게 높임말을 쓰던 가주의 말투가 달라졌다.
“어디 죽인 것뿐이겠소?”
노천은 돌변한 가주의 기도를 지켜보며 태연히 말을 받았다.
“가주, 난 강호를 등진 사람이오. 명호가 당가를 알리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원래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게요. 분하고 원통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여겼을 거요. 강호는 그런 곳이니까. 허나!”
노천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가 무인 한 명을 상대로 팽가 무인 수십 명이 달려든 건 참을 수 없더이다. 거기에다 죽어가는 명호의 허벅지에 구멍을 내고 복부에 장창을 수십 번이나 찔러 댔소! 인면수심도 어느 정도껏이지, 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냔 말이오!”
좌중은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노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소리쳤다.
“당가가 고작 이 정도였소이까? 만천화우를 분명히 보고도 수십 명이 달려들어 죽이고 시체까지 유린할 정도로……. 한때 당가란 이름만으로도 오대세가가 한 발 물러서게 만들었던 일들이 그냥 옛날 일이 되어 버린 게요? 아니면 이 몸이 잘못 알았던 게요?”
가주를 자극하는 노천의 말은 분명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뭔가를 말하려는 동작도 없었다.
당옥 안은 완전히 소리를 차단한 듯, 미약한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빠드득.
그저 침묵 속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으드득. 드드득.
뒤이어 뼈가 갈리는 소리, 바람을 입에 구겨 넣은 듯한 신음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 침묵 속에 가주 당의군이 단상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천천히 품에서 기다란 담뱃대 하나를 꺼냈다.
스으읍.
연초의 짙은 향이 당옥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당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스읍 쓰으읍.
그렇게 몇 번 장죽을 빨아대던 가주가 입을 열었다.
“독선, 다시 한 번 묻겠으니 진실만을 대답하시오.”
갑자기 동생의 말투가 하오체로 변하자 노천은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명호가 당가임을 알렸음에도 죽였다. 맞소?”
“……그렇소이다.”
“거기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죽였다. 맞소?”
“그렇소이다.”
“또 거기에다 무인 하나를 떼로 몰아 죽였다. 맞소?”
“그렇소이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아마…… 죽은 뒤에까지 그 몸에 난자를 했을 터인데…… 맞소?”
“그렇소이다.”
빠각.
노천의 대답과 동시에 당의군이 장죽을 부러뜨리고는 싸늘히 입을 열었다.
“나가시오, 독선.”
“……알겠소이다, 가주.”
그는 읍을 해 보이며 곧장 뒤돌아섰다.
그가 밖을 나가는 동안에도 당의군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본가의 전주, 각주, 당주들은 모두 나가도록.”
“가, 가주?”
“저희들도 이번 안건에 대해…….”
“주둥이 놀리지 말고…… 나가시오.”
당의군의 목소리가 듣기 힘들 만큼 작게, 그리고 낮아졌다.
사위는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퍼져 나갔고, 노천은 조마조마한 가운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화났구나. 가주가 진짜로 화났어!’
의도했던 바이긴 하지만 너무 심하게 터진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화가 나면 언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자 당문의 가주인 당의군은 화가 날수록 성정이 차분해지고, 어조가 낮아졌다.
지금은 거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이는 당가를 나서기 전 수십 년을 함께 보았던 노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우르르르르! 와르르르르!
사색이 된 당가의 실세들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아무래도 가주의 성정은 노천이 집을 비운 십수 년간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지르긴 질렀는데…… 괜찮으려나?’
언뜻, 전각 안의 그림자 속에서 선명히 피어오르는 녹광(綠光)을 보며 노천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모르는 걸 적당히 둘러댄 게 조금 무서웠다.
당문의 가주가 진짜로 화를 내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쾅!
노천이 나가는 순간, 부서질 듯 문이 닫혔다. 아마도 장로 중 한 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풀이를 한 것이리라.
‘생각해보니 장로들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지…….’
노천은 서늘한 이마를 훔치며 발을 재게 놀렸다.
*
노천은 당옥 옆 내실 중앙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당옥에서 그간 겪었던 마음의 응어리를 모두 털어냈으니 한결 후련할 법도 한데, 오히려 마음이 먹먹하고 쓰라렸다.
“염병, 오지게 운 없는 놈.”
노천의 눈가에 명호의 넉살 좋은 웃음이 그려졌다.
자신만 보면 헤헤거리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에잉.”
노천은 명호의 생각에 눈가가 축축해지자 급히 손으로 눈을 문지르고 고개를 돌렸다.
“독선 형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허…….’
내전 문을 열고 익숙한 노인과 이름 모를 사내 두 명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뒤의 놈들은 뭐냐?”
노천이 당의명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형님께 소개해드리러 왔습니다. 제법 싹수가 보이는 놈들이라서.”
중사당 당주 당의명은 뒤돌아 소리쳤다.
“인사드리거라! 본가의 이름을 크게 날린 어른이시다!”
터억.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명이 다가와 읍을 해 보였다.
“중사당 독조문 담당인 당승호(唐昇湖)라고 합니다.”
노천이 사내를 빤히 쳐다보다 그의 두 손에 눈이 머물렀다.
배가 산처럼 튀어나온 것도 특이했지만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손은 왜 이래?”
“독사장(毒沙掌)을 극성까지 익히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당의명은 제자의 성취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강호의 무공 중에는 녹두나 모래로 두 손을 단단하게 만드는 철사장(鐵沙掌)이란 것이 있다.
당가의 독사장도 이와 비슷한 수련을 하는데, 차이점이라면 철사장과는 달리 독수(毒水)에 손을 넣고 수련하기에 손에 독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손으로 공격을 하게 되면 상대는 스치기만 해도 중독이 되는 것이다.
“손은 뭐 그렇다 치고…… 배는?”
노천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그게…… 너무 빨리 익히다 보니 간에 손상이 좀 왔나 봅니다. 험험.”
당의명의 말에 노천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간이 손상을 받으면 복강 안에 복수가 가득 차 배가 부어오를 수 있다.
죽을 날 받아놨다는 위험한 선고인데도 당승호는 자랑스럽다는 듯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손은 눈보다 빠른 법이지요.”
‘숨이나 좀 쌕쌕거리지 말고 말하거라.’
노천은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너무 뿌듯해하는 그들에게 초를 치지는 않았다.
풀썩.
그때 그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샌님 같은 녀석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고 바르르 몸을 떨어댔다.
“이놈은 뭐냐?”
노천이 물었다.
“별것 아닙니다. 가만 두면 알아서 일어납니다.”
사실이었다.
잠시 몸을 떨던 사내가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당고호(唐固湖)라고 합니다. 중사당의 비방 기록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노천이 영 못 미더운 얼굴로 바라보자 당의명이 대답했다.
“중사당에 새로운 독초가 들어오면 이 녀석이 직접 먹어봅니다. 독에 내성이 있는 본가의 사람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지요. 엊그제 남만에서 풍뎅이 하나를 들여왔었는데 그놈이 아직 소화가 덜 됐나 봅니다.”
‘허허허.’
노천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거의 죽지 않으면 좋고, 죽으면 할 수 없고의 수준이지 않은가.
그 역시 나름 무식한 방법의 효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무식하게 시행하지 않는다.
새삼 자신이 왜 당가를 떠난 이후 연통을 넣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는 상황이다.
“그리고 형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노천에게 당의명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주먹만 한 풀뿌리의 약초 하나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건 신영초(神英草)라는 겁니다. 사천의 산이란 산은 다 뒤져 최근에 발견한 귀한 독초이지요. 이 작은 뿌리 한 가닥을 잘라내 물에 녹이면 능히 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독물이 만들어집니다.”
멍하니 바라보는 노천을 향해 그는 비릿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팽가의 놈들이 일을 벌인 것 같은데…… 허락하시면 제가 사람을 보내 우물에 이걸 풀겠습니다. 절대 눈치 못 채리라 보증하지요. 이 뿌리 하나로 팽가 놈을 한 번에 모두 끝내버리겠습니다.”
“허…….”
노천은 혀를 찼다.
그냥 듣기엔 화끈하고 시원해 보이지만 이는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우물에 독을 타다 당문의 소행임이 밝혀지면?
하루아침에 무림 공적이 되어도 할 말 없는 악독한 짓 아닌가.
“독선 형님.”
머리를 부여잡던 그에게 내원 문가로 노인 몇 명이 서 있었다.
“가주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일단 가세.”
당의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천의 소매를 슬쩍 붙잡으며 말했다.
“형님,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럼 제가 은밀히 움직여 팽가의 우물에…….”
“뭐 해, 안 가고!”
노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듯 일어섰다.
*
당옥에는 이미 당가 실세들이 모두 도착해 기립해 있었다.
노천이 그런 시선을 받으며 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가주가 입을 열었다.
“이번 안건에 대해 상의한 결과를 말하겠다.”
그는 단상 위에서 진녹색의 당지(唐紙-색이 누런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기 하나 없이 또박또박 차근히 말이 이어졌다.
“본문의 식솔인 당명호가 죽었다곤 하나, 팽가, 관과 맹이 개입된 이 사건에 대해 본가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만천화우를 썼다곤 하나 이 역시 그들이 당가란 사실을 알았는지, 그리고 정말로 옳은 일을 하는 중이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 대해 당가는 개입할 명분이 없다.”
“……?”
가주의 말을 듣던 노천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당옥을 나올 때만 해도 분명 가주는 명호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전혀 딴판이 아닌가.
“설사 당명호가 자신이 당문의 식솔임을 알렸다 해도, 본가가 맹과 관에 피해를 입힌 격이니 오히려 당가의 가주로서 책임을 져야 함이 옳다.”
가주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맹과 관을 대변하는 발언까지 연이어 쏟아내고 있었다.
뿌득!
노천의 이가 악물렸다. 허나, 가주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당가는 중립을 견지하고 완전한 진상을 파악하기 전까지 그들의 처사를 용인하며, 팽가와 관, 맹에 끼친 폐에 대해 당문은 스스로 책임을 진다. 본문의 제자 중 오십 명을 파문하는 것으로 매듭짓고자 하며…….”
“가주!”
결국 더는 참지 못한 노천이 노성을 토해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요! 관과 맹의 협조를 위해 팽가에 협조하겠다니! 거기에다 오십 명을 파문…… 그들은 명호를 죽인 자들이란 말이오!”
노천이 뭐라 함에도 가주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탁.
당지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단상을 내려와 문 쪽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당가가 맞소?”
노천이 거듭 소리치자 가주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명호가! 당가의 식솔이 팽가에게 능욕당하며 죽었소! 한 명이 죽었으면 백 명을 죽이는 게 우리 당가요! 그런데 이 결정은 대체 뭐냔 말이오? 이게 내가 알고 있던 당가가 맞느냔 이 말이오!”
“백 배로 갚으라고 하셨습니까?”
노천의 울부짖음에 가주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뒤돌아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우리 당가는 노형께서 말씀하신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노천을 향해 가주는 무심한 얼굴로 노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선 당옥을 빠져나갔다.
“허어!”
노천은 비분강개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 곧이어 또 다른 노인을 바라보곤 소리쳤다.
“일 장로! 명호는 당가 사람이며 천중단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 그 아이가 팽가 무리에게 처참하게 난자당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런 결정을 한단 말이오! 철혈냉군(鐵血冷君)이라 불리던, 내가 알던 일 장로가 맞는 거외까?”
“…….”
일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 역시 무심하게 가주가 자리를 비운 단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노천은 신음을 터트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믿었고, 의심치 않았던 당가였다.
그런데 모양새를 보아하니 맹과 관의 눈치에 꼬리를 만 형국이었다.
“원한을 품으면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는 당가가…… 염병, 당가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노천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어느 곳보다 굳게 믿었던 당가가,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마는 행동을 하자 충격이 너무나 커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 실행으로, 이 자리에서 가주 당의군이 명하니 당의명과 당의선, 당의비 등 3당의 당주들을 모두 파직한다.”
“……?”
노천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언제 올라갔는지 당의명이 단상 위에서, 가주가 읽지 않은 글귀를 마저 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5각의 각주들, 6전으로 구성된 전주 전원을 예외 없이 파문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실무자, 일급 호법 등도 모두 파문하여 당문의 기강을 바로 세운다. 이들은 오늘부로 당문의 사람이 아니며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당문에 한 발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뭐, 뭐? 5각의 각주와 6전의 전주……?”
노천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당의명과 당의선, 당의비(唐意緋).
이들은 중사당, 비암당, 조쇄당(造鎖堂)의 3당으로 이루어진 당가의 기둥들이었다.
거기에 5각과 6전 역시 3당과 함께 당가를 받들고 있는 핵심 조직이었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게야?”
일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서 노천은 어이가 없었다.
가주가 50명의 무인들을 파문한다고 한 말만 해도 그로서는 충격이었다.
헌데, 그 결정이 당문의 일개 무인들이 아니라 전원 요직에, 그것도 최고의 실세들과 핵심 인사만을 골라서 파문해버리다니?
“형님, 가주께서 내린 지침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멍한 표정으로 있던 노천에게 당의명이 선언문을 들고 느릿하게 내려오며 말했다.
“허면……?”
“예. 가주께서는 당가를 대표하는 고수 전원을 파문하신 겁니다. 고의로 말이지요.”
“……!”
노천은 그제야 눈을 부릅떴다.
구대일방,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맹이 관여된 사건.
당가의 이름으로 장씨세가에 도움을 준다면, 훗날 일이 잘되든 못되든, 반드시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가주는 아예 파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가의 핵심 전력을 노천 어르신께 드린 거란 말입니다. 맹의 일이라도 제지받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말이지요.”
당의명이 느릿하게 살기 뚝뚝 돋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계 집안인 장씨세가와 달리 당문은 뼛속까지 무가 집안.
그 말은 주요 직책에 있을수록 실력이 뛰어나는 것을 뜻했다.
당가에서 가주와 장로를 제외한 우선순위로 50명.
이건 당가의 핵심이 아닌 모든 전력이라 해도 믿을 만했다.
– 백 배로 갚으라고 하셨습니까?
– 그럼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우리 당가는 노형께서 말씀하신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래. 내가 착각했네. 고작 백 배 가지고 갚으려고 했다니…….”
마지막 가주의 말을 떠올린 노천이 씨익 웃었다.
당문을 건드린 죗값.
알고 보니 가주의 말은 백 배로 갚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작 백 배밖에 되지 않느냐는 의미였던 것이다.
“문주, 출발 안 하시렵니까?”
문득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일 장로였다.
“……문주?”
노천의 얼굴이 해괴하게 씰룩거리자 일 장로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하루아침에 가문에서 파문을 당한 늙은이와 젊은이가 오십이나 되오이다. 당연히 앞에서 이끌어 주실 분이 필요하지 않소이까. 강호에 독선으로 이름을 날리신 대형이 아니면 문주를 누가 맡소이까.”
“……뭐, 나중에 ‘복귀’할 때까지의 임시직이겠습니다만.”
당의명이 씨익 웃으며 일 장로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일 장로가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문주께서 장씨세가와 연줄이 있다 하셨지요. 그 가문이 제법 돈이 많다더군요. 그런 반면 지금은 꽤 곤경에 처해 있고요. 하루아침에 가문에서 쫓겨난 사람이 오십이나 되니…… 한동안 그쪽에서 밥을 얻어먹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이놈이 나이 처먹고 실성을 했나.”
노천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깔고 있으면서도, 맹이나 관에 들이댈 변명을 미리부터 차곡차곡 준비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하기야, 이런 놈이니 가주를 휘하에서 보좌하는 일 장로씩이나 되었지 싶었다.
“자넨 참 그 성질머리 그대로구먼.”
노천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일 장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가 나면 얼굴이 더 무표정해지는, 가주와 같은 부류인 자였으니까.
“뭘요. 성질 많이 죽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가주의 명도 듣지 않고 하북으로 달려갔을 텐데.”
“크크큭…… 염병! 하긴. 30년 전에 화산파 일대 제자한테 한 대 처맞고는 화산 전체에 독을 깔아 버린 게 자네였지?”
“말은 확실히 하십시다. 깝죽거리다 저에게 죽은 화산파 일대 제자한테라고 말이지요.”
살기를 머금은 서슬 퍼런 눈동자에 난처한 기색이 보이자 노천이 손사래를 쳤다.
“거, 알았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서로 너무 이러지 말자.”
노천이 화해의 웃음을 보이던 그때, 말수 적은 노인이 한 발짝 나왔다.
“형님, 당가는 명가입니다. 그러니 너무 잔혹하게 살수를 뿌리지 마십시오.”
이 장로였다.
“살수를 뿌리지 말라니?”
“적당히 수준에서 손을 봐줬으면 해서 말입니다.”
“…….”
“한 삼백 목숨 정도로 넘어갔으면 합니다만.”
“허허허.”
노천은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장로는 일 장로보다 더 말수가 적은 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잔혹함은 일 장로보다 오히려 더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중후한 저음이지만, 그의 얼굴은 흉측했다.
본래 이 장로는 중사당 출신으로 독을 너무 많이 다루다 얼굴이 반쯤 녹아내렸다. 그 때문에 같은 당문 사람들도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들어할 만큼 지독한 독인이었다.
“참고하겠네.”
노천은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형님, 빨리 가십시다. 애들 다 모아놨습니다.”
“독뱀하고 독충도 두둑이 챙겼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사방에서 순간 말없던 전주, 각주, 당주들이 고개를 숙여왔다.
‘팽가야,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곧 알게 될 게다.’
당가의 최정예를 바라보는 노천.
그의 얼굴에 어느새 흐뭇함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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